가) 균여의 저술
均如傳에 의하면 균여의 저술로≪搜玄方軌記≫10권·≪孔目章記≫6권·≪五十要問答記≫4권·≪探玄記釋≫28권·≪敎分記釋≫7권·≪旨歸章記≫2권·≪三寶章記≫2권·≪法界圖記≫2권·≪十句章記≫1권·≪入法界品抄記≫1권이 있었다고 한다.≪수현방궤기≫·≪공목장기≫·≪오십요문답기≫는 智儼의 교학에 대한 저술이며,≪법계도기≫·≪입법계품초기≫는 의상의 교학에 속한 저술이고, 그 나머지는 法藏의 교학에 의한 저술이다.
이 중≪교분기≫·≪삼보장기≫·≪지귀장기≫·≪10구장기≫·≪법계도기≫가 현재 전해지고 있다. 또 崔南善의<均如傳解題>에 의하면≪法性偈抄≫3권이 현전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041)<均如傳>(崔南善 編,≪新訂 三國遺事≫附錄, 民衆書館, 1946), 55쪽. 아마도 그것은≪법계도기≫의 이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균여의 저술 중 현전하는 것은 의상이나 법장의 저술에 대한 해설이지만, 그 내용은 단순한 주석이나 모방이 아니라 균여 자신의 저작이며, 그 체제도 이들 저자의 그것과 상당히 다름을 보여준다.042)金杜珍,<均如의 生涯와 著述>(≪歷史學報≫75·76, 1977;≪均如華嚴思想硏究≫一潮閣, 1983, 51∼52쪽). 또 균여의 저술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은 의상계의 신라 화엄사상이지만, 그 외에 원효나 법장의 교학 역시 그의 저술에 영향을 주고 있다. 특히 성상융회사상은 법장의 저술에서 영향을 받았다.
나) 균여의 정치·사회적 입장
균여는 태조 6년(923)에 黃州의 荊岳에서 태어났으며, 속성은 邊氏로 아버지는 煥性이며 어머니는 占命이다. 그의 가문은 대호족이 아닌 지방의 군소 토호였으며, 일찍부터 불교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황주지역의 불교사원은 대부분 그 곳의 강호였던 황보씨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균여도 그들과 연고되어 있었다. 균여는 당형인 善均을 따라 復興寺의 識賢和尙의 문하에서 출가하였는데, 그 후 靈通寺의 義順에게 수학하였다. 의순도 황보씨와 연결되어 있었는데, 정종 4년(949)에 균여는 그를 통해 大穆皇后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후 균여는 광종과 돈독하게 연결되었다.
광종 4년(993)에 균여는 국사 謙信의 천거로 祈晴祭를 주관하였다. 後周가 사신을 파견하여 광종을 책봉하려 할 때 마침 비가 오자, 균여가 圓音으로 강연하니 하늘이 맑아졌다고 한다.043)赫連挺,≪均如傳≫感通神異分者. 광종 4년 경이면 화엄종 승려인 겸신이 국사에 봉해질 정도로 광종의 화엄사상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있었다. 그러한 사상적 분위기 속에서 균여는 광종과 접근할 수 있었다. 책봉의례를 위한 국가적인 기청제를 주관한 점으로 미루어, 이 때 균여는 광종대 전제정치의 태동에 관여하였을 것이다. 광종은 기청제를 마친 균여의 가족 10여 인에게, 칙명으로 각각 田 25頃과 노비 5명을 내리는 등 후한 은전을 베풀었다.
균여가 실제 광종대 전제정치의 핵심인물로 부상한 것은 광종 9년(958)에 佛日寺에서 消災道場을 주관하고 난 후이다. 이 때 광종이 균여를 찾아뵙고 敬重을 더하여 총애함이 고금에 뛰어났다고 한다.044)赫連挻,≪均如傳≫感通神異分者. 불일사는 광종 2년(951)에 어머니 劉氏의 원당으로 창건된 절이다. 당시 균여의 나이는 만 35세에 지나지 않았다. 원로도 아니요 그렇다고 높은 승직에 있지도 않은 균여를 찾아본 광종의 의도에는, 종교 외의 정치적 포석이 더 강하게 깔려 있었을 것이다. 광종 9년 이후 전제 개혁정치는 박차를 거듭한 듯 급속히 진전되었는데, 그 이데올로기를 성립시키는 데 균여의 사상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045)金杜珍,<均如華嚴의 史的 意義>(≪韓國華嚴思想硏究≫, 東國大 佛敎文化硏究所, 1982), 157쪽.
균여의 저술은 광종 9년에서 13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설교된 기록이었다. 광종 14년(963)에 귀법사가 창건되어, 균여는 그 곳의 주지로서 남은 생을 보내었다. 이것으로 보아 어쩌면 균여는 귀법사를 창건하는 주역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즉 귀법사는 전제정치를 이념적으로 뒷받침할 균여의 성상융회사상을 펴기 위해 창건되었을 것이다. 황보씨세력과 관련있는 균여를 광종이 측근세력으로 흡수한 것은 전제정치의 성격과 관련된다. 국초 이래 군소 토호세력은 지방의 강호들과 관련되어 있었을지라도, 그들과 이해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았다. 광종도 황보씨와 연고가 있지만 그들과 이해를 완전히 같이 하지는 않았던 균여를 회유하여 결합함으로써, 측근세력을 보강하고 상대적으로 황보씨와 같은 강호세력을 효과적으로 약화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균여는 전제정치의 핵심 인물이면서도 강호였던 황보씨와의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지 않았다. 측근세력의 이러한 성향은 광종의 전제정치에 상당한 영향을 주어 광종 말년에 강호들은 점차 세력을 회복해 갈 수 있었다. 광종 19년(968) 이후 균여는 귀법사 내의 正秀와 대립하고 있었다. 어쩌면 정수는 균여보다 더 광종과 밀착된 인물이며, 그의 거세는 광종대의 전제주의에 반발하는 강호세력의 압력에 의한 것이었다. 정수 외에 崔行歸 등 광종의 倖臣이 거세되면서 전제정치는 실패로 기울게 되었다.046)金杜珍,<高麗光宗代 專制王權과 豪族>(≪韓國學報≫15, 1979 ; 위의 책, 100∼102쪽). 광종 24년(973) 균여의 입적은 이런 면에서 생각되어야 한다. 균여는 비록 강호와의 연결을 청산하지 않은 인물이지만, 광종대의 전제주의와 운명을 같이 하였다.
다) 성상융회사상
균여의 사상은 광종대 전제정치를 위한 체제의 통합과 관계되면서 강한 융합사상으로 나타났다. 그러한 융합사상으로서의 성격을 가장 뚜렷하게 나타낸 것이 性相融會사상이다. 본래 중국의 성상융회사상은 교종 내부의 대립을 해소하기 위해 화엄종사상 내에 법상종사상을 융합하려는 것으로, 이미 法藏에 의해 체계화되었는데 武周朝의 전제정치를 옹호하는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047)鎌田茂雄,≪中國華嚴思想史の硏究≫(東京大出版會, 1970), 147쪽. 균여는 주로 법장의 저술을 주석하면서 성상융회사상을 주장하였다.
신라 이래의 한국 불교에서 그는 圓宗으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나타냈다.048)張元圭,<華嚴敎學 完成期의 思想硏究>(≪佛敎學報≫11, 1974), 16쪽. 때문에 그의 저술에는 모두「圓通」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균여는 원종으로서의 성격을 표방하면서 의상 화엄사상의 융회적 성격을 충실히 계승하였다. 이처럼 화엄사상의 수용면에서 균여의 성상융회사상은 법장의 그것에 비해 오히려 더 융회적 사상으로 나타났다. 그렇지만 법장의 사상경향을 무시하지 않은 데에서 균여 화엄사상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균여는 의상과 법장의 화엄사상의 구조를 橫盡法界와 竪盡法界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의상의 횡진법계는 “一을 부를 때 一切가 一名으로 불리워진다”고 했다. 횡진법계에서는 전체의 하나 하나를 파악하기 보다는 원칙적인 「一」을 파악하고, 그것으로써 전체를 이해하려 한다. 반면 법장의 수진법계에서는 “一을 부를 때 一切가 각각 불리워진다”고 했다.049)均 如,≪法界圖圓通鈔≫권 下, 20葉 左에 “呼一時 一切口許 有二義 一者藏師 呼一名時 一切各各 自名口許 二者相師呼一名時 一切共一名口許”라 했는데, 전자를 竪盡法界, 後者를 橫盡法界라 한다. 수진법계에서는 전체를 파악하고자 할 때 그 구성된 하나 하나의 의미에 집착해서, 그것을 각각 달리 이해하려 한다. 智儼은 의상과 법장에게 각각「義持」와 「文持」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는데, 이것 역시 그들이 가진 법계관의 차이와 연결될 수 있다.
균여는 횡진법계와 수진법계를 종합한 화엄사상 체계인「周側」을 주장했다. 그것은 횡진법계를 근간으로 수진법계까지를 융합하려는 사상이다.「周」는 횡진법계를,「側」은 수진법계를 뜻하므로「주측」은 두 법계를 융합한 것이며,050)均 如,≪旨歸章圓通鈔≫권 上, 8葉 右.「주측」 사상 내에서 두 법계는 반드시 구별될 필요가 없게 되어 결국에는 하나로 통합된다.051)金杜珍,<均如의 法界觀>(≪歷史學報≫77, 1978;앞의 책, 303∼308쪽).
균여의 사상이「주측」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은 의상의 사상을 근간으로 법장의 사상까지를 융합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원칙적인「一」속에 전체를 통합하면서도 그 하나 하나의 의미를 음미해 보려고 한 것이다. 말하자면 만물의 제법상에 대한 파악이 균여의 화엄사상 속에 결여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제법상이 원칙적인「理」속에서 융회되어 하나로 파악될 때 事나 理는 모두 민멸되어 존재를 초월해 버리기 때문에, 그것은 혼연된 一體로 나타나게 된다.
「性」은 理이고「相」은 事이기 때문에 성상융회사상은 理와 事의 융합사상 즉 理事無碍사상으로 연결된다.「相」이 실체를 갖지 않는다면「性」은 주체가 되는 점이 다를 뿐,「성」과「상」이 다 같이 민멸되어 혼연된 일체를 이루게 된다. 따라서 균여의 성상융회사상은 性相無碍사상으로 불러야 마땅하다. 균여는 이러한 성상융회사상을 相在不在門·相是不是門·空不空門의 三門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상재부재문에서는 事相이 自性을 가지지 않으므로 융회가 가능함을 논했다. 상시불시문에서는 事相의 민멸을 논했다. 공불 공문에서는「성」과「상」이 혼연된 일체로 융합되는 주체를 논했다.052)金杜珍,<均如의 ‘性相融會’ 思想>(≪歷史學報≫90, 1981;앞의 책, 222∼226쪽).
라) 성속무애사상
균여의 화엄사상 내에는 神異的인 측면이 강조되었다. 그는 순수 교리적이라기 보다는 토착적인 신앙을 흡수하여053)許興植,<高麗前期 佛敎界와 天台宗의 形成過程>(≪韓國學報≫11, 1978), 93쪽. 사상체계를 완성시켰다. 균여사상의 신이한 측면은 광종대 중기에 토착적 사조가 크게 일어나는 것과 연관된다. 이 때에 등장하는 토착사조나 균여사상의 신비적 측면은 광종의 전제주의와 관련해서 이해해야 한다.
토착적이거나 신이적인 면을 강조하는 균여의 사상은 서민 백성에게 친근감을 줄 수 있다. 실제 균여는 향가를 지어 聖俗을 구별하지 않고 하나로 묶고자 하여 聖俗無碍사상을 내세웠다.<普賢願歌>에서 師의 마음은 본래 부처의 경지와 같으니 세속과 가깝게 하기 위해054)赫連挺,≪均如傳≫譯歌現德分者.「俗」과「眞」(聖 혹은 僧)을 융합하려 했으며, 더 나아가 동방과 서방, 남녀나 귀천까지를 융합하려는055)위와 같음. 강력한 통합사상을 내세웠다.
균여는 성속무애사상을 펴면서 특히 서민 대중을 의식하고 있었다. 균여는 학문에 뜻을 둔 사람들을 부처에게로 귀의시키고자 보현원가를 지었는데, 그 마지막은 恒順衆生歌와 普皆廻向歌로 끝을 맺고 있다. 이 두 향가의 내용은 중생을 부처에게로 귀의시키려는 것이다.056)위와 같음. 균여의 교학에 있어서 중생과 부처는 크게 구별되는 것이 아니어서, 깨달으면 부처가 되고 미혹하면 중생이 된다. 따라서 중생은 곧 부처가 된다.
균여의 성속무애사상은 불교계의 융합은 물론 세속계까지를 융회하려는 강력한 통합사상인데, 성상융회사상을 기반으로 성립되었다.057)金杜珍, 앞의 책, 166쪽. 성상융회사상은 교종 내부의 모순을 해결하려는 융합사상이지만, 광종대 당시 토착적 사조의 등장과 연결되어 신이한 성격을 지니게 되면서, 끝내는 성속무애사상으로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광종대 중기의 토착적 사조는 전제주의와 밀착되어 있었다. 균여의 성상융회사상은 비록 토착적이고 신이한 면을 강조하고 있으면서도, 결코 중국 법장으로 이어지는 정통파화엄의 보편성을 완전히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의상의 사상을 근간으로 법장의 사상을 융합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균여의 화엄사상은 법장 화엄사상 중 제법상을 강조하는 사실적 측면을 흡수하여 법상종사상의 융회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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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