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대승이 죽은 것은 명종 13년 7월이었다. 그 후 무신정권의 새로운 집권 자가 된 인물은 李義旼이었다. 그는 경주인이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소금과 체를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으며 어머니는 玉靈寺의 노비였다. 이러한 신분적 열세와는 달리, 그의 신체적 조건은 뛰어났다. 그는 신장이 8척에다가 남다른 용력까지를 지니고 있었다. 신분제사회였던 고려에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었던 그가 뛰어난 신체적 조건을 갖추었다면 그의 행동이 어떠했겠는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는 그의 형들과 함께 경주에서 무뢰한 행동을 일삼았던 것이다. 경주인들의 고발에 따라 이의민은 옥에 갇혔는데, 그의 두 형이 고문을 이기지 못해 죽었으나 그만은 건재하였다. 이에 그를 장하게 여긴 按察使 金子陽이 그를 京軍에 선발하였다.
고려의 경군은 관료체계의 말단을 차지하는 존재였다. 田柴科를 지급받은 사실로 미루어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천계의 인물들은 원칙적으로 경군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군인을 보충할 목적으로 選軍을 실시할 경우, 여기에는 천계의 인물들이라 하더라도 용력이 뛰어나면 선발될 수가 있었다.032)李基白,<高麗軍人考>(≪高麗兵制史硏究≫, 一潮閣, 1968), 114∼123쪽. 이의민을 비롯한 천계의 인물들이 군인이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경군에 선발된 이의민은 手搏을 잘하여 국왕인 의종의 사랑을 받았다 한다. 이로 인해 그는 대정을 거쳐 별장에 올랐다. 그것만으로도 천계인 그로서는 대단한 출세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무신란은 그로 하여금 이러한 출세에 만족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는 무신란 직후 곧 바로 中郎將에 올랐으며, 얼마 후 다시 장군으로 진급하였던 것이다. 거의 모든 무인들이 무신란을 통해 승진을 하기는 했지만 그의 경우처럼 파격적이지는 않았다. 이의민의 예외적인 승진은 “죽인 자가 많았다”는 표현이 말해 주듯,033)≪高麗史≫권 128, 列傳 41, 李義旼. 무신란에 있어서 그의 활약이 누구보다 두드러졌던 데에 기인한 것이었다.
일찍이 이의민의 아버지는 이의민이 푸른 옷을 입고 皇龍寺 9층탑을 올라가는 꿈을 꾸었다 한다. 이후 그는 이의민이 크게 귀하게 될 것으로 믿었다는 것이다. 이의민 역시 그의 출세를 암시해 주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경군에 선발되어 서울에 온 첫날밤의 꿈에 “긴 사다리가 성문에서부터 궁궐에 이르러 있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는 것이다.034)위와 같음. 무신란은 이러한 꿈들을 현실적인 것으로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이의민은 이의방정권 아래서도 순탄한 출세를 지속하였다. 그는 명종 3년에 일어난 金甫當의 亂을 진압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함으로써, 대장군에 올랐던 것이다. 김보당은 의종의 복립을 내세워 군사를 일으키면서, 거제도에 유배되어 있던 의종을 경주에 옮겨 놓았다. 이에 이의민은 경주에 내려가 손으로 의종의 등뼈를 추려 죽이고, 연못 속에 던져버렸다 한다. 그를 총애해 준 국왕에 대한 보답을 이처럼 잔인한 행동으로 대신했던 것이다. 아무튼 이로써 김보당이 내세운 난의 명분을 제거한 셈이다. 이후 명종 4년에는 趙位寵을 토벌한 공으로 상장군에까지 이르렀다.
이의민의 정치적 진출은 정중부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상당한 제약을 받았 다. 이는 그가 조위총의 남은 무리들을 토벌하기 위해서, 또는 병마사의 직임을 맡아 주로 변방인 서북계에 머물러 있었던 사실로 짐작된다. 그가 서북계에 머물러 있었던 것은 정중부정권이 무인으로서의 그의 재질을 인정했다기보다는 중앙의 정치에서 그를 제외시키려는 의도적인 조치였다고 이해되기 때문이다. 사실 무신란에 임한 그들의 태도가 달랐음을 감안하더라도, 정중부정권에서 이의민이 중요한 직위를 차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의민이 정치적으로 크게 타격을 입은 시기는 경대승의 집권기였다. 앞서 말했듯이, 경대승은 이의민의 제거를 공언했던 것이다. 이의민 역시 경대승 을 재거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무신란에 참여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무신란을 부정하기까지 했던 경대승의 집권에 그가 분개하지 않았을 까닭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집권자 경대승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기에는 아직 역부족이었다. 그는 경대승으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용사를 모았는가 하면, 그가 사는 마을의 거리에「閭門」이라 부르는 큰 문을 세워 밤새 경계하기도 했었다. 그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의민은 스스로 불안을 느낀 나머지 결국은 병을 칭탁하고 고향인 경주로 낙향하고 말았다. 명종 11년의 일이었다. 경대승의 이의민 제거 의지가 그만큼 집요했음을 알려 준다.
경대승이 죽자, 국왕인 명종은 사신을 파견하여 경주에 내려가 있던 이의민을 불러 들였다. 그가 경주에서 난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 한 때문이었다 한다. 그러나 설사 이의민이 경주에서 난을 일으킬 소지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국왕이 그에게 工部尙書까지 제수하면서 누차 그를 부른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의민의 상경이 왕에게 불리한 결과를 초래했다면, 사신을 파견하면서까지 그의 상경을 권유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명종은 경대승을 꺼려했다 한다. 경대승이 ‘復古의 뜻’을 품고 있었던 인물 임을 염두에 두면 무리가 아니다. 명종은 무신란의 소산이었던 것이다. 무신 란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왕이 되기 힘든 존재였다. 그런데 경대승이 품었다는 ‘복고의 뜻’은 무신정권만이 아니고 무신란으로 인해 왕위에 오른 명종까지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명종은 경대승과 같은 정치적 성격을 지닌 인물의 등장을 사전에 저지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이에 그는 이의민을 내세웠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의민과 명종은 적어도 무신란을 통해 당시의 지위에 오른 공통점을 가진 인물이었던 것이다.
경주에서 올라와 집권한 이의민은 무인들에 대해서 회유로 일관했던 듯하 다. 그와 정치적 성격을 같이 한 무인은 물론이거니와 그렇지 아니한 무인들 까지도 그의 징권에 다수 참여한 것으로 미루어 짐작된다. 경대승의 집권기 동안 그에 눌려 활동을 못했던 이영진이나 경대승의 족형이었다는 손석의 경우는 그 대표적인 예가 아닌가 한다. 이영진은 경대승정권에 불만을 품은, 경대승의 적대세력이라 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러한 그가 경대승이 죽은 후 다시 ‘橫恣’했다 하는데, 이는 이의민의 집권기에 들어와 정치적으로 복귀했음을 의미한다. 한편 손석은 경대승이 꺼려했던 오광척을 제거하는 등, 경대승의 측근으로서, 경대승이 집권하는데 이를테면 디딤돌과 같은 구실을 했었다. 그는 이의민 집권기에 들어서도 樞密院副使를 역임하는 등 여전히 정치적으로 건재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경대승의 측근세력과 적대세력 모두가 이의민 집권기에 공존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즉 이의민은 이들을 모두 자신의 세력으로 흡수하려 했다고 생각된다. 이의민의 이러한 태도는 남들에게는 ‘헛된 명예를 낚으려는 노력’으로035)≪高麗史≫권 128, 列傳 41, 李義旼. 비춰지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의민은 경대승의 집권 이후 중앙의 정치로부터 소외되어 상당한 기간 동안 정치적인 공백상태를 가졌었다. 그러므로 그가 갑자기 집권자로 부상한 데 따른 반발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또한 그는 이의방처럼 무신란을 주도하여 집권했던 것도 아니고 정중부와 같은 무인들의 지도적 인물도 아니었다. 경대승처럼 그의 가문을 이용할 처지는 더욱이 되지 못하였다. 이의민의 무인에 대한 회유는 이러한 사정을 반영한 것으로서 당연히 취할 수밖에 없는 조치였는지도 모른다.
이의민이 비록 정치적 성격이 상이한 여러 무인들을 그의 정권에 흡수했다 하더라도, 그의 정권을 주도해 나갔던 핵심적인 인물들은 역시 이의민과 정치적 견해를 같이 했던 무인들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는 崔世輔의 亞相 승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명종 14년 당시의 재상 서열은, 제1위의 총재는 이광정의 퇴임으로 궐석이었고 제2위는 한문준이었으며 3위가 문극겸, 그리고 제4위가 최세보였다. 그런데 동년 12월의 인사발령에서 한문준이 총재가 되었으므로, 제2위의 아상은 당연히 문극겸이 되어야 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문극겸의 하위에 있던 최세보가 아상에 올랐던 것이다. 그 까닭은 문극겸이 최세보의 윗자리에 앉을 수 없다고 사양했기 때문이었다 한다.
문극겸이 최세보의 윗자리에 앉기를 거부한 분명한 이유는 드러나 있지 않다. 그런데 당시는 이의민의 집권기였고 이의민과 최세보는 매우 밀착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는 최세보의 아들이 태자가 사랑한 婢를 범했는데도, 이의민이 그를 구해주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된다. 또한 최충헌의 집권과 더불어 최세보의 가문이 완전히 몰락했다는 것도 최충헌의 이의민에 대한 감정이 최세보의 가문에까지 미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문극겸이 최세보에게 아상을 양보한 것은 그가 새로운 집권세력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최세보 이외에, 경대승이 죽은 후인 명종 13년에 추밀원부사에 올랐던 조원정과 동왕 14년에 知御史臺事에 임명된 鄭邦祐도 무신란에 적극 참여한 자들로서 이의민과 정치노선을 같이 했던 인물들이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의민집권기에 권력의 핵심에 있었던 무인들이 어떠한 인물들이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무엇보다 명종 20년의 인사발령이다. 여기서는 이제까지 7인이었던 재상의 숫자를 늘려 8인으로 하였는데, 이 때 임명된 재상은 다음과 같다.
최세보:특진수태사 두경승:수태위 이의민:동중서문하평장사 박순필:중서시랑평장사 사정유:수사공·좌복야·참지정사 이혁유:참지정사 이지명:태자소부 백임지:지문하성사
위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문신인 사정유·이지명·이혁유를 제외한 5인의 재상 가운데 두경승만을 예외로 돌려놓고 보면, 나머지는 모두가 무신란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무인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이의민정권을 주도해 나갔던 무인들이 무신란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현달한 인물들이었음을 알려 주는 것이다.
이의민을 비롯하여 무신란에 적극적이었던 무인들의 대부분이 신분적으로 천계 내지는 사회의 하급 신분층이었다는 사실은 앞의 검토에서 이미 밝혀진 바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 씌워졌던 신분적 굴레는 이들이 집권층으로 부상됨에 따라 자연히 제거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기존의 신분질서가 그대로 유지될 수 없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조원정은 7품 이상은 오를 수 없는 限職의 대상자였음에도 정3품의 추밀원부사에 올랐었다. 또한 명종 14년에 지어사대사가 된 정방우는 잡류 출신이었다. 물론 잡류라 하더라도 군공에 의하여 서반으로 나아갈 경우 종3품까지는 오를 수 있었다고 하지만,036)洪承基, 앞의 글, 78∼80쪽. 정방우처럼 대장군으로서 지어사대사를 겸했던 예는 찾아볼 수 없다. 지어사대사는 風憲官으로서 문신들 가운데서도 덕망이 높은 인물만을 가려서 임명했기 때문이다.037)朴龍雲,<高麗朝의 臺諫制度>(≪歷史學報≫52, 1971), 30∼37쪽.
이의민정권을 주도해 나간 무인들의 대부분은 자신의 힘에 의존하여 출세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문벌이나 학식에 의존한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인물들의 부상은 개인의 용력이 중시되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였을 것이다. 다음의 기록은 이와 관련하여 참고된다.
어느 날 이의민이 두경승과 함께 중서성에 있으면서 자랑하기를 ‘어떤 사람이 용력을 뽐내기에 내가 이와 같이 쳐서 넘어 뜨렸다’하고 주먹으로 기둥을 치니 서까래가 움직였다. 그러자 두경승이 ‘언제인가 내가 빈 주먹을 휘두르니 사람들이 모두 달아나더라’하면서 벽을 치니, 뒷 벽이 무너졌다(≪高麗史≫권 128, 列傳 41, 李義旼).
무인 실력자들의 이와 같은 태도에서 힘이 우위를 차지했던 당시 사회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행동집단 무인들에 의해 주도되었던 이의민정권 아래서는 기존 법제와는 다른 여러 변혁들이 일어났었다. 무인들을 內侍院이나 茶房에 兼屬시킨 것이 그 하나이다. 무인들에게 문반직을 겸임케 한 것은 이의방정권 이래의 일이었지만, 귀족의 자제나 儒士들만이 임명되었던 내시직에 무인들의 겸직이 가능했던 것은 이의민정권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또한 ‘글을 알지 못했다’는 최세보가, 문신 가운데서도 학식이 뛰어난 자들이 보임되는 것이 일반적인 同修國史에 임명된 것도 상당히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국왕이었던 명종이 이제까지의 제도와 다름을 들어, 同修國史의 ‘史’字를 ‘事’로 고쳐, 최세보에게 同修國事의 직함을 내릴 정도였던 것이다.038)≪高麗史節要≫권 13, 명종 16년 12월.
당시의 고려인들도 이의민정권을 이제까지의 무신정권과는 다른 것으로 이해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는 이의민을 ‘新道宰相’이라고 불렀다는 것으로 미루어 추측된다. ‘신도재상’은 이의민이 제방을 쌓고 거기에 버드나무를 심었기에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는 것이다.039)≪高麗史≫권 128, 列傳 41, 李義旼. 그러나 새로운 제방 하나를 쌓은 사실만을 가지고 이의민을 그렇게 불렀을 것 같지만은 않다. 이의민이 이제까지의 재상들과 구별되었기에, 제방 쌓은 것을 빙자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생각되는 것이다.
명종 14년부터 12년 동안 지속되었던 이의민정권은 동왕 26년 崔忠獻과 崔忠粹 형제에 의해 무너졌다. 그런데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그 이전에 이미 다수의 행동집단 무인들이 죽었다는 사실이다. 조원정·석린은 명종 18년에 반란죄로 처단되었으므로 차치한다 하더라도, 동왕 21년에는 백임지·박순필·이영진이, 그리고 동왕 23년에는 최세보가 사망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무신란에 적극 참여하여 무신란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무인들의 세대가 끝났음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제 무신정권은 그들과는 다른 새로운 세력들에 의해 교체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金塘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