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Ⅰ. 불교
  • 1. 불교사상의 전개
  • 4) 대각국사 의천의 불교개혁운동과 천태종의 창립
  • (4) 불교개혁운동과 천태종 개창
  • 나. 천태종의 개립

나. 천태종의 개립

 대각국사는 송에서 귀국하자 국내외에서 구입한 장·소를 편찬하여 간행하는 한편 천태종 개립에 전력을 기울였다. 선종 6년(1089) 2월에는≪天台四敎儀≫를 海印寺에서 重刻하여 간행하고148)大屋德城, 앞의 책, 祐世僧通義天關係章疏에 板本 4장의 영인본이 수록됨. 10월에는 國淸寺를 개창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천태종 개창의 의지는 송에 갔을 때 이미 천명한 바 있다. 그는 송에서 慈辯 從諫으로부터 법등을 전하는 믿음의 징표를 받은 후 다시 天台山에 올라가 智者대사탑 앞에 참배하고 발원문을 지어 서원하였다.

저는 머리를 조아려 귀명하며 天台敎主 智者대사께 아룁니다. 일찍이 듣건대 대사께서는 ‘五時八敎로써 동쪽에 전해진 부처님 1代의 성스러운 가르침을 분류하여 해석하였는데 이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후세에 불법을 배우는 이들이 이에 의거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조사 화엄소주께서도 ‘현수 5교와 천태교의는 크게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조용히 생각하옵건대, 우리나라에도 옛적 諦觀법사가 대사의 敎觀을 강연하며 해외까지 유통시켰으나 그것을 익혀 전하는 일이 끊어져 지금은 없습니다. 제가 분발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스승을 찾아 도를 묻던 바, 이제 錢塘의 자변대사 강석에서 敎觀을 이어 받고, 그 대략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후일 고국에 돌아가면 목숨 바쳐 선양하여 대사께서 (중생을) 위하여 가르침을 펴신 노고의 덕에 보답할 것을 이에 서원합니다(<大宋天台塔下親參發願疏>≪大覺國師文集≫권 14).

 의천이 얼마나 지극한 마음으로 天台敎觀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는지 알 수 있다. 또 이 교관을 목숨바쳐 홍포하겠다는 굳은 결의를 읽을 수 있다. 이 결의가 천태종의 개종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보기도 하지만,149)許興植,<天台宗의 形成過程과 所屬寺院>(앞의 책). 의천에게 있어 종파의식이란 그리 배타적인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天台宗은 天台 智顗(538∼597) 선사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종파 관념에 의한 천태종이란 명칭은 당 중기의 천태 중흥조인 6조 荊溪 湛然(711∼782)이 처음 쓰기 시작하였다. 그 계보는 인도의 龍樹보살로까지 소급되기도 하지만, 중국에서는 北齊의 慧文선사를 初祖로 하고, 제2조 慧思선사(514∼577), 제3조 智顗선사, 그리고 灌頂에서 智威, 慧威, 玄朗, 湛然으로 이어진다. 일반적으로 화엄종과 더불어 천태종은 중국 불교사상의 정수라고 일컬어진다. 천태교학은 북지의 禪과 남지의 교학을 통합하여 敎門과 觀門의 조직으로 이룩되었다. 교문이란 교판과 교리를 말하고 교판이 5時 8敎이다. 諦觀의≪천태사교의≫는 천태교학을 압축·요약한 책이다. 이것에 의하면 5시는 화엄·아함·방등·반야·법화열반시를 말하고, 8교는 化儀四敎와 化法四敎인데, 화의 4교는 돈교·점교·비밀교·부정교이며, 화법 4교는 장교·통교·별교·원교를 말한다. 화의란 교육방식이고 화법이란 교육내용이라 할 수 있다. 이 교관의 특색은 화법 4교에서 화엄경은 별교에 해당하고, 中道實相을 설하는 법화경은 원교라고 판단 해석하는 것이다. 천태종의 교의는 이 원교인≪法華經≫의 ‘모든 존재가 진실한 모습’이라는 뜻을 천명한다. ‘모든 존재가 진실한 모습’ 즉 제법실상을 空諦·假諦·中諦의 3諦로서 설명한다. 이 3제의 상호관계는 卽空·卽假·卽中의 圓融 3諦로 파착한다. 원융 3제는 모든 존재현상에 자연 그대로 갖춰진 妙諦로서 1境 3諦라고도 한다. 이를 觀心門 즉 실천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1心 3觀이다. 원융 3제의 이치를 한 마음에 파착하는 것인데 이 3관도 즉공·즉가·즉중이라 한다. 진리를 깨달아 가는 실천적인 방법이 止·觀으로서 천태지관을 圓頓止觀이라 한다. 이 지관에 의한 수행과정을 여섯 단계로 분류하여 六卽이라 한다.

 이상과 같은 교문과 관문이「새의 두 날개」혹은「차의 두 바퀴」처럼 두문의 어느 한 쪽도 없을 수 없다는 敎觀雙修의 교리체계를 가진 것이 천태종이다. 天台 智顗는 맹목적 수행만을 능사로 하는 선사를 暗證禪師라고 비판하고 또 문자·어구에 집착하여 부처님의 본지를 파착하지 못하는 경학자들을 文字法師라고 꾸짖었다. 따라서 의천이 귀국하여 선종과 교종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천태교학의 요체인≪法華玄義≫를 강의하며 동지들을 모아 지관을 닦으며 천태종풍을 드날리려고 노력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150)“台嶺宗門 天未喪 會須同志振遺風”(<送翼宗大師歸故山>,≪大覺國師文集≫19). 천태종 본산 국청사가 인예태후의 발원으로 선종 6년(1089)에 창건되기 시작하여 숙종 2년(1097) 2월에 완공되자, 의천은 천태교학을 강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해동에 불법이 전래된 지 7백여 년 동안 여러 종파가 다투어 연설하고 모든 가르침이 퍼졌지만 천태의 한 종파만이 그 밝음이 가리워졌다. 과거 元曉보살이 훌륭함을 칭찬하였고 이어서 諦觀법사가 전해 드날렸다(<新創國淸寺啓講辭>,≪大覺國師文集≫권 3).

 신라의 원효는≪法華宗要≫를 지어≪법화경≫의 一乘實相의 사상을 천명하였고,151)李永子,<元曉의 法華經理解>(≪제5회 국제학술회의논문집≫,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 518∼540쪽.≪涅槃宗要≫에서는 천태대사의 교판관에 대해 찬탄하고 있다.152)李永子,<元曉의 天台會通思想연구>(≪東國大論文集≫20, 1981), 19∼44쪽.
―――,<義天의 天台會通思想>(≪佛敎學報≫15, 1978), 219∼233쪽.
의천은 우리나라 천태시조를 원효라고 보고 계승자는 제관이며, 자신은 “목숨이 다하도록 그 꺼진 법의 등불을 밝히기 위해 정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였더니 이제야 그 소원이 이룩되었다”고 글을 맺고 있다. 비록 수사상의 어구라고 하더라도 ‘목숨이 다하도록 법의 등불을 밝히겠다고 맹세하였다’는 것은 의천의 천태종 개종의 굳은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천태종의 사회적인 기반이 되는 국청사는 7년 여에 걸쳐 완성된 국가적 대불사였다. 그러나 천태종은 국청사가 완공되기 전에 또 승과제도에 의한 사회적 형식을 갖춘 교단이 형성되기 전부터 인예태후의 후원 아래 실질적으로는 천태 실천의 도량이 베풀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인예태후가 白州의 見佛寺에서 선종 9년(1092) 天台宗 禮讖法을 약 1만 일 동안을 예정하여 베풀고 있는 것에서 짐작된다. 태후는 의천을 통해 천태 3관이 최상의 참가르침으로 일찍이 인식하고 있었고, 의천이 귀국하자 국청사 창건을 발원한 것이다. 또한 태후는 白蓮結社를 발원하고 여산의 18賢人의 진영을 모시려고 하였었는데, 의천도 태후의 백련결사정신에 힘입어 서방극락의 업을 닦아 왕생을 기원하였던 것이다.153)<祗合匡盧種社蓮>(≪大覺國師文集≫권 20).

 이와 같이 국청사가 창건되기 전부터 천태종 예참법을 베풀었다는 것은 고려에 일찍이 천태종의 法華讖法 도량을 개설하였음을 의미한다. 법화참법이란≪법화경≫에 의해 실천 수행하는 의례형식의 하나로서 천태의 四種三昧 가운데 하나의 실천행법이다. 또한 의천이 태후의 뜻을 이어 白蓮社를 결사하려 한 것도 4종3매 중 常行三昧의 행법과 일치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예태후와 의천은 고려 불교계를 개혁하기 위하여 천태종을 개립하는 道俗의 도반이었다고 하겠다. 국청사는 태후 별세 후인 이듬해에 완공되었는데, 의천은 송나라에 이 소식을 전하여 선배와 후배의 격려 서신을 받았다. 서신 중에는 경제적 원조를 바라는 내용도 있었다. 자변 종간은 천태교학의 광범하고 난해함을 말하면서 그것이 단절된 곳에서 선양하니 더욱 홍포를 바란다는 희망과 격려를 의천에게 보냈다.154)<大宋沙門從諫書>(≪大覺國師文·外集≫권 7).
그 외에 法鄰·元淨·仁岳·惟勤·可久 등의 이름이≪大覺國師文集≫에 보인다.
국청사 개창 이후 의천은 본격적으로 강의를 시작하면서, 천태의 기본서적으로 三大部의 하나인≪妙法蓮華經玄義≫10권을 강설하였다. 그리고≪南本涅槃經≫과 징관의 해석을 기초로 하여 ≪華嚴經≫과 함께 이≪法華玄義≫10권 등을 우리나라말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현재 전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주목되는 것은 湛然의 저술인≪十不二門≫도 강설한 점이다.155)<留題三角山息庵>(≪大覺國師文集≫권 19). 이것은 담연이≪法華玄義釋籤≫에서 迹門十妙에 이어 本門十妙를 설명하기 전에 논술한 10종의 둘 아님을 논한 것이다. 천태의 觀門인 摩詞止觀과 敎門인 法華玄義를 통일하여 이해한 것이 이≪십불이문≫이다. 이로 보면 의천이 교문과 관문의 통합적 이론을 천태교의에서 찾으려고 노력한 흔적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천태종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그 인맥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의천이 원효를 우리나라 천태교학의 시조로 추앙하고 제관을 계승자로 본다는 것은 앞서 살폈다. 원효는 학자이면서 참선을 하는 초종파적 생활을 한 무애도인이었다.156)의천은 元曉를 특정 종파에 국한시키지 않고, 性과 相을 融明하고 百家의 논쟁을 화합하여 일대의 지극한 논리를 터득하였다고 보았다(<祭芬皇寺曉聖文>,≪大覺國師文集≫권 16). 삼국시대 이후 많은 법화행자들이 있었을 터이지만 자료는 너무 빈약하다. 천태 지의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깨달음을 얻고 신라에 귀국한 緣光, 고구려의 波若, 백제의 玄光과 慧現 등 법화행자의 이름이 전하고 있다. 신라 성덕왕대에 法融·理應·純英이 천태교관을 전했고 緣會도≪법화경≫의 普賢觀行을 닦았다. 흥덕왕대에도 법화신앙은 신라인의 일반적 신앙형태였다.≪법화경≫의 會三歸一사상과 천태의 一心三觀의 관법이, 수나라가 진과 제를 통일하는 데 사상적 기반이 되었으므로, 고려 초기에는 能兢법사가 “고려도 후삼국을 통일하였으니 같은 천태사상을 받아들일 것”을 건의했다고 전한다.157)閔 漬,<國淸寺金堂主得釋迦如來舍利靈異記>(≪東文選≫권 68).
眞 靜,<芸台亞監閔旲書>(≪湖山錄≫권 4).
또 태조 18년(935) 중국 四明의 子麟이 고려에 천태교법을 전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은 이 능긍의 상소와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제관법사가 오월에 갈 때 보여준 고려 조정의 당당한 태도는 고려 불교계의 천태학의 수준을 시사해 주고 있다. 제관 이후에는 德善과 智宗(930∼1018)에 의해 계승되고 있는데 제관의≪천태사교의≫가 오월의 교학의 부족함을 보충한 것이라면 지종은 송에서≪大定慧論≫을 강의하였으므로 마하지관에 의해 관문을 보완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종의 경우 법안종과의 관련을 배제하고 생각할 수 없지만, 그의 활동이 의천 때에 와서 천태종 개창의 교단적 기반이 되었음직 하다.158)金相鉉,<高麗初期의 天台學과 그 史的 意義>(佛敎文化硏究院 編,≪韓國天台思想硏究≫, 東國大出版部, 1983), 114∼131쪽. 의천은 법안종과 밀접한 居頓, 神□, 靈巖, 高達, 智谷 등 여러 사찰의 선승 1천 명을 모집하여 천태종 개창의 기반으로 삼았다.159)許興植, 앞의 책, 272쪽. 당시의 달마 9산문의 선종 총림의 납자들은 6 내지 7할 이상이 천태종으로 옮겼다고 하므로, 의천의 천태종 개립은 선종의 교세에 지대한 타격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의천은 선 그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 목적인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방법상에서 궤도수정을 강력히 주장했을 뿐이다. 의천은 천태지관을 닦다가 늙어서 산사로 돌아가는 悟禪師에게 다음과 같은 송별시를 읊었다.

佛隴山(천태산) 높은 글이 땅에 떨어진 지 오래인데 조사(천태)께서 남긴 유풍 그대 기다려 행해지니, 공 이룩하고 믿음있는 그대 서울을 떠나, 숲과 샘 좋아하며 止觀을 배워 닦으리(<送悟禪師請老歸山>,≪大覺國師文集≫권 20).

 이 글에서 많은 선승이 止觀을 익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의천은, 翼宗선사가 옛산으로 귀산하는 것을 보고 송별시를 읊으면서 말세의 불법외호가 천태종의 종문을 수립하는 데 있다 하고 반드시 동지를 규합하여 그 유풍을 드날리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천태종을 개립할 때 모인 인적 구성은 다른 산문에서 1천 명이 들어오고 직접 국사에게 들어온 학도가 3백 명이라고 한다. 국사는 이들 중에서 숙종 6년(1101)에 우수한 사람 1백 명을 추려서 그들에게 중요 경론으로 시험을 쳐서 40명을 선발했다. 이러한 사실은 천태종이 최초로 승과를 치르고 사회적 제도가 뒷받침된 교단으로 공인받은 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천태종은 명실상부하게 교단을 형성하고 국청사를 중심으로 大禪師 德麟, 禪師 翼宗·景蘭·連妙 등의 선승 및 천태학을 계승하여 5산문을 떠나온 선승들과 의천의 직제자들이 크게 활약하게 되었다. 원래 선승들인 이들은 자기의 제자들과 함께 천태지관의 법문을 배우고 익혔을 것이고, 의천의 직제자들은 천태교학을 배우면서 사상적 기반을 형성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천태종 교단은 1천 3백여 명이 모인 대교단으로서, 국청사를 중심으로 5대 법문과 南崇山에 있던 선봉사의 법문이 모여 6대 문중을 형성하면서 고려 불교계를 혁신하였다.<선봉사대각국사비>음기에는 의천의 천태법맥을 이은 문도가 명시되어 있다. 이 선봉사비는 의천이 입적한 지 35년이 지난 인종 14년(1136)에 법손들에 의해 건립되었는데 그 인명이 1백여 명 이상 나열되어 있다. 천태종의 인맥을 계승한 문도 중에 익종대사의 제자 妙應大禪師 敎雄(1076∼1142)이 가장 뚜렷한 두각을 나타냈다. 교웅은 숙종 6년에 실시한 천태종의 승과에서 大選의 최고시험에 등과하여 대덕이 되고 그 후 대선사의 법계를 받았으며, 인종 13년 국청사 주지로 취임하였다가 인종 20년(1142)에 입적하였다. 교웅의 제자 중에 圓覺國師 德素(1108∼1174)가 있다. 현재 옥천의 영국사에 그 비가 전하는데, 명종의 두터운 존숭을 받고 천태종풍을 진작시켰다.160)金映遂, 앞의 글, 176쪽.

 천태종은 대각국사가 개창한 후 얼마 안되어 귀적하였으므로 예종이 즉위한 수년 동안 인주 이씨세력의 득세로 현환사 중심의 법상종에 압도되었다가 인종이 즉위하고 이자겸이 사망한 후에 교세가 부홍하였다.161)仁州 李氏세력과 고려 불교계의 사회경제적인 역학관계의 서술은 崔柄憲, 앞의 글(1984), 81∼84쪽 참조.≪高麗史≫에는 교웅이 국청사에 주지로 있을 때 인종이 두 번이나 그 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숙종 이래 국청사는 국장의 행차가 계속되어 의종도 행차하였으며, 명종(1171∼1197)이 즉위하면서 덕소는 왕사에 임명되었다. 교웅선사와 덕소왕사는 천태종 개창 이후 천태교관을 진작시키면서 교단을 통솔하였지만 명종 26년(1196) 무신 최충헌이 정권을 장악하고 조계선종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에 이르자, 천태교단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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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天台宗의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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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永子>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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