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Ⅰ. 불교
  • 3. 불교행사의 성행
  • 2) 항례적인 불교행사
  • (2) 팔관회
  • 가. 팔관회의 시행

가. 팔관회의 시행

 고려시대의 팔관회는 건국 초부터 멸망할 때까지 성대한 국가적 행사로 이루어졌으나 팔관회 본래의 성격과는 차이가 있었다. 즉 태조는 10훈요에서 팔관은 천령과 5악·명산·대천·용신을 섬기는 것341)≪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26년 4월.이라 규정지었다. 또한 태조 원년 11월의 기사에서는 “팔관회를 열어 복을 빌던 그 제도를 지키는 것을 왕이 허락하였다”342)≪高麗史≫권 69, 志 23, 禮 11, 태조 원년 11월.라 하고 있어 팔관회가 기복적 성격을 갖는 종교의례임을 알 수 있다. 이같은 팔관회의 기복적 성격은 중국에서도 있었는데 심지어는 병의 치유를 위해 개최하기도 하였다.343)顔眞卿,<八關齋會報德記>(≪金石華編≫98).

 팔관회가 국가적으로 성대하게 시행되자, 성종 6년(987)부터는 최승로의 건의에 따라 그 행사가 너무나 번거롭고 요란스러울 뿐만 아니라 국고가 낭비된다는 이유로 22년간 계속 중지된 일이 있었다. 그러나 현종 원년(1010) 11월에 崔沆의 의견을 좇아 다시 팔관회가 열리게 되었고,344)≪高麗史≫권 4, 世家 4, 현종 원년 11월. 고려가 망할 때까지 행사의 규모에 약간의 차이는 있었으나 연중행사로서 매년 11월 15일에 행해졌으니 이를「仲冬팔관회」라 하였다. 태조 왕건의 유훈대로 역대왕은 매년 팔관회를 개최하였을 것인데 예외로 정지된 때도 있었다. 충선왕 즉위년과 3년, 충숙왕 6년, 우왕 3년의 경우는 그 해에만 정회되었고, 성종 때에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장기간 정회되었다. 22년 동안이나 국가적 차원의 팔관회가 중지되었지만, 이 때의 연등행사의 경우 소규모나마 현종 이전 목종 때에 궁중에서 비공식적으로 연등행사가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팔관회 역시 비공식적으로 목종대에 궁중에서 행해졌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중지되었던 이유는 팔관회의 의식이 불경하고 또 번잡한 데 있었으며 충선왕 때는 순전히 국사의 태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성종 때의 팔관회 정회는, 이 행사가 최승로의 말처럼 의식이 복잡하고 비경제적이라는 까닭도 있었지만 사실은 성종 자신이 불교보다는 유교에 치중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재 기록에 나타나는 팔관회는 116회이나 실제로는 이 외에 더 많이 실시되었을 것이다. 즉 기록상으로는 특수한 경우, 왕이 친행을 하든지 대리로 신하를 파견했을 때만을 기재하였기 때문에 실제상의 모든 팔관회가 기록되지는 않았으므로 정확한 개최 횟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팔관회가 개최되는 11월 15일을 전후하여 3일간은 공휴일로 되어 있었고 開京의 궁중에서만이 아니라 꼭 1개월 앞선 10월 15일에는 지방의 西京에서도 열렸다. 서경의 팔관회가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되었는 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성종 6년(987) 10월에 양경의 팔관회를 정지하도록 명했다는 기록345)≪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즉위년 11월.이 있음을 볼 때, 성종대 이전부터 거행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태조의 관심과 풍수지리설 그리고 북방 방비상의 중요성에 따라 서경은 대단히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었고, 국가의 운명이 그 지세로 입증된 곳이어서 어느 지방보다 먼저 비보사찰이 세워졌다. 서경의 연등회는 이미 태조 당시에 실시되고, 태조가 10훈요에서 팔관회를 천령과 5악·명산·대천 그리고 용신을 섬기는 것이라 규정한 것은 서경의 지리적 위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346)呂東■,<高麗時代 護國法會에 對한 硏究>(東國大 碩士學位論文, 1971), 18쪽. 서경의 팔관회에 왕이 직접 행차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왕을 대신하여 반드시 조정에서 내려간 관원이 그 행사를 집행하기로 되어 있었다.

 개경에서의 팔관회는 매년 11월 15일에 여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러나 문종 5년(1051)에는 그 날 月食이 있게 되는 날이라 앞당겨 11월 13일에 개최하였으며, 또 공민왕 7년(1358)에는 11월 15일이 동지였기 때문에 역시 앞당겨 11월 13일에 열었다. 또 선종 즉위년(1083)에는 그 해 11월에 왕실의 초상이 있었으므로 12월로 연기하기도 하였다. 이같이 11월 15일을 변경하는 일은 어디까지나 변칙이었던 것이어서 명종 14년(1184) 禮官에서 ‘11월은 왕태후 임씨의 기일이 끼어 있는 날’이라 하여 11월을 피할 것을 왕께 아뢰었으나 文克謙의 의견대로 11월을 지켰다.

 정종 즉위년(1034) 11월에 있은 팔관회 때 왕이 法王寺로 가서 예불하였으며, 이어서 다음날에는 궁중에서 대회가 열렸다. 이 때 각 지방의 장관들이 글월을 올려 賀禮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송나라 상인, 북쪽 동여진과 남여진, 그리고 남쪽 탐라로부터 사절단이 와서 축하의 선물을 왕께 바쳤다.347)≪高麗史≫권 6, 世家 6, 정종 즉위년 11월. 이처럼 외국 상인들에게는 중동팔관회가 서로의 물자를 교환하는 무역의 장이 되기도 하였다.

 팔관회 때에는 선종 3년(1086) 이후 신하들이 왕에게 축하의 글을 봉정하는 것이 상례화되었는데, 權近의<八關賀箋>,348)權 近,≪陽村集≫권 24. 郭東珣의<八關會仙郎賀表>, 金富軾의<賀八關會表>, 李崇仁의<賀八關會表>를 찾을 수 있다.349)≪東文選≫권 31·32. 이 八關箋의 봉정은 원칙적인 예로서 이를 결례하면 탄핵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으나, 왕이 하표를 받지 않았던 일도 있었다. 賀八關表와는 성질이 다르지만 李奎報는<法王寺 八關設文>을 지었고, 金富佾은<八關致語口號>를 지었는데 그 문장의 우수함이 송나라까지 알려졌다고 한다.350)≪高麗史≫권 97, 列傳 10, 金富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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