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기록에 전하는 고려의 인왕백고좌회에 관한 의식은 이 법회가 인왕경에 기반을 둔 것이므로 경전에서 설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의식 절차를 따랐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대들 제왕은 마땅히 이 般若波羅蜜多를 受持 讀誦하라. 도량을 잘 꾸미고, 백 개의 불상과 백 개의 보살상과 백 개의 사자좌를 놓고서 백 명의 법사를 초청하여 이 경을 해설하라. 그 자리 앞에는 갖가지 등을 밝히고, 갖가지 향을 태우며, 갖가지 꽃을 뿌려라. 널리 의복과 臥具, 음식과 탕약, 房舍와 床座 등 일체의 공양에 필요한 것을 가지고 공양하고 매일 두 번씩 이 경을 독송하라. 만약 왕과 대신과 비구, 비구니, 優婆塞, 優婆夷가 그것을 듣고 간직하여 독송하며 법대로 수행하면 재난이 곧 사라지리라. 대왕들의 諸國土 안에는 수없이 많은 귀신이 있고, 그 귀신들에게는 또 많은 권속이 있다. 만약 그들이 이 경을 듣는다면 이 국토를 지켜 주게 되리라.
원종 5년(1264) 7월에 왕이 인왕도량을 설하고자 하여 인왕경의 신구 역본 각 102부를 인쇄하게 하고 사자좌 1백 개를 만들어 장식하고 각종의 공구와 儀物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처럼 경전의 규정대로 법회도량을 갖추었다는 것인데 반드시 100명의 법사를 불러 강경하되 백고좌를 규격대로 하고 의복과 불구를 마련했다. 이후 인왕백고좌도량은 그 의식의 절차와 규모를 제대로 갖추기에 이르렀다.
고려시대의 인왕도량에 관해서는 일반적으로 단순한 기록이 많고 일자와 장소만이 명시된 것이 많다. 장소는 보통 內殿·會慶殿·文德殿·宣慶殿 등의 왕궁이었다. 이처럼 왕궁에서 시행된 이유는 이≪인왕경≫이 승려들에게 맡겨진 것이 아니라 왕 자신에게 부촉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 차례의 예외가 있어 法雲寺 또는 法王寺에 설치된 일이 있었는데 이런 경우는 왕이 직접 행차하였다.
인왕도량은 호국을 위한 행사로 설치되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3년제에 따르는 설회이든지 왕의 즉위시에 설치하는 도량들은 이러한 성격을 잘 나타내 주고 제왕들은 왕위를 계승하면서 佛과 諸神에게 먼저 아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정종이 12년(1046) 5월에 죽자 같은 해 9월에 문종은 백좌인왕경도량을 3일간 베풀었고, 예종이 17년(1122) 4월에 죽자 뒤이어 즉위한 인종은 전년에 정기적 인왕도량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0월에 백좌도량을 회경전에서 베풀었다. 고려시대에 인왕도량을 처음으로 개설한 현종이나 재난이 많았던 시대의 고종같은 왕들은 인왕도량을 개설하여 국가와 민족을 구제하려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왕도량은 祈禳의 뜻으로 설치되기도 하였다. 인왕경에서도 滅罪·祈福·祈禳의 효력을 말하고 있지만 고려의 인왕도량은 너무나 이에 치우치기도 하였다. 숙종 6년(1101) 4월에는 문덕전에서 비를 기원하는 인왕도량을 열기도 하였고,365)≪高麗史≫권 11, 世家 11, 숙종 6년 4월. 명종 9년 7월과 의종 4년(1150) 10월의 행사는 천재를 소멸하기 위해서 열었다. 고종 15년(1128) 6월에는 보다 직접적으로 적병을 물리치기 위해 인왕도량을 열었는데 이러한 기복적 경향은 고려 말에 이를수록 더욱 짙어 갔다. 실제로 공민왕대에 이루어진 9회의 인왕백좌회 중에서 4회는 몽고군을 진압하고 災異와 天變 그리고 각종의 변을 물리치기 위해서 행한 것이었다. 이는 신앙면으로 보아 순수한 불교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고, 밀교·토속신앙·도참설 등의 성격이 습합된 고려 말기의 사상계의 흐름이었다.
고려의 인왕백고좌도량은 한편으로는 순수한 불교 신앙이라기 보다는 무속적 신비성과 민속적 경향을 띠었던 것도 사실이다. 내우외환이 심해서 가능한 모든 방편을 써야할 만큼 절박한 사정이 있었고, 이를 극복하려는 고려 국왕들의 책임감과 신앙심이 일치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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