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에 전하는 신라 최초의 인왕경도량은 진평왕 35년(613) 7월에 皇龍寺에서 개설한 백고좌이다. 이 법회는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진 인왕경신앙의 최초의 집회이기도 한데 隋의 사신 王世儀가 참석한 가운데 圓光法師를 초빙하여 인왕경을 강설하였다고 한다.358)≪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진평왕 35년. 이 때부터 신라 말까지 총 8회에 걸친 개설 기록이 보이는데, 단편적인 내용이라 그 의식의 형태나 성격을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대체로 다음과 같은 점에 주의하게 된다.
신라시대의 인왕경도량 8회 중에서 1회는 장소가 미상이지만 나머지 7회는 모두 호국사찰로 유명한 황룡사였다. 따라서 設會의 직접적 이유는 어떠했든 호국적 의미가 있었다.359)呂東■, 앞의 글. 설회의 명칭을「百座」「百高座」라 하고 100인의 승려를 초빙하였다는 점에서 보아 인왕경의 의궤를 충실히 따랐고, 행사 때마다 반드시 경을 설하였을 것이다. 신라의 인왕도량은 국가의 재난시에 주로 7난을 물리치기 위해 개설되었고 왕이 참석하여 佛力에 의해 국가를 보호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졌다.
고려에서는 인왕백고좌도량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일찍부터 있어 왔다. 고려인의 눈에 비친≪인왕반야경≫의 교훈과 이 경에 대한 고마움은 각별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고려 현종 3년(1012) 5월에 처음 개설되어 공민왕 22년(1373) 4월의 마지막 행사에 이르기까지 역대 왕들이 각각 인왕경도량을 설행하였다.360)기록에 따르면 현종 4회, 정종 1회, 문종 6회, 선종 4회, 숙종 8회, 예종 14회, 인종 13회, 의종 7회, 명종 13회, 신종 1회, 희종 2회, 고종 19회, 원종 8회, 충렬왕 4회, 충선왕 1회, 충목왕 1회, 공민왕 9회로 나타나 있지만 이것이 실제 횟수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현종 11년(1023) 5월에는 궁중에 1백 개의 獅子座를 갖추고 1백 명의 법사를 청해서≪인왕반야경≫을 외는 인왕백고좌도량을 열었다.361)≪高麗史≫권 4, 世家 4, 현종 11년 5월. 그 후 현종 18년(1027) 10월에도 인왕반야경을 외어 읽는 의식을 가졌는데, 거란의 침입이라는 고역을 치른 당시에 이같은 인왕백고좌도량에 관한 관심은 무척 깊은 것이었다. 인왕백고좌도량은 점차 격년제로 10월에 3일간에 걸쳐 열리게 되는 정기적인 행사가 되었고,362)인왕도량은 일반적으로는 3일간 진행되었으나, 명종 8년(1178) 12월의 경우 5일간 이루어졌고 9년(1179) 7월에는 10여 일씩이나 계속되었다. 이 때 도합 3만 명에 이르는 승려들을 공양하는 飯僧佛事를 아울러 하기로 하여 대궐에서 1만 명을, 전국의 각 지방 사찰에서 2만 명을 대접하였다. 선종 2, 4, 6년, 예종 6, 8, 10, 12, 14, 16년, 인종 9, 11, 13, 15, 17, 19, 21, 23년의 각 10월에 있었던 것은 그 예라 하겠다. 그러나 때로는 문종 2년(1048)과 4년의 경우처럼 한 달 앞당겨 9월에 열기도 하였으며, 또는 한 달을 늦추어 열기도 하였다.363)≪高麗史≫권 17, 世家 17, 인종 21년 11월.
의종 때에도 초기에는 격년제로 열리어 동왕 원년(1147)과 3년 및 5년에는 각 10월에 있었으나, 11년 10월에 열린 후로는 종전과 달리 1년을 늦추어 3년마다 열리게 되어 14년과 17년 및 20년의 각 10월에 인왕백고좌도량이 열렸다. 이에 따라 다음 명종 때에도 원년 10월에 이어서 4년 10월에 열렸는데 어떤 까닭인지 알 수 없으나 다음 3년 후인 7년 10월에는 열리지 않고 그 이듬해 8년 10월에 열렸다.
인왕도량은 보통 3년마다 정기적으로 열렸으나, 이외에 별도로 행해지기도 하였다. 명종 9년(1179) 11월의 기록에 “과거의 제도에는 3년에 한 번씩 高座會를 설하였는데 작년 10월에 비록 개설하였으나 지금 따로이 시행하여 재난을 물리친다”364)≪高麗史≫권 20, 世家 20, 명종 9년 11월.고 하였다. 이처럼 정기적인 행사 외에 비정기적으로 이루어진 것까지 포함한다면 실제 횟수는 기록에 전하는 것보다 많아진다.
몽고의 침입으로 강화에 도읍하고 있었던 고종과 원종 때에도 3년제의 인왕백고좌도량은 계속 준수되어 국난을 극복하려는 고려인의 信心은 더욱 깊어졌다. 시대와 장소에 따라≪仁王般若經≫에서 설하는 가르침의 내용을 이해하고 받드는 데 있어서 깊고 낮은 차이는 물론 있었겠으나 몽고의 침입을 당하여 국토가 유린되었던 고려인에게는≪인왕반야경≫에 대한 관심이 각별하였으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경황없이 황망하게 천도하였던 것인 만큼, 전에 사용하여 왔던 1백 개의 사자좌를 비롯하여 의식 때 사용하여야 할 그 밖의 여러 儀具를 함께 가지고 오지 못하였으므로 자연히 행사가 제대로의 격식을 갖추지 못하였음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인왕도량은 佛說에 따라 각종의 재난시에 수시로 설하였고 고종 때에는 지나칠 정도로 빈번하게 개최되어 39년(1252)에는 3, 4, 7, 8, 10월의 다섯 차례, 이듬해 3, 4, 7, 8, 11월에 역시 다섯 차례를 행하여 2년간에 10회나 열었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