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Ⅰ. 불교
  • 1. 불교사상의 전개
  • 2) 광종대의 불교통합운동과 천태학의 연구
  • (2) 천태학의 연구
  • 나. 고려 초기의 천태교학

나. 고려 초기의 천태교학

 고려 초 義通과 諦觀은 중국에 들어가 활동하였는데, 의통은 중국 天台宗의 13대 교조가 되었고 제관은 천태종 교본이라 할 수 있는≪天台四敎儀≫를 저술하였다. 중국에까지 역수입된 의통과 제관의 천태사상을 논하면서, 고려 초기 사회에서 천태학의 연구가 활발하면서 그 수준이 높았다고 생각하는 견해063)金哲埈,<高麗初의 天台學硏究>(≪東西文化≫2, 啓明大, 1968 ;≪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 1975, 342∼343쪽).가 있는 반면 고려 초에는 종파로서 천태학이 성립되어 있지 않다는 견해도 있다.064)許興植,<高麗前期 佛敎界와 天台宗의 形成過程>(≪韓國學報≫11, 一志社, 1978), 80∼96쪽. 곧 불교종파로서 5교 9산이 성립되어 있었다는 통설을 부정하면서 고려 초에는 선종인 조계종과 교종인 화엄종·유가종의 3대 종파만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로 보아 고려 초에 천태학 연구가 활발하였는지는 의심스럽다. 다만 광종대 법안종의 성행은 천태종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킨 것이 분명하다.

 고려 건국 초에 천태사상이 성행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나말려초에 무려 30여 명에 달하는 선종 승려들의 비문이 전하지만, 그들 가운데 법안종 승려인 지종을 제외하면 천태사상에 접한 자는 현휘065)崔彦撝, 앞의 글, 153쪽.와 찬유066)金廷彦,<高達寺元宗大師惠眞塔碑>(≪朝鮮金石總覽≫上), 209쪽. 정도이며, 이들도 천태교문을 잠깐 거쳐가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고려 초에 후삼국을 통합하려는 기운과 연관하여 法華나 천태사상의「一心三觀法」이 유포되어 있었다. 다음 기록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지금 동쪽의 韓 땅도 일찍이 三分된 고로 우리 太祖(王建)가 창업할 때에 행군한 福田인 四大法師에 의한 一心三觀法이 있었는데, (그것은) 聖君이 三韓을 합하여 한 나라를 이루는 것과 풍토가 서로 맞습니다. 만약 法을 구하여 유행시킨 즉 後嗣가 죽순처럼 번창하고, 수명이 연장되어 왕업이 끊이지 않으며, 항상 일가를 이룰 것입니다’라고 하였다(閔漬,<國淸寺金堂主佛釋迦如來舍利靈異記>,≪東文選≫권 68).

 고려 후기 閔漬의 이 기록은 다소 사료적 가치가 떨어지기는 하지만, 천태종의 본거인 國淸寺 관계기사인 까닭으로, 그 전부터 있어오던 국청사 寺乘이라든가 기타의 기록을 참고하여 서술되었을 것이다.067)金哲埈, 앞의 글, 336쪽. 왕건에게「會三歸一」의 사상을 전한 能兢은 법화 내지 천태종 계통의 승려였다. 隋는 남조의 陳·齊를 병합하여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 국청사를 세우고 일심삼관법의 천태학을 진작시켰다. 이러한 풍토는 후삼국 통일의 과업을 눈앞에 둔 왕건의 처지와 비슷하였기 때문에, 능긍은 천태교학을 유행시킬 필요를 역설하였다.

 의통이나 제관은 능긍을 배출하였던 고려 초기 천태교학의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 즉 능긍보다 약간 시대가 앞서는 順之의 사상은 법화사상을 포용하고 있다. 그의 廻漸證實際論은「會三歸一」사상을 담고 있다.068)≪祖堂集≫권 20, 順之. 그런가 하면 이미 신라 중대에 元曉는 朗智法師로부터≪법화경≫강의를 들었다고 하며,≪法華宗要≫를 저술하였다. 원효의 법화사상은「회삼귀일」의 논리에 근거하고 있으며, 智顗의 교학에서 상당한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고 한다.069)李永子,<韓國 天台思想의 展開>(≪日本學≫2, 東國大, 1982), 77∼81쪽. 신라 중대 이래로 비교적 성행하였던 법화사상의 전통은 고려 초기의 천태교학을 일으키게 하였을 것이다.

 신라 말 吳越에 들어간 의통은 천태 덕소가 거주하던 雲居寺에 머물렀으며, 지금은 전하지 않으나≪觀無量壽經疏記≫·≪光明玄■釋≫등의 저술을 남겼다. 이보다 뒤인 광종 12년(961)에 오월왕 錢俶이 당의 선승인 玄覺이 지은≪禪宗永嘉集≫을 읽다가「同除四住」라는 술어의 의미를 몰라 천태 敎籍을 고려에 구하였다. 이에 고려는 建隆 2년(961, 광종 12)에 사문 제관을 파견하여 天台論疏를 가지고 螺溪에 이르게 했다.070)志 磐,≪佛祖統記≫권 23, 歷代傳敎表(≪大正新修大藏經≫49, 249쪽 中). 제관은 광종 12년에 오월왕의 요청으로 고려국에서 파견되었다. 이 외에는 제관에 관한 절대 연대가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광종 12년에 중국에 들어갔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 때를 전후한 시기에 중국에 들어갔을 가능성은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제관은 중국에서 일생을 마쳤으며 고려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중국에 들어가고 난 후의 고려와 오월국의 정치·사회상황은 상당히 달라졌다. 고려사회에서는 광종대 중기의 전제정치가 한창 행해지고 있었다. 한편 오월왕 전숙은 강력한 지방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새로 일어나는 송 태조에게 입조해야만 했다. 그 후 약 20년이 지나 나라가 없어지자, 전숙은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옮겨가 살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렇게 다른 정치상황 속에 제관의 사상은 고려사회에서 보다는 오월국의 사회에서 더 필요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서의 제관과 의통의 행적은 광종대 천태교학의 발달을 충분히 생각할 수 있게 한다. 광종대에는 법안종이 대두하였고, 교선일치의 사상체계가 성립되어 있었다. 특히 탄문의 경우처럼 화엄종의 입장에서 선종사상을 융합하려는 경향도 있었다. 광종대의 이러한 불교학의 분위기는 천태교학의 진흥을 가능하게 했다. 법안종과 천태종은 비록 선종과 교종이라는 입장의 차이는 있지만, 사상면에서는 대단히 근접되어 있었다.071)天台宗이 華嚴의 입장에서 선종사상을 융합하려는 것이라면, 法眼宗은 선종의 입장에서 교종을 융합하려는 敎禪一致의 사상이다. 다만 법안종은 禪的 理事觀으로 표현되는데, 그것은 선종과 성상융회 사상의 융합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선종과 화엄사상을 융합하려는 천태사상의 경향과 부합되는 면을 많이 지녔다. 훗날 의천의 교학은 이러한 불교학의 전통에서 생각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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