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2. 농민·천민의 봉기
  • 2) 무신정권 성립기의 농민·천민봉기
  • (5) 운문·초전민의 봉기
  • 나. 운문·초전에서의 농민봉기

나. 운문·초전에서의 농민봉기

 경주 지역의 농민봉기는 명종 20년에 이어 23년 이전에 다시 일어났다. 이 사실은 명종 23년 2월에 東南路按察副使 金光濟가 반민들을 토벌하였으나 감당하기 어려워 京兵을 요청한 데서 알 수 있다.

 흉년으로 인한 생활의 어려움이 농민들의 재봉기를 야기시켰다고 파악한 정부는 경상도뿐만 아니라 전라도·양광도에까지 사자를 보내어서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게 하였다. 한편으로는 굶주림에 못이겨 도적질을 하거나 국가에 세금을 제 때 바치지 못해 감옥에 갇힌 백성들을 풀어주어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주력하였다.167)≪高麗史節要≫권 13, 명종 23년 3월·4월. 그러나 일시적이고 미봉적인 정부의 몇 가지 조처로서 농민들의 분노를 잠재우기에는 매우 미흡하였다. 특히 탐학한 지방관이나 토호에 대한 제재 조치가 전혀 시행되지 않음으로써 농민들은 봉기를 그만두고 귀향했을 경우에 그들에게 돌아올 보복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정부의 시책은 전혀 효과를 거둘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이들의 반란은 점차 확산되어 급기야는 雲門·草田民의 봉기로 대표되는 경상도 전역의 소요로 확대되었다.

① 남방에 도적이 봉기하였는데 그 중에 강한 자 金沙彌는 雲門에 웅거하고, 孝心은 草田에 웅거하여 떠돌아 다니는 자들을 불러모아 州縣을 공격하였다(≪高麗史≫권 20, 世家 20, 명종 23년 7월 신미).

② 대장군 全存傑로 하여금 장군 李至純·李公靖·金陟侯·金慶夫·盧植 등을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게 하였다(≪高麗史≫권 20, 世家 20, 명종 23년 7월 병자)

 위의 글은 운문과 초전에서 농민들이 봉기하자 국가에서 토벌군을 파견한 내용이다. 그런데 사료 ①에서 그 중에 강한 자(其劇者)라는 귀절이 있는데, 이 말은 당시의 농민봉기가 운문·초전 두 지역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즉 남쪽지방 여러 곳에서 농민들이 봉기하였는데, 그 중에서 영역이 넓고 농민군의 수도 많아 세력이 강했던 인물이 운문에 웅거한 김사미와 초전을 거점으로 봉기했던 효심이었음을 말해 준다. 이제 농민봉기는 경주에서 벗어나 그 외곽 지대까지 확산되고 있었다. 이 점은 이의민 측근이나 지방관에 의한 농민수탈이 경주에 한정된 것이 아니고 경상도 전역에서 행해졌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여기에는 각 지방에서 대토지를 소유하고 농민들을 억압하던 사원세력 또한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명종 23년 경에 경상도 각지에서 농민들이 봉기했는데, 이들은 점차 강대한 두 세력권에 합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우선 운문과 초전이 어디이며, 그 지역의 특수성은 어떤 점이 있고 농민들이 봉기하게 된 구체적인 원인은 무엇인지 규명해 보자.

 운문은 지금의 淸道에 있는 한 고을로서 원래 雲門寺의 寺領地였다고 한다. 이곳이 운문사의 사유지인지 혹은, 莊·處와 같은 일반 민전으로서 사원에 조세만을 부담한 형태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長生標에 의하여 경계가 확립되어 있으므로 사원의 자체적 경영 하에 놓여 있었으리라는 점과 寺領內의 농민들이 사원의 강력한 경제적 지배를 받는 예속농민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사원에 부속된 단순한 분급수조지인 장·처와는 다른 私莊的 색채가 농후한 성격의 토지로 보아야 할 것이다.168) 姜晋哲,<私田支配의 諸類型>(≪高麗土地制度史硏究≫, 高麗大出版部, 1980), 144쪽.

 청도군은 예로부터 土姓勢가 상당히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명종 때의 문인인 琴儀는 청도를 다스릴 때 鐵相公으로 불리웠으며,169) 李奎報,≪東國李相國集≫권 36, 琴儀墓誌銘. 충숙왕대의 閔宗儒는 나이 어린 감무라고 사람들이 낮추어 보았으나 청탁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고 법에 의해서만 다스리니 사람들이 감히 무시하지 못했다고 한다.170) 崔瀣,≪拙藁千百≫권 1, 忠順閔公墓誌. 요컨대 청도군은 지방관이 토호들의 위세에 눌려 제 기능을 발휘하기 어려웠으며, 소신껏 밀고 나가기 위해서는 철재상이라는 악평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였다. 따라서 청도는 토호와 사원세력으로 인해 주민들이 많은 수탈을 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청도군은 전체 주민수에 비해 경작할 토지도 많지 않았으니, 경상도가 다른 지역에 비해 1인당 평균 경작지가 1.73결로서 가장 소규모였는데 청도군은 이보다 더욱 적은 1.17결에 불과했다.171)≪世宗實錄地理志≫에 의한 지역별 墾田結數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지 방 墾 田 水 田 戶當墾田比率 口當墾田比率
경 주
밀 양
청 도
울 산
수 원
나 주
19,733
10,285
3,932
6,482
19,154
15,339
3/8미만
1/3미만
1/3
4/9이상
1/2미만
1/2이상
1,552
1,612
649
1,058
1,842
1,089
5,894
5,522
3,361
4,161
4,926
4,026
12.71
6.38
6.06
6.13
10.40
14.09
3.35
1.86
1.17
1.56
3.89
3.81

그러므로 청도군은 만성적인 경제적 빈곤에다가 자연재해, 그리고 토호·사원 등의 대토지소유자에 의한 경제적 수탈 등이 원인이 되어 사원전에 소속되어 있던 운문의 전호를 중심으로 봉기한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은 초전을 살펴보자. 초전은 정확하게 어디를 가리키는지 통일된 견해가 없으나, 대체적으로 星州說172) 金庠基,≪高麗時代史≫(東國文化社, 1961).·蔚山說173) 李丙燾,≪韓國史―中世篇―≫(震檀學會, 1962), 482·492·496쪽.·密陽說174) 李建衡,<草田疑考>(≪論文集≫6, 大邱敎大, 1970).
金潤坤,<麗代의 寺院田과 그 耕作農民>(≪民族文化論叢≫2·3, 嶺南大, 1982), 170쪽.
로 나뉘어져 있다. 성주설은 이곳에 옛부터 草田面이라는 지역이 있었으므로 성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운문의 농민들과 연계를 가지고 봉기하기에는 지리적으로 너무 떨어져 있다. 또한 초전민이 성주 부근의 가야산을 놔두고 굳이 남쪽으로 내려가 그들의 생산적 기반과는 거리가 먼 운문산을 근거지로 삼은 데에 대한 논리적인 해명이 부족하며,≪고려사≫기록 어디에도 성주가 반란과 연관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다음 울산과 밀양의 경우, 이 두 지역은 경주와 가깝고 운문의 이웃에 위치하여 연합항쟁을 벌일 경우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울산은≪新增東國輿地勝覽≫蔚山郡 驛院條에 草田院이 보인다. 院이란 출장 중의 관리들이 숙박하는 곳인 만큼 그들이 빈번하게 오가면서 많은 물자를 요구하여 백성들에 대한 수탈이 가중되자, 평소 지배층에 대한 불만이 많던 효심 등 피지배층이 김사미와 연계하여 봉기하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1936년에 安秉禧가 저술한≪密州徵信錄≫에 의하면 초전은 密州郡 武安面 華封里에 있는데 명종 23년에 효심이 이곳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러나 역대 지리지에는 이에 관한 내용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아 무엇에 근거해서 이곳을 반란의 진원지로 지목했는지 알 수 없으나 반란이 일어난 이듬해에 남로병마사가 밀주에서 농민군 7,000여 명의 목을 벤 사실에서 이곳이 관군과의 격전지였음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밀주 무안면은 일찍이 通度寺의 國長生이 설치되어 있던 곳이었다. 따라서 이곳 역시 운문과 마찬가지로 대다수 주민이 사원에 소속된 전호였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리고 밀주는 주변에 많은 천민집단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으로 部曲은 牟山·穿山·豆也保·伊冬音·今音勿·楮代·鳥丁·平陵·古買·谷良村·破西防·近皆·陽良·仇知山의 14개이며, 鄕은 來進·雲幕·薪浦의 3개, 所는 陰谷所가 있다. 이는 경주의 부곡 11개보다 더 많은 것으로서 밀성군의 군세를 짐작할 수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부곡민이 천민인지 아니면 양인으로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일반 군현민에 비해 차별대우를 받았으며 소속 주군·주현의 지배 하에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12세기 이후 무신정권기 신분제의 변동과 함께 천민들의 신분해방 요구에 밀려 점차 변화되었다. 그리하여 고려 말기에 이르러서는 부곡민이 일반군현민과 생활 여건이 실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으며, 국가로서도 군현의 하부구조로의 편성이 조세 수취에 이익이 되지 않는 시대적인 변화에 따라 부곡은 서서히 해체되기 시작했다.

 12세기 이후 부곡민들은 그들이 군현에 예속되어 수탈을 당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초전에서 농민들이 봉기했을 때 이같은 부곡민이 합세하였으므로 더욱 광범위하게 세력이 확장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따라서 밀주에서의 반란은 전호와 부곡민 등이 주축이 되어 일으켰다고 보여지며, 여기에서 초전은 밀주의 한 지역으로 보는 편이 좀 더 타당할 것 같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 분위기는 경상도 어느 지역이든 제2·제3의 초전이 되어 농민봉기를 일으킬 개연성을 지니고 있었다.

 경대승이 죽은 후, 명종은 이의민을 중앙으로 불러들여 정치적인 실권을 맡겼다. 명종은 이의민이 경주에서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중앙으로 불렀다고 한다. 이의민은 명종 14년부터 26년까지 13년 동안이나 최고 집정자의 위치에 있었는데 이는 최충헌 이전의 무신들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정권을 장악한 셈이다. 그런데 명종 23년(1193) 7월에 金沙彌·孝心 등이 봉기하니, 이의민은 이들과 내통하여 신라를 부흥시키려 하였다고 한다. 그 내막을 살펴보고 사실 여부를 규명하기로 하자.

이의민은 일찍이 붉은 무지개가 두 겨드랑이 사이에서 생기는 꿈을 꾸고는 자못 이를 자부하였고, 또 옛도참에「龍孫十二」즉 王氏가 다하고 다시 十八子가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十八子는 곧 李字이다. 이로써 마음 속에 이룰 수 없는 생각을 품고, 탐욕을 줄이고 名士를 거두어서 헛된 명예를 낚았다. 자신이 경주 출신이므로 비밀리에 신라를 부흥시킬 뜻을 가지고, 賊 沙彌·孝心 등과 연결하니 적도 역시 鉅萬을 보내었다(≪高麗史≫권 128, 列傳 41, 叛逆 2, 李義旼).

 이의민이 반민과 내통했는지에 대해서는 두 설로 나뉘어져 있다. 하나는 이의민이 자신의 정치권력을 더욱 강화시키기 위해 반민들을 이용했다는 것이다.175) 旗田巍,<高麗の武人と地方勢力―李義旼と慶州>(≪朝鮮歷史論集≫上, 龍溪書舍, 1979), 484∼485쪽. 이의민이 김사미·효심과 내통했다고 하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효심은 밀접한 관련이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청도와 경주의 토성에 金氏가 나오는데, 이것으로 보아 확인할 수는 없지만 김사미는 무신정권을 계기로 중앙권력에서 소외된 인물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따라서 그는 정치적 야욕을 지니고 있었으리라 보여지는데, 이같은 점이 이의민과 내통할 수 있는 근거로 작용했을 것 같다. 반면 효심은 姓이 없는 인물로 추측하건대 농민이나 천민출신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연합했다고는 하나 사실은 김사미가 주도권을 장악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주도권 쟁탈이라는 내분과 더불어, 김사미의 이의민과의 제휴라는 결정적인 사건으로 인해 그들의 연합이 깨어지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한편 金光植은<雲門寺와 金沙彌亂>(≪韓國學報≫54, 1989)에서 김사미의 이름으로 추론하여, 그를 운문사의 在家僧이며 청도지방의 재지세력으로 보았다. 다른 하나는 이의민이 당시 최고 권력자의 위치에 있었던 만큼 반민들과 내통했다는 사실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여, 위의 글은 최충헌이 자신의 쿠데타를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꾸민 사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176) 金塘澤,<李義旼 政權의 性格>(≪歷史學報≫83, 1979), 38쪽.
金晧東,<高麗 武臣政權下에서 慶州民의 動態와 新羅復興運動>(≪民族文化論叢≫2·3, 1982), 256∼257쪽.
위의 두 견해는 모두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으나, 원칙적으로≪고려사≫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여, 이의민이 반란에 가담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하겠다.

 최충헌 이전까지의 무신정권은 이의방·정중부·경대승·이의민의 순으로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다고 하나, 이미 알고 있듯이 최충헌처럼 한 사람이 독점적으로 권력을 모두 장악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이의민이 정권을 잡았을 때에는, 국왕이 그를 불러 중용했으므로 왕을 무시할 수 없었을 만큼 왕권도 어느 정도 회복되어 있었고 杜景升의 세력도 또한 만만치 않았다. 두경승은 무신의 난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는 않았으나 김보당의 난과 서북민이 봉기했을 때 큰 공을 세워 이름을 떨쳤으며, 명종 23년에는 三韓後壁上功臣이 됨으로써 이의민에 필적할 만한 세력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두경승과 이의민은 정치권력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경쟁관계에 놓여 있었다. 다음은 두 사람의 갈등이 표면화된 내용이다.

① 두경승이 이의민과 함께 門下省에서 일을 의논하였으나 서로 견해가 같지 않았다. 이의민이 화가 나서 주먹을 휘둘러 기둥을 치면서 말하기를‘네가 무슨 功이 있기에 벼슬이 내 위에 있느냐’하였다(≪高麗史節要≫권 13, 명종 21년 12월).

② 두경승을 三韓後壁上功臣으로 삼았다. 이에 重房의 여러 장수들이 축하잔치를 베풀었는데, 술이 취하자 각기 악기를 들었다. 경승이 노래하자 守司空 鄭存實이 작은 피리를 불었다. 이의민이 화를 내어 꾸짖기를‘어찌 宰相이 마음내키는 대로 노래하고 피리를 불어 마치 광대와 같은 행동을 하느냐’하니 이에 연회를 파하고 돌아갔다(≪高麗史節要≫권 13, 명종 23년 2월).

 이 글은 두경승의 지위가 점점 높아지는 데 대한 이의민의 불편한 심기가 폭발된 내용이다. 즉 이의민이 실권을 잡고 있다고는 하나 두경승의 세력 또한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의민이 경승을 견제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명종은 이 두 사람을 비슷한 지위에 두어서 서로 경쟁하게 함으로써 왕권을 공고히 하려고 한 것 같다. 명종 21년(1191) 12월에 왕은 두경승은 判吏部事修國史로, 이의민은 判兵部事로 삼았다. 아직까지는 관직의 높고 낮음이 실권장악 여부와 관련이 깊었던 시기인 만큼, 이의민은 자신의 관직이 두경승 보다 낮은 데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더구나 경승은 무인임에도 불구하고 의종을 무자비하게 죽인 이의민과는 달리 김보당의 난 때 많은 문신들이 주륙당하는 것을 관대하게 처결하도록 조처하여 명망이 있었다.177)≪高麗史≫권 100, 列傳 13, 杜景升.

 사실 이의민은 명종 14년(1184)에 중앙에 재기용된 이후부터 자신의 관직이 두경승보다 항상 낮았으나 이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동왕 20년 이후에 와서 특히 두경승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었으니, 이 점은 그의 권력기반이 위축되고 있는 데서 오는 불안감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즉 명종 17년부터 점차 그의 인적 기반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와 더불어 행동집단 무인세대이던 曹元正·石隣은 동왕 17년에 반란죄로 처단되었고, 동왕 21년에는 白任至·朴純弼·李英扌晋이, 그리고 23년에는 崔世輔가 사망하였다. 이의민과 이해관계를 같이 하며, 비슷한 출신이었던 무인들의 잇따른 죽음은, 그의 권력기반을 약화시켜 언젠가는 권력의 중심부에서 밀려날지 모른다는 절박감을 느끼게 하였다. 이에 이의민은 정치력으로는 도저히 세력을 회복할 자신이 없었으므로 그의 경쟁자인 두경승을 제어할 획기적인 조처를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운문·초전에서 농민들이 봉기하니 이 민란에 편승해서 왕조 교체까지 시도해 보려고 하였다. 그는 자신의 권력기반을 넓히고 정권을 획득하기 위해서 신라부흥을 외쳐 고려왕조를 무너뜨리는 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의민은 김사미 등을 지원하면서 한편으로는 풍수도참설,「十八子王設」등을 퍼뜨려 정권 획득의 정당성을 적극 펴나갔다.178)≪高麗史≫권 128, 列傳 41, 叛逆 2, 李義旼.

 그러나 그가 옛신라에 대해 특별한 애착심을 가지고 있었으리라고 보여지지는 않는다. 신라와 이의민과의 관계는 그가 경주출신임을 제외한다면 그의 신분으로 보아서도 옛신라에 연연할 아무런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로운 왕조를 수립할 뜻을 가지고 있었다면, 정치권내에서 그에게 동조할 세력이 필요했으리라 짐작된다. 비록 그가 명사를 모집하여 헛된 명예를 낚았다고 하나, 아들 李至純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그의 의도에 동조한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오로지 권력 장악을 목적으로 옛신라 지역민을 자기편에 끌어들이기 위해 신라부흥을 부르짖었다고 보여진다.

 김사미·효심 등이 이끄는 운문·초전민은 관군에 대처하기 위하여 연합세력을 형성하였다. 이 때 이지순은 농민군의 지도자인 김사미를 만나 이의민의 제휴 의사를 전달하고 신라부흥을 획책하였다. 이에 김사미는 이의민의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여, 지순이 가져온 의복·양식 등에 대한 답례로서 사원과 토호에게서 탈취한 금·은·보화를 선물로 보내었다. 앞서 수 차례의 농민·천민의 봉기가 결국은 중앙정부를 이기기 못한 선례에 비추어 볼 때, 김사미로서는 이의민을 이용함으로써 농민봉기를 보다 유리하게 이끌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제 김사미·효심이 이끄는 운문·초전민의 봉기는 사원이나 토호의 가렴주구를 이기지 못하여 일어난 민란에서 한걸음 더 전진하여 고려정부의 전복을 도모함으로써, 중앙정부와는 전쟁의 형태로서 대결하게 되었다.

 그러나 타도의 대상인 이의민과의 제휴가 농민군에게는 탐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보여진다. 농민들은 그가 최고의 집정자가 되었을 때, 자신과 같은 피지배층의 인물이 권력의 상층부에 올랐던 만큼 자신들을 위한 시책을 기대했으나 이의민 집권 10년 동안 아무 것도 나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경주 지역은 그의 측근들에 의해 수탈이 더욱 강화되고 있었다. 그리고 경상도 농민들이 신라의 부흥을 열망했으리라고도 보여지지 않는다. 비록 20여 년 동안 수 차례의 봉기를 통하여 피지배층의 의식 수준이 향상되었다고는 하나 고려정부를 부정하고 타파할 정도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다고 생각된다. 신라부흥에 대한 열망은 단지 이의민과 반민 지도부의 견해에 불과했는데, 이의민과의 제휴 사실이 알려지자 반민들 내부에 갈등이 일어나게 된 것 같다. 이같은 사실은 후일 김사미가 정부군에 패하여 항복하면서도 무려 7,000명 이상의 농민군을 거느리고 있는 효심에게 구원을 요청하지 않았던 사실에서 확인된다.

 한편 농민들을 진압하기 위해 관군을 이끌고 남하한 대장군 全存傑은 농민군에게 번번이 패배하여 더 이상 진격할 수가 없었다. 그는 정부군이 패배한 이유는 이지순이 반민과 내통하여 군사상의 기밀을 누설한 탓으로 생각하고, 반민을 진압시키지 못한 책임으로 번민하다가 基陽縣에서 자결하였다. 기양은 지금의 예천으로서 현종 때 안동군에 예속되었다가 명종 2년에 현으로 승격된 지역이다. 관군의 총대장인 전존걸이 경주에 있지 않고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경상도 지역을 농민군이 장악하여, 이곳을 기점으로 관군과 남북으로 경계가 설정되어 있었음을 말해 준다. 전존걸의 죽음은 관군 내부에 불안감을 가져와 사기는 극도로 저하되었다. 그 해 8월, 李公靖·金慶夫는 전열을 수습하여 반민과 싸웠으나 다시 패배하였다. 이 사실이 중앙에 알려지자 정부는 지리멸렬해진 군대의 쇄신과 이지순을 토벌군에서 제외시키기 위해 지휘부를 전격 교체하였다. 즉 그 해 11월에 대장군 崔仁을 南路捉賊兵馬使로 삼고 대장군 高湧之를 都知兵馬事로 삼아 장군 金存仁·史良柱·白富公·陳光卿을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게 하였다.

 이같은 정부의 결정에 대해 이의민은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그가 반민과 결탁했다는 소문이 전존걸의 죽음을 계기로 중앙에 알려지자, 왕을 비롯하여 문신, 심지어는 무신들까지 그를 의심하고 배격하고자 하는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고 판단된다. 요컨대 고려는 신분제사회인데, 비록 무신정권 이후 신분제가 흔들리고 있다고는 하나, 아버지는 소금장수였고 어머니는 사원 노비인 이의민이 왕의 지위까지 넘보는 것은 무신들도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점이 후일 최충헌이 이의민을 죽이고 독재체제를 수립했을때 왕실만은 온존시킨 까닭이었다고 생각된다.

 명종 23년(1193) 11월 중앙에서 파견된 관군은 세 부대로 나누어 반민들과 싸웠다. 즉 남로착적병마사 겸 좌도병마사인 최인은 강릉으로 나아갔으며 우도병마사 사량주는 운문의 반민들과 싸웠고, 남로병마사 고용지는 효심 등의 반민들과 밀양에서 대치하였다. 다음 내용은 각 지역에서 정부군과 대항하여 싸운 농민군의 활동 상황을 적은 것이다.

① 좌도병마사 崔仁이 정예병 수천 명을 이끌고 적을 치기 위해 江陵城에 도착하여 복병을 하고 기다렸다. 적이 이르러서 한 여자를 잡아 물어 보기를, ‘兵馬使가 어디에 있느냐’하니 여자가 성중에 있다고 대답하였다. 적이 놀라 물러가니 복병을 내어 추격하여 150급을 베었다(≪高麗史≫권 20, 世家 20, 명종 24년 2월 경신).

② 남적의 우두머리인 김사미가 스스로 行營에 투항하여 항복을 청하니 목을 베었다(≪高麗史≫권 20, 世家 20, 명종 24년 2월 계사).

③ 장군 사량주가 남적과 싸웠으나 패하여 죽임을 당하였다(≪高麗史≫권 20, 世家 20, 명종 24년 2월 갑인).

④ 남로병마사가 密城 楮田村의 적을 공격하여 7,000여 급을 베었고 器械·牛馬도 이 정도의 수를 획득하였다(≪高麗史≫권 20, 世家 20, 명종 24년 4월 무술).

⑤ 우도병마사가 적을 공격하여 40급을 잡아 목베었고, 또 3일 동안 계속 싸워서 패배시켰다(위와 같음).

⑥ 남적의 우두머리가 그 무리 李純 등 4명을 궁궐에 보내어 항복을 청하니, 이순 등에게 隊正을 내리고 베를 주어 돌려 보냈다 하였다(≪高麗史≫권 20, 世家 20, 명종 24년 8월 정유).

⑦ 남로병마사가 적의 처자 350여 명을 붙잡아 얼굴에 入墨하여 서해도에 유배시켰다가 여러 성의 노비로 삼게 하였다(≪高麗史≫권 20, 世家 20, 명종 24년 10월 정유).

⑧ 남로병마사가 적의 우두머리 효심을 사로잡았다(≪高麗史≫권 20, 世家 20, 명종 24년 12월 계해).

 위의 사료에서 나타난 사실 가운데 중요한 점은 김사미·효심 등이 경주의 외곽지대에서 봉기했을 때, 위치상으로는 도저히 연합전선이 어려운 溟州民도 호응했다는 점이다. 이로써 운문·초전민이 한때는 경상도 전 지역을 차지하였을 정도로 세력을 확장하여, 북으로는 동해안으로 이어지는 강원도 전역이 농민봉기의 와중에 휩싸인 것으로 판단된다.

 중앙에서는 남적을 진압하기 위해 보낸 군대 중 전군을 통솔하는 임무를 맡은 상장군 최인을 강릉에 파견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명주 농민군의 세력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사료에 나타난 바로는 관군이 우세한 것 같지만, 사실은 반민들의 세력에 눌려 소강상태를 유지하다가 겨우 150여 명 정도만 사살하고 퇴각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명주 주민들이 정부군의 동태를 반민들에게 알려줌으로써 효율적인 공격을 할 수 없었던 데에서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최인이 스스로 퇴각하여 한번도 싸우지 않고 시간만 지체했다고 하여 파면된 사실에서도 농민군의 강대함을 알 수 있다.179)≪高麗史節要≫권 13, 명종 24년 윤10월. 명주는 강원도 내에서는 원주와 더불어 비교적 기름진 농토가 많았으며 또한 사원령이 있었음을 다음의 기록에서 알 수 있다.

옛날 신라시대에 世達寺의 莊舍가 溟州 捺李郡에 있었는데 本寺에서 승려 調信을 보내어 知莊으로 삼았다(≪三國遺事≫권 3, 塔像 4, 洛山二大聖 調信).

 명주는 신라시대 이래 동해안의 웅부로서 정치·군사적인 요충지인 동시에 五臺山을 중심으로 한 신라불교의 성지이기도 하였다. 신라 하대에 와서 중앙에서 진골 귀족간의 왕권쟁탈전이 심해지니 중앙의 귀족들 중에는 지방으로 이주하는 자가 늘어났다. 이곳은 金周元이 元聖王과의 왕위 경쟁에서 밀려나 정착하면서부터 경주 다음 가는 정치·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더욱이 신라 말 禪宗이 번성하면서 寧越 興寧寺를 중심으로 한 獅子山派와 명주 오대산 굴산사를 중심으로 하는 闍堀山派가 성립되었는데, 이들 사원은 많은 토지를 소유하여 주위의 토호와 농민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180) 崔柄憲,<新羅下代 禪宗九山派의 成立>(≪韓國史硏究≫7, 1972), 105쪽.
鄭永鎬,<新羅獅子山興寧寺址硏究>(≪白山學報≫7, 1969), 52∼56쪽.
그리고 고려 후기에 曹溪宗을 발전시킨 普照國師 知訥도 사굴산파에서 나온 인물이었다. 이로 보아 선종이 敎宗에 밀려 위축되기는 했지만 고려 후기에 다시 대두하게 될 기반이 유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사원은 대토지를 관리하기 위해서 知莊을 파견하였으니, 앞서의 세달사도 강릉에 있는 토지를 관리하기 위해 調信을 보내었다. 따라서 명주지역의 봉기 역시 사원의 전호나 소작농이 주축이 되어 일으켰다고 보여진다. 그들은 명주에서 난을 일으켜 점차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운문·초전민과 제휴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리라 생각된다. 정부에서 군대를 파견할 때 운문·초전민과 명주의 반민들을 동일선상에서 파악하여 진압시키도록 명한 것으로 보아, 그들이 일정한 연계성을 지니고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관군의 공격에 밀린 김사미의 항복으로 경상도 전역에 걸쳐 광범위한 세력을 자랑하던 반민들의 영역은 축소되었다. 효심은 원래 자신의 근거지였던 밀양으로 후퇴하였고 운문의 농민군은 운문산을 배경으로 정부군과 싸웠다. 비록 세력이 약화되기는 했지만 운문의 농민군이 장군 사량주가 이끄는 군대를 타파함으로써 아직은 건재함을 보여준다. 김사미가 죽은 다음 반민들의 주력부대는 효심이 이끄는 농민군이었다. 그들은 밀양을 거점으로 삼아 정부군에 대항하였는데, 이곳 저전촌에서 무려 7,000명이나 죽임을 당하고 무기·우마도 그만큼 잃어버리는 엄청난 참패를 당하였다. 이같은 패배 의 원인은 운문의 반란세력이 김사미의 죽음으로 약화되어 초전민은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정부의 주력부대와 대치했다는 점과 때는 4월로 농사철이었기 때문에 농민들의 내부적인 동요가 원인이었다고 생각된다. 초전민은 엄청난 참패를 당하여 거의 전멸상태에 이르게 되자, 더 이상 관군에 대항할 의욕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항복했을 때 정부측의 보복을 두려워한 효심은 이순 등 네 명을 선정하여 바로 중앙에 보내어 국왕의 선처를 간청하게 했다. 정부는 이들에게 대정이라는 관직을 내리고 포를 하사하여 회유하였다. 그리고는 이들의 전력이 약화된 틈을 이용하여 초전민의 소탕작전에 나서서 봉기에 가담한 적이 없는 여자나 어린아이까지 잡아서 자자하고 노비로 삼았다. 정부의 기만책에 분개한 초전민은 다시 봉기하였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기울어져서 패배하고 효심은 사로잡히게 되었다. 이제 살아남은 반민들은 다시 운문산으로 숨어들었고, 명주민은 태백산으로 들어가서 후일을 기약하게 되었다. 이로써 1년 반이나 계속되었던 김사미·효심으로 대표되는 운문·초전민의 봉기는 일단락짓게 되었다.

 봉기가 진압된 후 명종은 경주지방 농민들에 대한 회유책과 한편으로는 다른 지방의 소요를 사전에 방지한다는 의미에서 여러 시책을 강구하였다. 즉 여러 도에 안찰사를 보내어서 吏屬의 가렴주구를 살피게 하였고,181)≪高麗史節要≫권 13, 명종 25년 3월. 미납된 조세를 면제시켜 부채를 탕감해 주었다.182)≪高麗史節要≫권 13, 명종 25년 9월. 그러나 이같은 조처들은 미봉책에 불과할 뿐 농민봉기를 막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운문·초전민의 봉기가 진압된 지 5년도 못되어 경주를 중심으로 다시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다.

 한편 약해져 가는 자신의 세력을 만회시키기 위해 농민봉기를 이용하려 했던 이의민은, 이들이 실패하자 점차 중앙 권력층에서 배척당하기 시작했다. 그의 양면적인 태도는 반이의민세력의 대두를 가속화시켜 그로부터 채 2년이 되지 못하여 최충헌에게 정치권력을 빼앗기게 되었으니, 농민봉기가 지배층의 교체까지도 초래하였던 것이다.

 운문·초전민의 봉기는 비록 실패했지만 초기 단계의 단순한 지엽적인 봉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계획적이고 주변 농민들과 연합투쟁을 벌이는 단계로 승격되어, 이제는 정부와 맞설 수 있는 저력까지 지니게 되었다는 점에서 고려 농민봉기의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농민지도부의 역량 부족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적절하게 제시하지 못했고, 또한 집권층과의 제휴 여부의 갈등으로 농민군 내부에 분열이 생겨 끈질기게 저항하지 못하고 정부군에 의해 궤멸되고 말았다.

<李貞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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