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Ⅱ. 유학
  • 3. 유학사상의 실천적 전개
  • 1) 오행설과 천인합일설
  • (1) 오행설과 정치
  • 가. 구징설과 천인합일설

가. 구징설과 천인합일설

 「水」의 咎徵에 대해 살펴보면, 물은 사물을 적시고 아래로 흐르므로 潤下라고 하여 물의 본성을 나타낸다. 이것이 그 본성을 잃게 되면 災沴가 되어 때로는 빗물이 넘쳐 百川이 거슬러 넘쳐서 향읍을 무너뜨리고 백성을 물에 빠져 죽게 한다. 때로는 鼓妖 즉 북소리의 妖祥이 나타나고 때로는 豕禍가 있고, 수해와 雷電·霜雪·雨雹의 재이가 나타나는데 아울러 恒寒 즉 계속되는 추위현상이 발생하며, 그 색은 흑이고 이른바 5행의 水氣로부터 일어나는 재이인 黑眚·黑祥이 물이 윤하하지 못할 때에 발생하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이에 속한 고려시대의 사례를 보면 먼저 광종 12년(961) 4월 초하루에 바람이 크게 불고 뇌우가 쳐서 물이 街衢에 넘쳐 인가가 표몰하고 물이 변하여 붉게 되었다는 기사로부터 시작하여 계속 大水의 피해를 기록하고 익사자의 발생, 舟楫의 표류, 禾穀의 손상 등의 수재기록이 연속되어 있다. 大雨 혹은 大水 외에 井鳴·水湧·海水나 池水의 變色·固渴·濁沸, 寒風·天寒·冰, 鍾鳴·天鼓鳴·天動·石鳴·天鳴·堂鳴, 虹·蛇·靑龍·黑龍, 魚死 및 馬·猪의 多産과 奇形出産, 結草爲人·雷雨·霜·大雪·雨雹, 玄鶴, 黑霧·黑氣·地鏡 등의 변이가 각각 다양하게 수록되어 있다.

 水不潤下에서 빚어지는 위의 잡다한 재이 가운데 천인합일사상이 실제 고려의 政事에 반영된 예를 들어 보기로 한다.≪고려사≫오행지 1의 수재기사로서 인종 2년(1124) 7월에 대우와 뇌전이 쳐서 市道의 수심이 한 길이며 迎恩館과 德山房人을 진동시켰다고 하였는데 이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기사가≪高麗史節要≫에 다음과 같이 보인다.

李資謙이 상복을 벗고 관직에 나와 中書省에 앉으니 宰樞와 文武常叅級 이상은 뜰 위에, 7품 이하는 뜰 아래에 늘어서서 陳賀하는 禮를 행하였다. 이 날 큰비가 쏟아지고 천둥과 번개가 심하여 거리와 한길이 물에 묻히고 벼락이 迎恩館을 쳤다. 8월에 이자겸이 셋째 딸을 왕에게 바쳤는데, 이자겸이 다른 姓이 妃로 들어 앉으면 권세와 은총을 잃을 것을 두려워하여 강청한 것이다. 왕이 마지 못하여 그대로 따랐는데 이 날 소나기가 오고 센 바람에 나무가 뽑혔다(≪高麗史節要≫권 9, 인종 2년 7·8월).

 이 기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종 2년 무렵은 이자겸이 인종을 옹립하고 그의 권모가 시작되던 때였다. 같은 달 7월에 이자겸은 朝鮮公으로 봉작되고 식읍 8,000호를 받았으며, 그의 생일을 仁壽節로 제정하였다. 이 해 7월과 8월에 내린 대우, 천둥과 번개 등의 천재지변을 사납고 교만한 이자겸의 행동과 결부시키고 있음이 분명하다.

 ≪후한서≫에서도 이와 비슷한 내용을 볼 수 있다.

和帝 永元 원년 8월 君國 아홉 곳에 大水와 傷稼가 있었다. …이 때에 和帝는 어려 竇太后가 섭정을 하였다. 그의 오빠 竇憲이 幹事가 되고 憲의 여러 동생이 모두 고귀하게 되었는데 아울러 그 위세가 포악하여 일찍이 원한을 사게 되었다.…(≪後漢書≫志 15, 五行 3).

 여기에서 어린 和帝에 대한 섭정을 이용한 竇后一家의 專政의 징조가 그 해 7월의 군국 아홉 지방에 걸친 큰비로 드러났다고 한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사서에서 더 많이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고려사절요≫에 보이는 이자겸의 행위와 이 두태후의 경우는 너무나 비슷하다. 그 뿐만 아니라 이는 치자로서「聽之不聰」의 부덕에도 해당될 수 있다. 이러한 행패에 대하여 하늘이 어찌 그 징험을 나타내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 천인합일설이며 또한 5행설의 사상인 것이다. 이 밖에≪고려사≫오행지의 큰물의 기사들이 당시로서는 이들과 유사한 원인에서거나 또 어떤 다른 원인에서 초래된 재이로서 파악된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의 수불윤하의 사례로서 霜·雹·隕霜의 재이를 들어보겠다.≪고려사≫오행지의 관계 기사를 보면 선종 6년(1089) 4월 隕霜이 내려 太史가 상주하였는데 하늘이 재변을 내린 것은 반드시 백성의 원성으로 인한 것이라 하고, 마땅히 하늘의 조화의 법에 따라 政敎의 득실을 살펴 형을 관대히 하고 죄를 사하여 주어 백성들로 하여금 원망이 있지 않도록 하라고 하니 이것을 嘉納하였는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선종이 구체적으로 어떤 대책을 취하였는지 기록이 없으나 그 해 9월 병진에 사형을 중단했다는 것이 4월 운상에 대한 처리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다음 숙종 원년(1096) 4월의 서리·우박의 재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여름 4월 임술 초하루에 서리가 내리고 계해에 또 서리와 우박이 내렸다. 계유에 宣德殷에 거동하여 해가 기울어지기까지 聽朝하였다. 中書省이 아뢰기를 ‘만물이 성장할 때를 당하였는데 3월 이래로 時令이 어기어져서 물이 응결하여 얼음이 되고 서리가 내려 생물을 죽이고 밤에 우박이 쏟아졌습니다.<洪範五行傳>에 의하면 우박은 陰이 陽을 위협하는 象이라고 하였고,<京房易傳>에 이르기를 誅罰함이 理에 벗어나면 그 災로 서리가 내린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위에 있는 이가 어느 한쪽 말만 듣게되면 下情이 막히는 것이니 능히 이해를 생각하지 못하고, 실수가 嚴急한 데 있으면 그 벌은 常寒(장기 추위)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이르기를 兵事를 일으켜 誅罰을 함부로 하면 이를 亡法이라 하는 것으로서 그 災로 서리가 내려 여름에 5곡을 죽인다고 하였습니다. 요즈음에 幼君이 병환으로 누워 聽斷함이 불명하고 모후가 섭정하여 沈惑함이 도를 잃어 흉악한 사람으로 하여금 틈을 타서 난을 꾀하게 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크게 誅戮을 행하여 黨類를 남기지 않고 일에 정상을 밝히지 않았으니 감옥에 갇힌 자 중에는 반드시 무죄한 자가 있어서 怨氣가 천지에 가득하므로 和氣가 변하여 재앙이 되었습니다. 엎드려 생각컨대 성상께서 천명에 응하여 대통을 이으셨으니 萬機를 싸잡아 바르게 하소서. 비옵건대 御史臺와 尙書刑部로 하여금 무릇 疑獄에 시비가 미정한 것은 독촉하여 공정히 판결케 하여 寃枉함이 없게 하고, 그 고발한 바가 사실이 아닌 것은 모두 反坐케 하여 이로써 天戒에 답하신다면 곧 인정이 서로 기뻐하여 灾가 변하여 복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이를 聽納하였다(≪高麗史≫권 11, 世家 11, 숙종 원년 4월).

 이 때의 재이와 관련하여 당시의 政情을 살펴보면 나이 어린 헌종의 즉위 후 왕위를 둘러싸고 李資義의 무력을 배경으로 한 漢山候 盷과 왕의 숙부 鷄林公 熙(뒤의 肅宗)와의 대결에서 기선을 잡은 계림공이 승리하여 헌종 원년 8월에 中書令이 되었고 10월에 이르러 헌종의 선양을 받아 즉위하였다. 그리하여 숙종 원년 3월과 4월에 걸쳐 발생한 서리·우박 등의 재이는 이 정변과 관련되어 풀이되었던 것이다. 결국 이 때의 서리·우박은, 음이 양을 협박하는 象이라고 하는데, 전년에 있었던 이자의와 그 일파의 세력을 숙청하고 왕위를 획득한 숙종의 치세에 내린 것이었다. 이는 전년에 있었던 정변에 연계되어 투옥된 자 중에 억울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라 하고 이를 공정하게 처결함으로써 天戒에 답하라는 중서성의 상주에 대하여, 숙종은 이를 받아들이고 있다. 이 때의 조치가 구체적으로 어떠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다음 5월에「放輕繫」라 한 것으로 보아 恤刑이 내려진 것으로 보인다.

 이상으로 水不潤下에 속하는 재이에 관한 대수, 상박 등의 실례를 통하여 고려시대 천인합일사상의 실제를 엿보게 되었다. 더욱이<홍범오행전>이나<경방역전>등이 구체적으로 인용된 사례도 있었다.

 다음에는 오행지의 순서에 따라「火」에 관한 재이를 보기로 한다.≪고려사≫오행지 1, 오행 2에서는 불의 炎上을 불의 속성이라 하고, 그 속성을 상실하게 되면 재화가 되고 양의 失節로 화염이 함부로 발생하며 종묘와 궁관에 화재가 발생하고 때로는 草妖나 羊禍가, 혹은 羽虫의 孼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는 불의 不炎上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火不炎上」이면 그 咎徵은 恒燠 즉 긴 더위가 있고, 그 色은 赤眚·赤祥으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고려사≫오행지의 火炎上 조항의 머리글 내용은 앞서 인용한<홍범오행전>의 내용과 거의 같다. 구체적인 화재의 기사로서 定宗 2년(947) 10월 서경 重興寺 9층탑의 화재, 그리고 목종 12년(999) 정월 大府油庫 화재의 千秋殿 延燒, 그 밖에 많은 화재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 천추전의 화재는 당시 목종의 모후 千秋太后가 섭정하면서 金致陽과 내통하여 왕정을 어지럽히던 政情의 반영이며 특히 천추태후의 궁까지 화재가 연소된 것은 태후에 대한 天戒로 볼 수 있다.

 恒燠에 대해서는 예종 16년(1121)의 無冰 기사, 겨울의 이상난동이 기록되어 있으며, 草妖에 관해서는 경종 6년(981)에 杜鵑花가 피었다는 것으로 시작되어 11월의 牧丹花開, 8월의 牧丹花再開, 8월의 梨再華, 9월의 薔薇華, 10월의 桃李華, 10월의 葵花 등 계절에 맞지 않는 꽃의 개화가 기록되어 있어 고려시대 草妖의 실례를 보여준다. 羽虫의 孼에 관해서는 鵂鶹白日滿空飛鳴, 野鶴數千盤飛 등의 기사가 있다. 그 밖에 명종 14년(1184) 6월에 西部 香川坊 민가에서 小雀이 山鵲 크기만한 새끼를 깠는데, 이 占에서 말하기를 ‘羽虫之孼에 속하는데, 같지 않은 기형을 낳은 것은 국가요란의 징조’라고 설명하였다. 명종 14년 6월은 왕이 李義旼을 소환하여 기용한 지 4개월 뒤이며 그 동안 이의민은 慶大升이 두려워 피신하다가 그의 병사 후에 부름을 받았던 것이다. 그가 기용되었을 때에 왕은 그의 포악함을 두려워하여 겉으로 기쁜 듯이 위로하자 중외에서 모두 왕의 유약함을 애석히 여겼다고 한다.

 그리고 羊禍에 대한 것으로서 현종 9년(1018) 2월 京牧監에서 양이 새끼를 낳았는데 一首兩身 즉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인 기형을 출산한 기사가 있다. 그리고 赤眚·赤祥에 관해서 赤氣如火, 池水變爲血色, 水其色如血, 赤沸紅雲, 紫氣, 血祲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 인종 8년(1130) 8월 을미의 초경에 赤氣가 火影같았는데 坎方으로부터 발하여 北斗魁中으로 덮어 들어가더니 起滅이 무상하였으며 3경에 이르러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日者가 아뢴 것을 보면, “<天地瑞祥誌>에 말하되 赤氣가 火影같이 나타나는 것은 신하가 그 君을 반하는 것이므로 바라옵건대 修德하여 변괴를 없게 하십시요”라는 것이었다.

 이들 적기의 발생으로 예시되는 징조는 兵喪之災, 복병 등 병란에 관계되는 것과 臣叛其君, 下有叛民 등의 모반·반란의 징조, 그 밖에 賊人將貴나 왕의 薨去 등의 조짐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구징에 대한 消災의 방법으로서는 天祥祭·修德消變·大佛頂讀經·金剛明經法席 등이 베풀어졌다.

 5행의 세번째는「木」으로서, 木曲直에 대한 기사이다. 나무는 곡직 즉 구부러지고 펴지는 것이 그 본성인데, 그 본성을 잃으면 재이가 된다. 그러므로 생물이 暢茂하지 못하고 변괴가 되어 때로는 鷄禍가 있게 되고 때로는 鼠妖가 있게 된다. 이것은 목이 곡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구징으로서는 恒雨가 발생하며, 그 색은 靑으로서 靑眚·靑祥이 된다고≪고려사≫오행지는 설명하고 있다.

 이에 관한 재이로서는 僵槐自起, 僵梨自起, 枯木復生 등이다. 태조 22년(939) 8월에 大內柳院의 僵槐 즉 쓰러진 홰나무가 스스로 일어섰다던가, 현종 7년(1016) 4월 司憲臺 마당에 있던 잣나무가 죽은 지 몇년 뒤에 다시 살아났다는 기사가 있다.≪당서≫오행지에 보면「枯木復生」은 권신의 집권,「木仆自起」는 國之災라고 하는 등의 풀이가 가해져 있다.≪후한서≫나≪수서≫등에는 龜孼이 나타난다고 하였으나≪고려사≫에서는 송충의 발생이 대서특필되고 있다. 송충에 관한 기사는 숙종 5년(1100)으로부터 공양왕 때에 이르기까지 대단히 빈번하고 그것을 퇴치하는 데 매우 고심하고 있음을 본다. 숙종 5년 平州 관내 白州 兎山의 食松에 이어 이듬해에는 首押山에 송충이 침식하고 있다. 이 해 太史의 상주에 따라 송충의 식송은 병화가 일어날 조짐이라 하여, 灌頂·文豆婁·寶星 등의 도량을 설치하고 또 老君符法을 설치하여 이를 祈禳하고 있다. 마침 이 해에는 가뭄이 심하여 여러 차례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는데 그 이듬해 4월에는 군신이 上言하기에 이르렀다.

송충의 번식은 여러 가지 祈禳도 효과가 없으니, 생각하건대<京房易飛候>에는 ‘신하의 보필이 왕의 聖化에 도움이 되지 않아 天이 虫害를 나타낸다’고 하였습니다. 신들은 (이에 대해) 형언할 길이 없고 임금님께 근심을 끼쳤으므로, 원하건대 不肖者들을 물리치고 賢者를 기용함으로써 天譴에 대처하십시요(≪高麗史≫권 11, 世家 11, 숙종 6년 4월 을사).

 그 뒤에도 송충 등의 충해가 거듭되어 인종 11년(1133) 5월에 이에 대한 왕의 장문 조서가 있었다. 즉 蝗虫이나 송충의 재이는 군주의 부덕은 물론 부덕한 신하의 不黜에 있음을 거듭 강조하고, 敎化遷善과 長惡不悛者에 대한 공평하고 철저한 제재, 그리고 淸白奉公 節義殊異者에 대한 포상과 천거 등 당면한 정치현실에 대한 반성과 선후책을 마련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인종 11년은 이자겸의 난 이후 다시 妙淸 일파의 서경 정치세력이 개경의 중앙정계와 심각한 권력투쟁을 진행하고 있을 즈음이다. 따라서 이 조서에 보이는「不黜無德」이란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지 또 ‘庸人鄙夫 濫進列位’란 또한 누구인지, 실로 당시 정정을 둘러싼 복잡한 내용이 저변에 깔려 있다고 할 것이다. 또한 그 뒤 명종 2년 7월에 궁궐에 화재를 입고 송충이 소나무를 침식하고 천문현상에 있어서도 변고가 있자, 명종은 조서를 내려 몸소 자책하고 내외의 斬絞 이하의 죄인을 특사하기도 하였다.

 다음 鷄禍의 예를 보면 태조 15년 4월에 서경민 張堅의 집에서 암탉이 수탉으로 된 사례가 발생하였다. 태조는 다음달 5월에 계화와 더불어 대풍까지 겹치자 일련의 유시를 내리고 있다. 그 내용은 서경을 앞으로 수도로 삼기 위해서 도시를 보수하고 인구를 채우고 있는 터에 불길한 재이가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암탉이 수탉으로 변한 것이나 대풍에 의한 재이의 발생은, 간사한 신하가 異謀를 품는 등 분수를 넘는 욕심을 품을 때에 천견으로서 드리워지는 것으로서 그 잘못을 고치지 않으면 멸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밖에「木不曲直」에 속한 변이로서 木稼·木冰·霖雨·淫雨·木生異實·鼠妖·靑眚·靑祥 등의 기록이 있다. 이들 재이기록의 실제와 그 해석 및 조치에 나타나는 고려시대인의 관념을 살펴보면 중국의<홍범오행전>등에서 볼 수 있는 천인합일사상이 깊이 내재화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가 있다.

 5행의 네번째는「金」이다. 從革 즉 형태를 융통성있게 바꿀 수 있는 것이 금의 속성이다. 이것이 그 본성을 상실하면 재이가 되어 冶鑄가 이루어지지 않고 변괴가 되기도 하며 訛言, 毛虫之孼, 犬禍가 생기고 그 징조는 恒暘 등으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금이 不從革이 되는 원인으로는 앞서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은데, 제왕이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천하를 편안케 하는 것으로 그쳐야 금이 그 본성을 유지하게 된다. 만일에 침략과 전공을 즐겨서 백성들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면 사람들이 모두 불안을 느끼게 되고 따라서 금이 不從革되는 것이라 하였다. 이에 관련된 재이로서는 木沴金, 常暘(旱), 蝗, 訛言과 童謠, 詩妖, 毛虫之孼, 犬禍, 白眚·白祥 등이다. 이에 속하는 재이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常暘 즉 가뭄이다. 가뭄이란 인간생활을 위협하는 가장 큰 재이이다. 특히 농경국가에서 가뭄은 생존을 좌우하는 실로 무서운 재난인 것이다. 한재에 대해서는≪고려사≫오행지는 물론≪고려사≫전편을 통하여 가장 많고 또 소상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것은 그만큼 중요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고려사≫오행지를 통하여 가뭄의 발생과 그것을 消災하려는 고려인들의 노력이 참으로 집요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가뭄의 원인은「言之不從」에 있다고<홍범오행전>은 전하고 있다. 人君의 무도, 형법의 不一, 科歛의 과중, 군사의 동원, 노역의 동원 등으로 임금이 衆望을 잃으면 정령을 따르지 않고 이로써 초래될 군주의 중형을 두려워하게 된다. 그리하여 양기가 성하게 되면 한재가 발생하여 그 벌이 곧 상양 즉 항양이란 것이다. 그러므로 가뭄의 계속은 결국 군주의 부덕한 정사에 기인된다는 것이다. 고려시대에 있어 가뭄을 소재한 실례를 보면 성종 10년(991) 7월에 내린 왕의 교서에서 정치교화의 부족, 형벌과 포상의 불공평이 이러한 재이를 가져오게 하였다 하고, 죄수를 석방하고, 왕 스스로는 호화스런 正殿을 피하여 정사를 집행하고 常膳을 감하며, 힘써 사원과 산천에 祈求와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비는 내리지 않고 가뭄이 계속되어 스스로 부덕한 소치로 가뭄이 계속되었다. 이 때에 京城 서민 80세 이상 노인에게 양로의 예를 행하여 농사에 대한 왕의 근심을 표시하려 하기도 하였다. 이같은 성종의 가뭄에 대한 조서는 군주에 의한 자성과 자책으로서 유교정치사상의 전형을 이룬 것이었다. 이처럼 고려시대에는 성종 이후 가뭄을 만나면 왕은 죄인을 사면하고 常膳을 줄이거나 심지어 輟膳까지 하고 正殿을 피하여 자책하고 자성함으로서 천견에 보답하려는 의식을 실천에 옮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가뭄퇴치를 위한 의식과 대책이 실시되었는데 토목·건축 등 공사의 혁파와 役夫의 방면, 구빈 등 치자의 선정, 종묘 등에서 지내는 조상의 제사를 통한 기우, 그 밖에 도교 방식에 따른 祭齋, 자연숭배 또는 토속신앙적인 기우제가 거행되었다. 그리고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은 불교적인 각종 도량의 설치와 講經이었다. 결국 가뭄에 대처하는 여러 가지 행위는 고려시대인들의 모든 정신생활의 총화였다.

 5행의 다섯째는「土」로서「稼穡不成」에 관한 것이다.≪고려사≫오행지에 토는 중앙에 자리잡아 만물을 생장시키고 稼穡에 있어서 막중한 위치에 있으므로 토기가 길러주지 않으면 가색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금·목·수·화가 토에 災沴를 끼치면 지진이 일어나기도 하고 흙비가 내리기도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때로는 夜妖가 발생하기도 하고 蠃虫之孼이 있기도 하며 牛禍가 일어난다. 그 구징은 恒風이요 그 색은 황색이다. 이것이 黃眚·黃祥이 된다.

 稼穡의 不成 즉 농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식량생산이 여의치 않아 기근이 발생하기도 한다.≪고려사≫오행지에 실린 기근에 관한 기사는 靖宗 6년(1040)을 시작으로 하여 우왕 5년(1379)까지 걸쳐 있다. 이러한 기근사태는<홍범오행전>에 의하면 군주가 토목공사를 남발하거나 음란 등 불륜행위로 해서 빚어지는 재해라고 한다. 土에 관한 재이로는 恒風, 大風, 常風, 恒霧, 大霧, 夜妖, 地震, 山崩, 石裂, 蠃虫(비늘·껍질·깃 등이 없는 虫)의 변이, 牛禍, 黃眚·黃祥 등인데 이 중에 몇 가지 실례를 들기로 한다. 먼저 다음은 인종 8년(1130) 6월과 7월의 暴風折木의 재이에 관해서 당시 太史가 상주한 것이다.

8년 6월 계미일 晡時(申時)에 폭풍이 불어 나무를 꺾고 모래를 날리며 우박이 내렸다. 太史가 아뢰기를 ‘근래에 陰陽을 臆說하는 자가 있어 임금에게 번갈아 소식을 올려 非禮의 齋醮를 행하니 비유컨대 약을 다 썼는데 병이 낫지 않는 것과 같사옵고 늙고 젊은 남녀가 자주 모여서 서로 佛號를 唱하오니 마땅히 御史臺 및 街衢所에게 巡行하여 금지케 하도록 명하소서’하니 이를 따랐다. 7월 신해일에 폭풍이 불어 나무를 뽑았고, 천둥 번개치고 五正里 人家의 소나무를 벼락쳤다. 太史가 奏하기를 ‘立夏부터 立秋 후에 이르기까지 時令이 不調하여 풍우가 暴作하고 혹은 우박이 내리니 이는 또한 水旱兵喪之災라 장래가 가히 두렵사오며, 齋祭로 祈禳하여도 變을 제거할 수 없아오니 원컨대 전하께서는 몸소 반성하고 덕을 닦으시어 위로 天譴에 답하소서’라고 하니, 이를 따랐다(≪高麗史≫권 55, 志 9, 五行 3).

 위에서 暴風拔木 등 일련의 재이에 대한 궁극적인 해소방법으로 군주의 반성과 수덕만이 천견에 답하는 길이라고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恒霧·大霧에 관한 사례를 들 수 있다.

의종 18년(1164) 11월 무자일에 大霧가 끼었다. 계묘일에는 陰霧로 사방이 막혀 길가던 사람이 길을 잃었다. 태사가 상주하기를, ‘안개란 뭇 사특한 기운으로서 연일 풀리지 않으면 나라가 혼미하다고 합니다. 또 안개가 혼란하게 일어나 10보 밖의 사람이 보이지 않음을 晝昏이라 합니다. 대궐의 明堂은 조종이 정사를 펴는 곳으로 그 제도는 모두 천지 음양을 본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임금은 출입과 기거를 무상하게 하지 못하는데, 지금 폐하께서는 그 있을 곳이 아닌 곳에 처하고 그 인물이 아님에도 임용하시며 명당은 오래도록 비우고 거처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천재는 가히 두려워할 것인데 修省하지 않으시고 移徙가 무상하며 號令이 때가 없어, 이러한 이변이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끝내 의종은 깨닫지 못하였다(≪高麗史≫권 55, 志 9, 五行 3).

 결국 이 때에 연달아 일어난 안개 현상을 의종이 실정한 소치로 돌리고, 태사는 왕의 責己修省을 요청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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