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남아 있는 도선에 관한 자료는 양적으로는 상당수에 달하고 있으나, 그 대부분이 후세에 많이 윤색되어 있거나 假作된 것이어서 사료로서의 가치는 적은 것이다. 예컨대 고려 태조의<訓要十條>, 崔應淸의<玉龍寺王師道詵加封先覺國師敎書及官誥>, 金寬毅의≪編年通錄≫, 閔淸의≪本朝編年綱目≫및≪龍飛御天歌≫,≪世宗實錄地理志≫등의 내용은 모두 고려 왕실과의 관계나 풍수지리설의 전래 사실만을 말한 것 뿐이며, 기타≪東國輿地勝覽≫이나 ≪朝鮮寺刹史料≫등에 실린 도선 관계 기사는 그대로 신빙하기 어려운 허황된 사실뿐으로 사료적 가치가 대단히 적다. 그러한 자료 가운데에서 가장 상세하고 종합적이며 사료적 가치가 높은 것은 崔惟淸의<白鷄山玉龍寺贈諡先覺國師碑銘竝序>가 유일한 것이다.636)崔柄憲,<道詵의 生涯와 風水地理說>(≪先覺國師 道詵의 新硏究≫, 靈岩郡, 1988), 96∼98쪽.
이런 자료들에 의존하여 그의 풍수사상의 특징을 정리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한국 풍수의 초창기였고 또한 이후의 풍수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 크게는 한국 풍수사상의 전반적인 특성을 규정짓는 것으로 생각된다.
우선 도선의 풍수사상은 생활에 바탕을 둔 경험지리학이라는 점이다. 민지의≪본조편년강목≫에 이르기를 “태조 나이 열일곱에 도선이 다시 뵙기를 청하여 ‘足下가 百六之運에 應하여 天府名墟에 태어났으니 三季의 蒼生이 그대의 넓은 구제를 기다린다’고 말하면서, 因하여 出師·置陣·地理·天時의 법과 산천에 望秩하여 感通保祐하는 이치를 가르쳐 주었다”고 하였다. 출사·치진의 방법은 신라 말의 혼란한 사회상황에서 一族一村의 생멸에 관계되는 중대사이기 때문에 그것이 단순한 미신적 유희였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아가 地理와 天時의 법은 말 그대로 땅의 이치를 파악하여 원하는 바 입지를 최적의 장소로 삼고, 天候를 살피고 예견하여 가장 적절한 때를 선택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이 또한 경험과학적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의 경험지리학적 특성은 개성의 지세 설명과 국토 전반에 대한 지리적 특징을 요약한 대목에서도 읽을 수 있다. 五冠山으로부터 松岳에 이어져 개경의 陽基를 여는 지세적 설명을 하면서 水母木幹이라는 표현을 하였는데, 북쪽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동쪽을 등마루로 하고 있다는 것을 水根木幹 혹은 水母木幹이라 말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것은 오행에서 水가 북, 木이 동을 나타내는 것으로 미루어 北高南低, 東高西低의 한반도 地體構造를 地貌上으로 파악하고 있었다는 증명이 된다.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 지형은 傾東地塊로, 대체로 서울-원산을 연결하는 추가령구조곡을 경계로 하여 남북 한반도는 그 지질과 지체 구조 및 지형에 있어 상당한 차이가 있다.637)姜錫午,≪新韓國地理≫(새글사, 1971), 18∼19쪽. 지형만을 고려하여 보면 일반적으로 북한은 고도가 높고 험준한데 반하여 남한은 고도가 낮고 산세도 비교적 낮고 평평한 편이다.
척량산맥으로 볼 수 있는 낭림산맥과 태백산맥을 기준으로 하여 한반도를 동서로 구분하여 보면 동고서저의 지형적 특징이 현저하게 나타난다. 북동 내지 북북동 방향으로 뻗어 있는 산맥들은 선캠브리아계와 이를 貫入한 중생대 화강암류로 구성되며 습곡과 단층작용을 심히 받으며 지형 변화를 겪은 후 깊이 침식되어 이루어진 산맥들로 그 산맥들의 중간부는 동측에서 높은 臺地를, 서측에서는 평야를 이루고 있다.638)金玉準,<韓國의 地質과 鑛物構造>(≪金玉準敎授停年退任記念論文集≫. 延世大 地質學科同門會, 1982), 4∼5쪽. 그러므로 수모목간 또는 수근목간이라는 술어는 개경 來龍의 脈勢에 대한 설명일 뿐만 아니라 한반도 전체에 달하는 地體構造를 이해한 술어로 보아도 될 듯하다.
어떤 면에서는 水와 木을 훈독대로, 수와 목 즉 물과 나무를 母幹 혹은 根幹처럼 중시하라는 경구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개경은 그 후 여러 術士와 地理家 부류가 모든 풍수적 조건이 완비된 땅이라고는 했지만, 물의 부족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고 물의 함양과 땔감을 위하여 소나무를 심고 가꾸라는 도선의 지적이 결국 수와 목의 중시, 즉 水母木幹으로 표현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당시의 풍수지리설은 자생적 한국 풍수지리의 경험적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었고 중국 풍수이론의 도입은 초기였기 때문에 아직 크게 술법에 치우치지는 않았던 때인 듯하다. 따라서 땅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이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며, 또 국토를 조직적으로 보고자 하는 합리성이 깊이 내재되어 있던 때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판단을 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합리성이 가장 잘 나타나는 것이 국토 공간의 중심적 위치를 한반도 동남단에 편향된 경주로부터 중부지방으로 옮기고자 생각했던 신라 말의 禪僧들이었다.
그들은 풍수 논리를 중국으로부터 도입하여 자생적 풍수사상에 접목·보강시킴으로써, 당시의 혼란된 정치, 사회적 풍토를 정리해보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였던 만큼, 객관성이나 합리성을 지니고 있었으리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개경은 풍수 이론상 가장 대표적인 藏風局의 형태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살피기 위해서는 靑龍·白虎·朱雀·玄武 등 四神砂의 배치 형세가 어떠한 지를 먼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郭璞의≪葬書≫에 “經曰 氣乘風則散 界水則止 故爲之風水 風水之法 得水爲上 藏風次之”라는 구절이 있고, “故人聚之使不散 行之使有止”라고도 하였다.639)≪地理正宗≫권 2, 葬書(台中市, 端成書局, 1963). 여기서 之는 生氣를 가리키기 때문에 결국 생기를 얻을 수 있는 藏風이 필요한 근거를 제시한 말이라 볼 수 있다. 乘風치 않고 장풍하는 지세란 결국 산에 둘러싸인 盆地狀 지형의 곳을 가리키는 것으로, 개경은 대체로 이에 속하는 지세라고 할 수 있다.
분지는 종류가 매우 다양한 개념으로 해양분지, 유역분지, 구조분지, 단순한 형태상의 분지, 석탄분지, 圈谷, 석회암 溶蝕분지, dock system640)F. J. Monkhouse, A Dictionary of Geography, 1965, p. 33. 등 8가지로 나뉘는데 이와 같은 분지상 지세는 특히 한냉계절에 풍속이 강한 지역에서의 주거조건으로는 매우 바람직한 것이다. 편서풍지대인 서부 유럽의 런던이나 파리를 비롯하여 겨울철 북서계절풍이 혹심한 우리 나라나 중국의 오랜 읍도들의 입지가 그와 같은 한랭한 바람을 막을 수 있는 입지, 즉 분지 혹은 분지상 지역에 건설된 사실이 그것을 증명해준다.
술법상으로 砂, 즉 산의 기능은 生氣를 흩어지지 않게 모으고 龍身과 區穴을 호위하며 局勢를 펼치는 데 있다.641)≪地理大成山法全書≫권 首 上, 釋名部 上下砂. 호위라는 측면에서 사는 군사지리적 타당성도 갖는다. 앞서 말한 곽박의≪장서≫에는 4신사의 형세를 “玄武垂頭 朱雀翔舞 靑龍琬筵 白虎順頓”이라 하였고,≪地理大全≫에는 砂의 모양이 厚, 淸, 歸, 長, 明, 順하여야 된다고 했는데,642)≪地理大全入門要訣≫권 3, 砂法 總論(上海, 中原書局, 1929). 이는 주위의 산맥이 穴場과 명당을 향하여 집중하고 호위하는 듯한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풍수이론상 중요한 부분으로 山河襟帶, 山水回抱, 風氣密集이 모두 이에 해당하는 말이다.
산하금대 등 상기한 조건은 풍수지리설에서 뿐 아니라 실상 옛날부터 정치와 군사의 중추인 도읍 선정의 중요한 지리적 조건이 되어 왔다. 漢의 高祖가 처음 洛陽에 도읍을 정하려 하였을 때, 婁敬이 지리의 형세를 논하면서 關中 奠都를 권한 것이라든지, 한 元帝 때에 翼奉이 역시 낙양 천도를 권하여 말한 것이 이에 해당된다. 더욱이≪淮南子≫兵略訓에는 “所謂地理者 後生而前死 左牡而右牝”643)여기서 生은 高, 死는 低, 牡는 丘陵, 牝은 溪谷을 뜻한다.이라 하였는데, 이는 孫子兵書의 “左右背高前死後生”에서 나온 말로서 거의 군사지리상의 상식적인 조건이었다.644)李丙燾, 앞의 글, 25쪽. 특히 곡사화기가 없던 근대 이전의 전쟁에 있어서는 藏風地의 군사적 유리점이 더욱 두드러진다.
손자의 “知彼知己 勝乃不殆 知天知地 勝乃可全”의 단계로 敵과 我가 비등한 병력으로 전술적 대치를 하는 상태라면 확실히 유리하지만, 전략적인 측면에서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盆地狀地勢上에서는 기동성의 저하는 물론, 손자가 말한 散地, 輕地, 爭地, 交地, 圍地 등 9地 중에서 위지에 해당되어 적이 소수의 병력으로 게릴라적인 소모전을 획책하던가 또는 대규모의 월등한 병력으로 침공하는 경우는 불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圍地란 “所由入者隘 所從歸者迂”로서, “彼寡可以擊吾之衆者爲圍地”이기 때문에 결국 개성과 같은 藏風局의 땅은 전술적 유리점과 전략적 불리점을 공유하고 있는 지역이라 할 수 있다.
개경은 전술한 바와 같이 송악을 玄武 즉 鎭山으로, 내성과 외성을 내외 靑龍과 白虎로, 朱雀峴과 龍岫山을 朱雀으로 한 완벽한 四神砂를 갖춘 도읍이지만, 국란에 임해서는 수도를 사수할 수 없는 전략적 취약성을 드러냈던 곳이기도 하다.
또 한 가지 개경의 풍수적 입지 상황에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 그 곳이 右旋局이란 점이다. 左旋局·右旋局은 용의 최종적 변화 현상을 일컫는 용어인데, 來龍의 나아가는 방향을 기준으로 明堂·穴場의 국면을 環抱하는 산세가 대부분 오른쪽에서 휘돌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 우선국이다.
송악은 金星의 산에 속하는 북서방 乾山으로, 金은 송대의 術師 胡舜申의 설에 의하면 卯로부터 絶(胞)胎를 시작하는 형식이기 때문에, 水流의 출구인 풍수상의 破가 巳方으로 나가는 것은 水破長生의 凶格은 면한 셈이라고 할 수 있다.645)李丙燾, 위의 글, 9∼95쪽. 이것을 보다 쉽게 설명하면, 5行長生方位에 의하여 우선국은 역으로 陰局이 되고, 여기에 금은 卯가 絶, 寅이 胎, 丑이 養, 그리고 子가 長生, 亥가 沐浴, 戌이 冠帶, 酉가 臨官, 申이 帝旺, 未가 衰, 午가 病, 巳가 死, 辰이 墓가 되어진다.
그런데 이상 12宮의 길흉을<靑囊經>에 의하여 대폭 간소화시켜 보면,646)≪地理靑囊經≫권 2, 論水法(台中市, 華成書局, 1975).
胡舜申,≪地理新法≫권 3, 第5論부터 第11論까지 참조. 養과 長生은 九星이 貪狼으로 길, 沐浴과 冠帶는 文曲으로 흉, 臨官과 帝旺은 武曲으로 길, 衰는 巨門으로 길, 병과 사는 廉貞으로 흉, 墓는 破軍으로 흉이 된다. 따라서 乾山에 金인 개경은 逆인 陰局으로서, 그의 五行長生이 12지지방위로 하여 子·丑·酉·申方이 길이고, 나머지는 흉방에 해당된다. 풍수 得水法 논리상 水는 吉方에서 나와 凶方으로 가야 되는 만큼, 개경의 水破가 巳方으로 흉방이 되기 때문에 水局은 술법상 좋은 편이다.
子方은 북방, 丑方은 북북동방, 酉方은 서방, 申方은 서남서방이 되어, 水口인 破가 그 방향으로 형성되게 되면 主山을 찌르는 형국으로 침식의 위험이 있다. 그리고 申方을 제외하면 겨울철의 寒風을 막을 수 없는 단점이 있기 때문에 풍수 술법상의 水破 이론은 개경의 경우 매우 타당한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藏風에 따라 개경 주변의 산세가 너무도 주밀하여 국면이 넓지 못하고 또 北山 諸谷에서 흘러나오는 계곡물은 모두 중앙에 모이기 때문에 여름 강우기에는 水勢가 거칠고 奔流가 급격하여 순조롭지 못한 결점이 있다. 이와 같은 逆勢의 水德을 진압하고 地德을 비보함에는 도선의 山水順逆法 내지 寺塔裨補說을 응용하여, 廣明寺와 日月寺는 위 諸水의 합류점에, 開國寺는 개경의 內水口 위치에 건설하여 이 사원으로써 수세를 진압코자 하였다.
이는 매우 합리적인 판단으로 하천의 범람이 우려되는 취약지점과 하천의 합류점에 사원을 조영함으로써 인공구조물에 의한 하천의 측방침식을 억제하고 승려들로 하여금 하천을 감시하게 하는 동시에 유사시 노동력으로 대처케 할 수 있는 좋은 방안이라 여겨진다. 이런 경우 사탑비보설은 타당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우선국 역시 白虎勢의 우월을 나타내게 되는데, 속설에는 청룡은 해가 뜨는 동쪽으로 帝王·出世·官貴·男子를, 백호는 해가 지는 結實의 서쪽으로 여자와 재산에 유추하여 개성상인·개성여인을 운위하기도 한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개성의 예에서도 道詵式의 한국 풍수의 경험지리학적 바탕은 명백하게 예증되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사용 용어가 동양학의 일반적인 속성대로 은유나 상징, 혹은 역설과 시적 이미지를 구사함으로써, 말로 표현하기 힘든 인간의 직관 범위를 비논리적으로 호도했다는 근본적인 결함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道詵踏出歌>647)金成俊 編,≪韓國地理總論≫(育志社, 1982), 附錄의 出典인데, 이 역시 도선의 실제 작품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다만 民間 傳承의 風水書들은 은연 중에 우리 풍수의 원래적 모습을 담고 있으리라고 기대되어 참고삼아 정리하였다.와<玉龍子遊世秘錄>648)扶安郡 河西의 한 儒學者로부터 입수한 筆寫本인데, 이것도 주 647)과 같은 이유로 분석하여 보았다.에 나와 있는 내용을 분석하여 살펴본 도선의 풍수사상으로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정리되어진다.
<도선답산가>는 풍수 논리라는 측면에서 볼 때, 매우 초보적이고 간략하기도 하지만 그 내용 자체도 지나치게 단순하고 소박한 감이 있다. 그것이 오히려 초기 우리나라 풍수사상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의미가 있다. 더구나 이런 기초적이고 단순한 내용의 풍수이론이 도선이라는 풍수상의 거물을 앞에 내세운 가운데 지금까지 유통될 수 있었다는 것은, 이 자료가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도선답산가>에서는 크게 형세와 방위, 특히 형세에 관련되는 形局論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형세에 있어서는 청룡·백호·주작·현무 등 4신사의 모양새를 주로 언급하고 있는 바, 그것은 공간 인식을649)地理學에서 ‘공간’이란 용어는 오늘날 장소 혹은 지역과 대비하여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나, 여기서는 ‘地表環境’이라는 단순한 일반 개념으로 쓴 것이다. 상징성의 知覺構造下에서 다루고 있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경험에 의하여 인지되는 세계란 형태와 색조 등에 의하여 체험되어지는 세계, 다시 말하여 우리의 시야에 가시적으로 확인되어 그 해독을 기다리는 景觀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경험, 더 정확히는 일상생활 경험이란 개인적인 것이며 따라서 주관적이다.
그런데 그것이 개인에 따라 다른 의미로써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그것을 텍스트로서 설정할 수 있게 한다. 이렇게 볼 때 경관이 가지는 개념적인 의의보다 경관을 어떤 문맥으로 접근하는가 하는 문제가 더욱 중요한 방법론적 전환을 가능하게 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텍스트로서의 경관을 설정할 때, 그것은 어떤 특정의 부호라는 형태로 그 해독자에게 전달되며, 그 해독자는 어떤 문화적 맥락 속에서 그것을 해독하는가 하는 문제를 이해할 것을 요구받게 된다. 해독한다는 것은 읽는 사람이 어떠한 문화·사회·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텍스트로서의 경관에서의 의미를 만들어 냄을 뜻하므로 이것은 경험적 세계를 이해한다는 방법론과도 부합된다.650)崔基燁,<景觀的 表現과 空間認識>(≪地理學叢≫10, 慶熙大 地理學科, 1982), 219쪽.
위의 관점에서 볼 때 풍수는 당시 사람들의 땅에 대한 인식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지표일 수 있으며<도선답산가>에 나타나는 바 형국에 대한 기술도 그러한 맥락에서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 해독상의 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것만은 아니라는 어려움은 그대로 남아 있는 셈이다. 예컨대 ‘乾坎入首’라든가 ‘癸丑山下’라든가 하는 구절은 그 용어 자체가 매우 세련된 것이라는 점 이외에도,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장소를 대상으로 하여 얘기되었는가 하는 것이 선결되지 않는 한, 깊이있게 말하기는 무척 어려운 내용인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형세에 관련된 형국론만을 살펴볼 수밖에 없다.
<도선답산가>가 제시하고 있는 明堂 주위 국면의 형세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그 하나는 전반의 전체에 대한 국세 설명이고, 다른 하나는 후반의 세부 지세에 대한 상황 인식이다.
전체 국면의 설명은 필자가≪韓國의 風水思想≫에서651)崔昌祚,≪韓國의 風水思想≫(民音社, 1984) 참조. 요약했던 내용과 거의 같다. 즉 山水相補한 조화, 균형의 땅에 사람의 마음을 知覺上 포근히 감싸 줄 수 있는 有情한 곳, 그러나 속된 氣가 흐르지 않는 聖所로 정리되는 듯하다. 특히 四神砂와 그들에 의해 둘러싸인 명당에 관한 대목은 풍수의 일반 원칙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게다가 당시의 풍수가 개인의 發福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雜術로서의 陰宅風水 위주가 아니라 “明堂可得容萬馬”따위의 구절에서 누차 나타나는 것처럼 삶터 잡기인 陽基風水에 중점이 두어지고 있음도 잘 나타나 있다.
또 하나<도선답산가>의 특징은 類物的인 지세 해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흉한 돌은 刀兵’이라든가, ‘층층이 봉우리를 이루니 대대로 登科하겠구나’ 따위가 그런 것인데 본문의 상당 부분이 그런 식이다. 유물적 지세 해석 방법은 풍수 형국론에 직결되며 이는 한국 풍수의 한 큰 특징이기도 하다.
처음에 도선이 松京에 도읍을 정할 때에 산천을 두루 돌아보고 나서 “이곳이 앞으로 8백 년 동안 이 나라 운수를 지탱할 곳이니 축하할 일이로다”라고 말하였으나, 조금 있다가 동남쪽에 안개가 개이면서 漢陽의 三角山이 우뚝하게 넘어다 보였다. 도선은 이것을 바라보면서 스스로 탄식하여, “저 삼각산 봉우리가 辰方에 있어서 마치 도둑놈의 깃발처럼 되었으니 4백년이 지나면 이 나라의 큰 운수는 장차 저 산 밑으로 옮겨 갈 것이로다”라 말하고, 일흔 다섯 마리의 石犬을 만들어 진방을 향해 세워서 마치 도둑놈을 지키는 형용을 만들어 놓았다. 그 뒤에 고려는 과연 475년만에 망해버렸다.652)洪萬宗,≪旬五志≫권 上(李民樹 譯, 乙酉文化社, 1971), 30∼31쪽.
위의 인용문에서도 도선식의 유물적 지세 해석을 읽을 수 있다. 특히 이것은 이러한 유물적 해석이 그의 裨補風水로 이행되어 가는 과정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지형과 지세를 있는 그대로 둔 채, 그 영향을 직접 받아들인다고 보았던 서양의 환경결정론(Environmental Determinism)에 비해서는 훨씬 가능론(Possibilism)적 입장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경관을 주체적으로 본다는 점에서도 그러하고, 소위 “奪神工 改天命”의 풍수적 적극성에 있어서도 흥미가 새로운 부분이다. 좀 억지스럽기는 하지만 도선 풍수의 한 특징으로 주체적 적극성을 꼽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리고<玉龍子遊世秘錄>에서는 다음과 같은 도선 풍수의 특성을 뽑아 볼 수 있다.
첫째로 圖讖式 표현 방법을 자주 원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대표적인 예로는 “主人을 찾아하니 木卜姓의 땅이로다” “主人峯 자세 보니 木子千年 분명하다”에서와 같이 朴氏를 木卜姓, 李氏를 木子로 표현하는 바와 같은 破字 양식은 도참의 전형이다.
또 “碧松寺 前後局은 兵火不入하리도다” “山高谷深하야 兵火不入 허다하다”는 구절들은 대표적 도참서인≪鄭鑑錄≫鑑訣에서 保身之地에 해당된다. 도참은 본시 말세에 새로운 인물, 새로운 시대의 출현과 도래를 예고하는 동시에 그럴 때의 보신책을 가르치는 것이 본령이기 때문에, 도선의 풍수 사상에 도참적 성격이 깊이 내포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단하는 것은 상당한 합리성을 갖는다.
둘째로 윤리성을 꼽을 수 있다. 수많은 사례들이 등장하는데, 한 마디로≪周易≫이 가르치는 바 “積善之家 必有餘慶”임을 강조하는 내용들이다. 그러나 풍수의 윤리성을 해석하는 일은 결코 단순한 일이 아니다. 물론 풍수의 윤리성 강조는 우리나라와 같이 풍수에 대한 믿음이 신앙의 경지에 달한 곳에서는 그 順機能에 대해 굳이 열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나쁜 짓을 했으면 아무리 名地官을 동원해도 좋은 땅을 얻지 못하며, 積善·積德을 하면 어느 곳에 몸을 뉘워도 그 곳이 길지라는 풍수 윤리는 사람들에게 매우 강렬한 규범의 기준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수의 존립 기반을 그 윤리성이 위협하고 있다는 것은 역설적이면서도 문제를 내포한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인성의 선악이 명당·길지 선정의 궁극적 기준이라고 한다면 풍수상 定穴의 여러 가지 法術들은 무슨 의미를 갖겠는가 하는 것이다. 착한 일만 한다면 좋은 땅이 天理에 의해서 주어질 것인데 무슨 풍수가 소용에 닿겠는가 하는 지적이다.
만일 善으로 일생을 一以貫之할 수 있다면 풍수는 필요없다. 그러나 인간이 그럴 수가 없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善業을 닦으려 노력하라는 의도성과 改天命 奪神工할 수 있다는 적극성, 그리고 모자라는 善德을 地氣로 보완할 수 있다는 天地人 調和觀이 그러한 문제에 관한 대답의 일단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셋째는 풍수가 지니고 있는 陰陽五行說을 중시하는 특성이다. 음양오행설은 천지인 상관론에 입각한 전형적인 동양적 조화 사상으로 보아도 무방한 사고 관념이다. 그러면서도 이것이 풍수에 들어와서는 數秘學的이고 秘術的인 변용을 많이 하기도 한다. 내용에 있어서는 주로 오행의 상생관계와 음양의 조화관계를 직접적으르 묘사한 대목들이 많이 나온다. 특히 窩·鉗·乳·突 등 穴形四大格에 관련된 용어들의 사용 빈도는 아주 높은 편이다.
陰中에 양이 있고 陽中에 음이 있기 때문에 太陽·少陽·大陰·少陰의 四象이 생기게 되는데, 그 형체가 穴形에서는 窩鉗乳突의 四格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다시 36形, 82邊, 365體, 389象 등의 변태를 파생하게 되지만 결국 4대격에 기본을 두고 있는 것인 만큼 窩·鉗·乳·突의 이해만으로도 穴形의 대개는 파악할 수 있다.
穴形은 음양의 원리를 기본으로 삼게 되는바, 실제 相地時에는 지형의 凹凸에 의하여 음양을 구분하게 된다. 龍脈이 도톰하게 凸形으로 튀어 나온 손바닥을 엎은 모양(覆掌形)을 음이라 하고, 오목하게 凹形으로 들어간 손바닥을 오므린 모양(仰掌形)을 양이라 한다.
4格 중 窩와 鉗은 그 훈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감춘다, 혹은 목사슬 등의 凹形이므로 陽穴이 되고, 乳와 突은 凸形이 되어 陰穴이 된다. 따라서 음맥이 오는 아래에 窩·鉗의 양혈이 있어야 하고 양맥이 오는 아래에 乳·突의 음혈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다시 말해서 등성이진 곳(背脊)이 음이 되고, 평탄하거나 오목한 곳이 양이 된다. 그리고 穴의 후면이 일어나거나(起) 등성이로 드러난 脈(露脈) 아래에 窩나 鉗穴이 생기는 것이니 이는 陰來陽受에 의함이고, 혈의 후면이 평탄하게 혹은 오목지게 내려온 맥 아래에 乳 또는 突穴이 생기는 것이니 이는 陽來陰受하는 이치이다.
이것은 음양론상의 설명이나, 실제 相地에 있어서 地貌의 위와 같은 형세는 조화의 관념에서 비롯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즉 높은 산지에서는 우묵하게 들어간 곳이라야 아늑하고 평야에서는 좀 튀어나온 곳이라야 답답하지가 않다. 또 명당이 鉗이나 窩인 곳에서는 穴場은 突이나 乳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비가 많이 올 때 명당이 凹地이기 때문에 穴場의 침수를 면키 어렵다.
따라서 도선 풍수가 음양을 강조하는 것은 고답적인 논리의 강변이 아니라 경험에서 우러나온 합리적 판단의 결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와 같이 풍수에서는 사실은 과학적 지리학 이론이면서도 그 표현에 있어서는 비술적 용어를 대량 사용함으로써 현대인의 접근을 어렵게 하는 일들이 부지기수이다. 그렇기 때문에 풍수에서는 그 용어가 포함하고 있는 본질적 의미를 간취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넷째로 그 적극성을 꼽을 수 있다. “穴中에 물 있거든 補土하고 葬事하소서”에서와 같이 ‘穴中生水’는 풍수 禁忌 중의 금기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조건이 갖추어졌다면 ‘補土’라도 해서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적극성이라 할 만한 내용이다. 이와 함께 풍수의 相地占穴이 후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표현도 자주 나온다. 따라서 그 적극성은 분명하지만 논리성과의 불일치가 문제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는 그야말로 하늘이 낸 사람들인 孔子나 舜을 거론함으로써 배반적 논리를 호도하는 재주를 보여주었을 뿐, 적극성이라는 특성에는 변함이 없다.
끝으로 嚴密性과 中庸性인데, 穴處의 깊이를 말하는 대목같은 데서 鐵灸術에 있어서 침을 어느 정도 깊이까지 찔러야 되는지에 관한 문제에다가 이를 비유하는 내용이 엄밀성에 관계되는 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고, 또한 공부하는 태도와 방법에 있어서도 자주 엄밀성을 요구하는 내용들이 나온다. 그리고 이론과 踏山을 겸전하라는 가르침에서도 중용성을 읽을 수 있거니와, ‘言賊黙賊’이란 표현에서도 그것을 감지할 수 있기에, 또 하나의 도선 풍수의 특성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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