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관회가 진행되는 의식은 연등회의 그것과 유사하다. 의식이 이루어지는 곳은 사방에 香燈을 달고 2개의 綵柵을 세워 장엄하게 장식하고 불교와 민속적 요소가 합치된 百戱歌舞가 행해진다. 먼저 백관들이 왕에게 예를 올리고 이 때 왕은 儀鳳樓에 앉아 朝賀를 받는다. 성종 원년(982)에 최승로가 연등회와 팔관회의 폐단을 시정할 것을 상소한 내용 중에 행사를 준비할 당시 백성을 동원하여 각종의 偶人을 만들었다고도 하였다. 이로 보아 팔관회와 연등회의 의식절차는 대동소이하였고 지나친 허례로 변하여 막대한 경비가 지출되자 의식을 간소화하게 되었다. 그러나 문종 때에 다시 활성화되면서 그 형식이 크게 증대되었다.
팔관회의 의식은 대회일과 소회일 2일간의 행사로 진행되었다. 왕은 팔관회 때에 의봉루에 나와 앉아 군신의 축하인사와 獻壽, 그리고 지방관의 賀表를 받는다. 소회일이 다가오면 준비 작업부터 큰 일이거나 작은 일이거나를 가리지 않고 모두를 기록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都校署에서는 康安殿 계단 앞에 浮階를 설치하고 尙舍局에서는 궁전 앞에 왕이 자리할 王幄을 마련한다. 또한 왕악의 동쪽에 便次를 설치하고, 二獸爐가 前楹의 바깥쪽에 설치된다. 왕이 앉는 자리의 좌우 楹前에 尙衣局에서 花案을 장만하며 殿中省이 맡은 바 일을 진행한다. 부계의 상하 좌우에는 燃籠을 달아 궁전의 곳곳을 화려하게 단장한다.
이윽고 소회일에는 朝禮官의 지휘에 따라 왕이 제일 먼저 편찬에 입장한다. 다음에는 承制官과 近侍官의 再拜가 있고 이들은 계단 위 서쪽에서 東向하여 선다. 이어서 閣門員·上將軍 이하 숙위들이 대궐의 마당에 들어와 재배한다. 이러한 의식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백희잡기가 진행되고 교방의 음악 연주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소회일의 행사 다음날에 이루어지는 대회일의 행사도 소회일과 마찬가지의 절차로 진행되지만 보다 성대하게 이루어진다. 소회일에는 왕이 梔黃衣를 입고 대회일에는 緖黃袍를 입는다. 대회일에는 便殿禮가 끝난 다음 茶房에서 과일을 준비하여 왕의 자리 앞에 차려 놓는다. 그리고 승제원·근시관·각문원들은 공복을 입고, 千牛上·大將軍 및 備身將軍 등은 예복을 입고 樞密 이하 諸官이 왕의 행차를 기다린다.
왕이 등장하면 재배를 하고 나서 聖躬萬福을 아뢴다. 이어 太子·公·候·伯이 재배하고 왕의 천수를 기원하는 하례를 올린다. 이와 같이 여러 신하들의 의식이 끝나면 모두가 음주와 식사를 함께 한다. 왕에게 꽃을 올리고 주악이 울리는 가운데 왕은 반드시 樞密 이상의 신하에게 酒花封藥을 하사하여 충성에 대한 감사를 표한다.351)≪高麗史≫권 69, 志 23, 禮 11.
팔관회 때에는 대회가 열리는 밤에 궁중의 넓은 광장 중앙에 커다란 등을 하나 밝히고 그 사방에 다시 많은 등을 달아 찬란히 하고, 술과 다과를 베풀어 음악과 춤이 진행되는 가운데 왕과 신하들이 함께 즐기고 부처와 천지신명을 즐겁게 하여 나라와 왕실의 편안함과 태평을 빌었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