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Ⅰ. 불교
  • 3. 불교행사의 성행
  • 2) 항례적인 불교행사
  • (2) 팔관회
  • 다. 팔관회의 성격과 의미

다. 팔관회의 성격과 의미

 고려시대의 팔관회는 궁궐과 사찰에서 시행되었는테 그 사찰은 예외없이 法王寺였다. 고려 전시대에 걸쳐 팔관회가 법왕사에서만 행해졌다는 것은 팔관회와 법왕사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음을 알게 한다. 법왕사는 태조 왕건이 즉위한 다음해에 국가의 비호를 불법의 힘에 의지하기 위하여 도내에 세운 10刹 중에서 으뜸가는 사찰이었다. 이러한 호국정신의 구현인 법왕사에서만 팔관회가 열렸다는 것은 신라시대의 팔관회가 대표적인 호국사찰이었던 황룡사에서 개최되었다는 의미와 상통한다. 성종 때 지나친 허례와 막대한 경비의 진출로 말미암아 일시적으로 중지되었던 팔관회에 대해서 徐熙는 연등과 팔관 등의 행사는 국가를 보호하고 태평하게 다스리는 길352)≪高麗史≫권 94, 列傳 7, 徐熙.이라 하여 다시 열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당시에 팔관회가 호국적 신앙의례로서 작용하였음을 보여준다.

 태조의 10훈요에 의하면 팔관회는 천령·오악·명산·대천·용신에 대한 제사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제사는 팔관회 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고려 일대를 통하여 빈번히 거행되었다. 즉 나라에 가뭄이 들면 민간에서 용의 그림을 걸어 놓고 비내리기를 기원하는 풍속이 있어 이를 왕이 들고 국가적으로 巫人을 취합하여 기우제를 행하거나 산천에 대한 제사를 올리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따라서 이와 같이 빈번하게 열렸던 산천·용신·천령 등의 제사를 종합적으로 合祀하여 매년 11월에 1회씩 국가의 典禮로서 행한 것이 10훈요에 팔관회로 규정한 것이다.

 팔관회는 본시 속인이 하루 동안이나마 엄숙히 八關齋戒를 지키기 위하여 여는 불교의 법회이다. 그러나 고려에서 열린 팔관회는 격식 그대로의 팔관회 의식에 그치지 않고 보다 널리 천신·산신·수신·지신 등 여러 토속신에 대한 제사도 아울러 겸하고 있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국가를 위하여 전사한 장병들의 명복을 비는 의미에서 지신과 수신을 즐겁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을의 풍성한 추수에 대해 천신에게 감사하기도 하였으니, 팔관회는 종합적인 종교행사였으며 문화제였던 것이다.

 종교행사에는 으레 가무가 수반되는 것이 통례이지만 고려 팔관회는 그 가무적 성격을 더욱 발전시켜 국가적 행사를 성대히 하였다. 팔관대회 때 베풀어진 歌樂은 군왕만세와 천하태평을 위한 기원에서 행해졌다. 문종 27년(1073)의 팔관회 때에 神鳳樓에서 校坊弟子 楚英이 抛毬樂·九張權別伎를 연주하였고, 동왕 31년(1077) 2월에는 王母隊歌舞를 연주하여 55인이 군왕만세와 천하태평의 글자를 춤추며 만들기도 하였다.353)≪高麗史≫권 71, 志 25, 樂 2, 用俗樂節度. 특히 의종 22년(1168)에는 신라 이래의 고풍이 날로 사라져가는 것을 염려하였던 왕의 遺示에 따라 국가 전속의 성가대 내지 성극단으로서 4명을 1조로 하는 四仙樂部를 편성하여 이후 매년 팔관회의 대회 때마다 신라의 고풍대로 격식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게 하였다. 이 일은 전통적인 신라 화랑의 노래와 춤이 종교의식의 일부로서 팔관회를 중심으로 전승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 山臺戱라는 가무가 연출되기도 하였는데 팔관회는 이처럼 다양한 민속놀이적 성격을 지니고 온 국민의 기쁨에 어우러진 축제의 마당이었다.

 고려의 시대적 성격, 즉 불교의 민중화, 풍수지리도참사상의 유행과 정부의 사상적 뒷받침이 고려인에게 팔관회를 발전시키게 한 요인이었다. 한편 위정자의 관심사였던 지리도참사상은 이 팔관회를 더욱 성대히 지속하게 하였다.

 원래 풍수지리도참사상 내지 오행사상은 중국에서 기원하여 고려 이전에 이미 동방에 유행하기 시작하였으며 고려에 와서는 그 기세가 극에 달하여 여러 방면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동방은 木位요, 목위의 색은 靑이며 이것을 수로 말하면 8이 된다는 사상은 자연 八數를 중요시 하게 되어 팔관회의 8이라는 수에 관심을 크게 가지게 하였다. 이러한「八關思想」은 인종 때의 妙淸이 八聖堂을 설치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팔성당은 8聖의 신령을 한 곳에 모아 제사함으로써 국가의 복리를 구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고, 8성이란 것은 국내 명산을 택하여 그 8산에 각기 거주하는 신선과 부처 8위를 말하는 것이다.354)李丙燾,≪高麗時代의 硏究≫(乙酉文化社, 1948), 190쪽. 각지의 명산 8개소의 8성에 제사지내고 산악에 대한 경배심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고려 팔관회가 지니는 풍수지리도참사상 내지 5행사상에 바탕한 것이다.

 예종 원년(1105)에는 왕이 법왕사의 神衆院에 나아가 팔관회를 베풀고 궁궐에 돌아와 百神에게 절하였다고 한다.355)≪高麗史≫권 12, 世家 12, 예종 원년. 신중원이란 여러 신중을 안치한 불전인데, 신중은 불교의 外護神으로 다신교적 성격을 지닌다.356)神衆이란 神의 무리란 뜻으로 在來神을 모두 불교의 수호신으로 수용한 것이며, 신중이라 할 때는 ‘神들’이라는 복수적 의미를 나타낸다. 그런데 이와 같이 신중원에서 팔관회를 개최하고 돌아와서는 백신에게 절하였다는 것은, 팔관회 행사의 의미를 “天靈과 五嶽·名山·大川·龍神을 섬긴다”라고 한 바와 같이 재래의 다신교적, 혹은 무교적 의례를 신중신앙적인 불교의례로 지향시켰음을 의미한다.

 팔관회가 지니는 다신교적, 무교적 요소는 그 의식절차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즉 의식의 진행중에 仙郎·國仙인 四仙樂部가 백희가무를 연출하였다고 한다.357)≪高麗史≫권 69, 志 23, 禮 11. 선랑·국선은 신라 이래로 명산·대찰을 순례하면서 가무로서 도의를 연마하던 수행단체였으므로 팔관회를 규정하는 “천령과 오악, 명산, 대천, 용신을 섬긴다”는 의미와 상통한다. 여기서 팔관회의 불교적 수행방법과 선가의 수행방법이 습합되는 과정을 살필 수 있다.

 고려시대의 팔관회는 불교의례만으로 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팔관회의 仙家的 성격이 갖는 수행회라는 의미가 불교의 팔관재계가 갖는 수행적인 요소를 받아들임으로 인하여 불교화하고 있었다. 또한 팔관회에서 선가가 갖는 다신교적 신앙이 불교의 신중신앙과도 습합되고 나아가서는 밀교적 성격까지 지니게 되었다. 이를 연등회와 비교하여 말한다면 연등회는 의례적인 면에서 불교와 연결되었고, 팔관회는 수행방법의 면에서 불교와 습합되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불교와 다신교, 그리고 무교의 종합적 종교의식이며 가무행사였던 팔관회는 조선시대에 들어서자 유교정책으로 그 존재기반을 잃게 되었고, 결국 조선 태조 8년 都堂의 청에 의하여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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