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Ⅰ. 불교
  • 3. 불교행사의 성행
  • 2) 항례적인 불교행사
  • (1) 연등회
  • 가. 정기적 연등회

가. 정기적 연등회

 고려 초기의 연등회는 매년 정월 15일에 열렸으므로 이를 上元燃燈이라 하였는데, 성종 때에 폐지되었다가 23년만인 현종 원년(1010)에 다시 열렸다. 즉 그 해 11월 거란의 대거 침입으로 부득이 난을 피하여 개경을 떠난 현종은 이듬해 2월 羅州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도중 2월 15일에 淸州의 별궁에서 연등회를 열었다.328)≪高麗史≫권 4, 世家 4, 현종 2년 2월 기미. 이리하여 현종 때부터 인종 말년에 이르기까지 130년간 변함없이 2월 15일에 연등회가 열리게 되니 이를 2월 연등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인종의 뒤를 이은 의종은 부왕 인종의 忌日이 바로 2월에 있으므로 2월을 피하여 정월 15일로 다시 바꾸었다. 그후 명종 2년(1172)에는 同知樞密院事 崔忠烈의 건의에 따라 현종 때부터 인종 말년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지켜 내려온 2월 15일로 되돌아갔으나,329)≪高麗史≫권 100, 列傳 13, 崔忠烈. 이듬해부터는 다시 정월 15일에 열렸다. 또 희종 5년(1209)에는 부왕 신종의 기일이 끼어 있는 정월을 피하여 또 다시 2월 15일에 열리어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해서 대개는 2월 15일을 준수하였다. 이처럼 연등회는 정월 15일의 上元日 또는 2월 15일에 열렸는데, 다 같이 정월 15일이나 2월 15일은 공휴일로 되어 있었다.

 연등회는 1월 또는 2월 15일에 여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혹 그 날이 寒食과 겹치게 될 때에는 문종 2년(1048) 2월에 있었던 경우처럼 늦추어 2월 16일에 열기도 하였으며 또는 문종 32년이나 원종 9년(1268) 때처럼 앞당겨 2월 12일에 개최하기도 하였다. 다시 명종 14년(1184)에는 정월 15일에 열었어야 했을 연등회가 3개월이나 늦추어져 4일 15일에 열렸다. 그것은 바로 전년 명종 13년 11월에 왕태후 임씨가 별세하여 국사가 다난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상과 같은 정월과 2월의 연등회는 각각 어떠한 성격의 것이며 또한 이들 상호간의 연관 관계는 어떠한 것인가를 살펴보자. 우선 정월 연등이 행해지던 정월 15일은 재래의 민속적 근거를 강하게 지니고 있는 날이다.≪東國歲時記≫에 의하면 정월 15일인 상원을 燈節이라 하여 여러 건물에 밤새도록 등불을 밝혔다고 했으며, 또한 이 날에는 달맞이 행사가 있어 횃불을 가지고 높은 곳에 올라가 달을 보며 흉년과 풍년의 기운을 점쳐왔다.330)≪東國歲時記≫正月 上元 迎月. 이같은 풍속은 고대로부터 있었을 것이며 아울러 새해의 풍년기원제같은 행사가 정월 15일에 있었을 것이니, 이것은 10월 祭天의 재래적 행사와 같은 계통이라 할 수 있겠다. 즉 불을 켜고 제사를 지내어 풍년을 기원하는 행사는 연등을 공양한다는 불교적 연등이 아닌 민간신앙의 재래적인 행사일 수 있다는 것이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제주의 풍속에는 木竿 열두 개를 세우고 신을 맞이하여 제사지냈다”고 하였는데, 목간은 멀리는 단군의 신단수와 연결되고 무속에서 오늘날까지도 전수되고 있는 신내림의 장대로서 필수적이다. 발음상으로 연등이 용등·용당과 유사하여 이는 龍神信仰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이같은 용신신앙은 농경사회에서 농작의 풍흉이 용신 내지는 風神에 의하여 좌우되는 것이라 믿고 여기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데서 연유한다. 풍신은 제주지방 이외에도 오늘날까지도 신앙되는데, 영남지방에서는 2월을 영등달이라 하여 靈登神을 풍신으로 신앙하여 불을 켜고 영등신을 위하는 농경의례가 행해지고 있다.

 이상에서 볼 때 정월과 2월의 연등은 재래의 농경의례에 의한 민속적 연중행사의 기반이 보다 강력하게 뒷받침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전통습속에 따른 농경의례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고려사≫예지 중의 上元燃燈會儀條는 연등회의 의식절차에 대해 밝히고 있다. 그에 의하면 연등회는 小會日과 大會日로 나누어 진행되었고, 그 절차는 行香·受賀百戱·宴群臣 등으로 이루어진다.331)≪高麗史≫권 69, 志 23, 禮 11, 嘉禮雜儀 上元燃燈會儀. 그런데 이들 의식절차에서는 불교의례적인 내용을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즉 行香酌獻의 절차는 팔관회나 先王諱辰眞殿酌獻儀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332)≪高麗史≫권 64, 志 18, 禮 6, 先王諱辰眞殿酌獻儀. 受賀와 宴群臣은 元正冬至節日朝賀儀와 大觀殿宴群臣儀같은 조정의 일상적 의례에서도 볼 수 있다.333)≪高麗史≫권 67, 志 21, 禮 9, 元正冬至節日朝賀儀 및 권 68, 志 22, 禮 10, 大觀殿宴群臣儀. 한편 百戱는≪고려사≫예지 중 팔관회와 연등회에만 있는 것이며, 연등회 때 백희잡기를 연출하는 사람들을 山台人이라 칭하고 특히 이들 庭殿山台邑을 燃燈都監에 편입시키기도 하였다.

 정월과 2월 연등의 성격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정월 15일과 2월 15일 연등회의 행사적 의미는 재래의 제천신앙 및 농경의례에 의한 재래의 습속이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의례행사의 절차가 불교의식을 따르지 않고 一般常儀의 의식절차를 따르고 있고 執禮官도 승려가 아니라는 점이다. 셋째는 일반적인 다른 불교의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백희잡기를 연등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상과 같이 살필 때 훈요에 의한 정월, 2월의 연등회는 불교의례의 소산이 아니라 오히려≪魏志≫東夷傳에 전하는 “항상 5월에 씨를 뿌리고 나서 귀신에 제사지냈으며 여럿이 한데 어울려 춤을 추고 음주를 즐기기를 밤낮으로 그치지 않았다”는 것과 관련이 깊다. 즉 迎鼓·東盟 등의 제천 내지는 祭鬼神에 의한 祈農祭의 성격이 강하였다.

 그러나 이상의 고려 연등회는 민속적 전승의례로서의 측면만이 아니라 불교의례적 측면도 있었다. 즉 태조가 일찍이 훈요에서 연등을 事佛行事로 규정지어 불교적 해석을 하고 있음을 통해 이미 연등회가 고려 초부터 불교의례화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보다 실제적·구체적으로 불교의례와 상호 교섭을 시작한 것은 특설 연등회가 행해지면서부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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