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Ⅰ. 불교
  • 3. 불교행사의 성행
  • 2) 항례적인 불교행사
  • (1) 연등회
  • 라. 연등회의 의식절차

라. 연등회의 의식절차

 본시 연등회라 하면 부처를 공양하는 방법의 하나로 등을 달고 불을 켜 놓음으로써 번뇌와 무지로 가득찬 어두운 세계를 밝게 비추어 주는 부처의 공덕을 기리어 칭송하는 것이다. 특히 한번에 2천 개의 등을 달고 5일간에 걸쳐 불덕을 기리는 법회를 萬燈會라 하여 고려에서도 충숙왕이 즉위하던 1313년 10월에 延慶宮에서 개최한 일이 있었다. 매년 정월 15일이나 2월 15일에 열기로 되어 있었던 연등회도 부처의 공덕을 기리어 칭송하기 위하여 많은 등을 밝히는 의식이었으나, 이에 그치지 않고 보다 더 많은 종합적인 文化祭의 성격을 띠고 있었음은 팔관회의 경우와 거의 같았다.

 연등회의 의식은 小會日과 大會日로 나뉘어 실시되었는데 소회일 다음날 밤에는 대궐에서 대회가 열렸다. 대궐 안에 많은 등을 벌여 놓고 밝히어 찬란히 하고 술과 다과를 베풀어 음악과 춤과 연극이 진행되는 가운데 왕과 신하들이 하나가 되어 즐겼다. 한편 부처와 천지신명을 아울러 즐겁게 하고 국가의 태평과 왕실의 안태를 기원하였으니 그 의식의 성행이 팔관회 때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문종 27년(1073)에 있었던 연등회에서는 敎坊 소속의 眞卿 등 13명이 새로 전래된 踏沙行歌舞를 대회 때 처음으로 공개하여 대회의 흥을 더욱 돋구었다. 이 때 교방의 楚英이 지휘하는 가운데 55명이 한 조가 되어 王母隊歌舞를 연출하니「君王萬歲」혹은「天下太平」이라는 글자모양을 만들며 춤을 추었다.334)≪高麗史≫권 71, 志 25, 樂 2, 用俗樂節度.

 靖宗 4년(1038) 2월 연등회 때 왕이 奉恩寺로 가서 예불하고 그 곳에 모셔 있는 태조의 사당에 참배하였다. 그 후로는 역대의 왕들이 모두 대회일 전날의 소회일 저녁에 봉은사로 가서 태조의 사당에 참배하는 것이 중요한 행사의 하나로 수반되었다. 봉은사는 일찍이 광종 2년(951)에 태조의 願堂으로서 세워진 사원이었다. 이리하여 부처에 대한 공양이라는 연등회의 본래적인 성격은 건국자 태조에 대한 예배라는 국가적이며 정치적인 의의를 아울러 지니게 되었다.

 몽고의 침입으로 정부가 강화도로 피난하자 곧 이어서 고종 21년(1234)에는 車倜의 집을 사원으로 만들어 봉은사로 이름하고 연등회를 종전과 다름없는 격식으로 의식을 갖추었는데, 이는 봉은사 연등회를 얼마나 중히 여겼던가를 알게 한다. 안팎으로 국사가 다난하였던 원종 14년(1273) 2월 연등회의 모든 행사가 중지되었어도 봉은사 行香만은 이행되었으며 이곳에만은 등을 달았다. 이에 앞서 원종 12년 2월에는 때마침 楮市橋 부근의 민가 3백 호가 불이 나서 그 수습에 경황이 없었으므로 연등회의 모든 행사가 중지되었었는데 이 때에도 봉은사 행향만은 있었을 정도였다.335)≪高麗史≫권 27, 世家 27, 원종 12년 2월 무신.

 고려시대에는 ‘春燃燈 冬八關’이라 하여 국초부터 성대하게 연등행사가 시행되어 왔으나 유교를 숭상하였던 성종대에는 연등회와 팔관회가 중지되기도 하였고, 두 행사에 동원되는 백성의 노역과 재물의 탕진이 심해 이에 대한 시정건의가 있기도 하였다.336)≪高麗史≫권 93, 列傳 6, 崔承老. 연등회는 이러한 이유로 일시 중지되기는 하였으나 고려 일대를 통하여 연중행사로서 지속적으로 시행되었다. 연등회의 개설은 비록 조정에 의하여 행해졌다 하더라도 그 행사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일반 민중이었다. 즉≪고려사≫에 전하는 연등회에 관한 기사는 왕실 귀족에 한정한 행사가 아니라 공사에 의하여 경향 각지에서 행하여진 일반화된 풍속이었다. 결국 4·8연등은 불탄일에 대한 축제이고, 정원 연등과 2월 연등은 풍년을 기원하는 온 백성의 민속적·국가적 축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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