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례탑이 전사함으로써 고려에 대한 2차 침략이 실패로 돌아간 이듬해 고종 20년(1233) 5월, 몽고는 드디어 금의 수도 변경을 함락하였다. 그리고 9월 皇子 貴由(뒤의 定宗), 諸王 按赤帶 등이 지휘하는 몽고군은 동진의 수도 남경성을 함락하고 포선만노를 사로잡음으로써 이를 멸망시켰다. 이어 이듬해 2월, 수도로부터 도피하였던 금의 哀宗이 자살함으로써 금나라 역시 멸망하였다. 이렇게 하여 몽고는 동방정략을 성공적으로 진척시켜 나가게 된다.
고종 21년 금을 멸망시킨 몽고는 가을, 향후의 정벌계획을 새로 수립하였고 사전계획에 따라 이듬해 정복작전을 재개하였다. 그리하여 拔都·貴由 등이 유럽 여러 나라에, 皇子 氵闊端·曲出 등이 남송 정벌에 파견되었다. 고려에 대한 침략도 이 때 다시 추진되었는데 고종 22년 唐古에 의한 제3차 침입이 그것이다. 3차 침략의 몽고 사령관인 당고는 1차 침략 당시 살례탑의 휘하로 고려 침략전쟁에 참여, 개경을 포위하였던 3원수 중의 한 사람이다. 또한≪원사≫에 의하면 移刺買奴·王榮祖·吾也而 등 역시 1차 침략 때 종군했던 장군들이 당고를 수행하였고 고려의 부몽분자인 洪福源이 그들의 향도가 되었다.
고종 22년 윤7월 몽고의 침략이 개시되자 강도정부는 즉각 5군을 편성, 강화의 연안방어에 주력하게 하고 아울러 가까운 廣州·南京民을 강화에 합하게 함으로써 강도의 방어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몽고와는 정면 대결을 회피, 2차 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중앙군을 대몽전선에 투입시키지는 않았다. 이 3차 전쟁에 대한 기록은 2차의 경우처럼 역시 소략하지만 고종 22년부터 26년에 이르기까지 5년이란 장기간에 걸쳐 계속되었다.
몽고의 3차 침략은 처음 安北府를 비롯한 북계의 여러 성에 대한 공격으로부터 시작되었고 다음 8월에는 龍岡·咸從·三登 등의 성이 함락되었다. 이와 동시에 몽고는 9월 다른 한 부대를 동진국의 옛땅으로부터 출발시켰다. 그리하여 이들은 복속한 동진지역의 군사를 앞세워 함남 덕원 부근의 龍津鎭·鎭溟城 등을 각각 공략하면서 동계 일대의 방어진지를 아울러 공격했던 것이다. 이같은 몽고의 동서 양면 공격은 이전에 없었던 일로서 동진정벌 이후 몽고군이 그 군사력을 징발, 투입한 부대였음에 틀림없다.
윤7월 북계지역에 내침한 몽고군은 대동강 이북지역 점거 이후, 서해도 지역을 차례로 공략하였다. 서해도에서 몽병의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몽고군의 제1대는 경상도의 안동·해평 등지에 출현하였고 경주방면으로도 진출하고 있었다.
몽고군의 경상도 침입에 대응하여 정부에서는 9월 상장군 金利生을 東南道指揮使로, 그리고 충청주도 안찰사 庾碩을 부사로 삼아 현지에 내려보냈다. 경상도지역의 방비와 도민에 대한 제반 지휘책임을 맡게된 김이생과 유석은 그 해 경주 남쪽의 通度寺(경남 양산군)에 들러 석가의 眞身舍利에 예배하고자 하였는데253)≪三國遺事≫권 3, 塔像, 前後所將舍利. 이로써 볼 때 당시 몽고군의 침략이 경주 인근, 경상도 내륙 깊숙한 곳에까지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몽고군이 경상도지역까지 압박했던 고종 22년 9월 강화도 정부는 병란으로 인한 민심의 동요를 진정시키는 방편으로 流刑 이하의 죄를 사면시키고 귀양간 자를 옮기고, 아울러 고종 20년 이래 체납된 貢賦의 면제를 내용으로 하는 민생책을 제시하기도 했다.254)≪高麗史≫권 23, 世家 23, 고종 22년 9월 및 권 80, 志 34, 食貨 3, 災免之制. 병란이 더욱 확대된 동 12월 집정자 최우는 강도에 대한 방어설비를 더욱 강화시킨다. 그리하여 주현으로부터 1품군을 징발, 강화 연안의 堤岸을 더 축조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던 것이다. 10월 서해도 각처에서의 군사작전의 진행을 고려할 때 강도정부는 몽고군의 강도에로의 직접 공격을 크게 우려하였음이 분명하다.
이규보가 고종 22년 말, 최씨의 강화 천도를 칭송하면서“천만의 胡騎가 새처럼 난다 해도, 지척의 푸른 물을 건너지는 못하리라”고 하여255) 李奎報,≪東國李相國集≫권 18, 望海因追慶遷都. 강도의 견고함을 애써 강조한 것도 몽고군의 위협이 피부에 와 닿았던 이러한 상황에서의 일이었다. 이들 몽고군은 동년 말 압록강 이북으로 일단 철수하였던 것 같다.
이무렵 몽고군의 위협하에 있던 고려에서는 국가의 안녕을 희구하는 불교적 기원이 각처에서 성행하였다. 몽고의 3차 침략이 개시될 무렵 고종 22년과 동 23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몇몇 불화(五百羅漢圖)에는「國土太平」운운의 기원문이 적혀 있고, 특히 몽고군이 남부지역까지 횡행하던 22년 10월에 제작된 羅漢圖(上偶尊者)에는「隣兵速滅」을 기원하고 있다.256) 李基白,≪韓國上代古文書資料集成≫(一志社, 1987), 67∼71쪽. 외적의 침략에 대해 불력을 의지하고자 했던 이러한 정신은 팔만대장경 조판이라는 대규모 사업으로 확장되었던 것이다.
몽고의 3차 침략 2년째인 고종 23년(1236) 6월에 이르러 몽고병은 다시 압록강을 건너 대거 고려에 내침하였는데 이들은 보다 증원된 부대였다. 당시 몽고군은 6월 한달 사이에 북계의 여러 지역을 점거하면서 서해도까지 내침해 왔다.
7, 8월 몽고군은 저항하는 북계의 慈州 등의 여러 성을 공략하는 한편 강원 지역에 동진군을 동원, 공격하였으며 8월 말에는 경기·충청지방까지 진출하였다. 이어 9월에는 竹州(안성군)·溫水(온양) 등지에서, 다음 10월에는 전라도 전주 등지까지 내려와 扶寧(부안)·公州·大興(예산) 등 여러 지역에서 전투를 하였다. 지금까지 몽고군의 침략경로는 모두 서북지역으로부터 남하하여 경상도 방면을 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종 23년, 3차 침략의 제2년째 몽고는 그 진로를 달리하여 충청지역을 거쳐 전라도 방면으로 처음 진입했던 것이다.
이후 몽고군의 구략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추이에 대해서 약간의 상정을 해 본다면, 이들은 대체로 오늘의 전북지방에까지 진출한 이후 더 이상 내려가지 않고 다음해 초에 일단 철수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몽고군이 더 이상 남진하기 어려웠던 것은 당시의 전선이 너무 길게 그리고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즉 경기·충청·전북지역의 각처에서 고려의 끈질긴 유격전에 시달렸을 뿐 아니라 상당히 늦게까지 북계 지역에서 전투가 이어졌던 상황을 고려하면 당시 몽고의 전선은 매우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무렵 강도의 고려정부는 집권자 최씨의 후원 아래 유명한 팔만대장경 각판사업을 시작하였다. 전시인 고종 23년부터 38년에 이르는 16년간 추진한 이 작업은 무엇보다도 전쟁의 종식을 희구하는 당시의 열망을 반영하고 있거니와, 몽고군의 3차 침략으로 인한 참담한 본토의 상황과 향후의 사태에 대한 깊은 우려가 작업 추진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몽고군은 고종 25년 다시 대거 침입해 왔는데, 당시 사정에 대하여≪고려사≫에서는“몽고병이 東京에 이르러 황룡사탑을 불태웠다”라고 함으로써 이 때 몽고군이 경상도의 내륙 깊숙이 경주 지방에까지 이르렀던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황룡사탑의 소실은 거찰 황룡사 전체의 소실을 의미하는 것이며 동시에 경주지역에 대한 혹심한 유린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동국이상국집≫에 실린 이규보의 시를 참조하면 고종 25년도의 몽고군은 대략 8월 하순에 개경에 진입하였으며 9월 초에는 강화의 맞은편에 출현하여 강도를 위협하는 무력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어 군사를 남부 지역으로 진출시키면서 가혹한 구략으로 강도정부를 굴복시키려는 종래의 일반적 전략을 되풀이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일시 강도를 위협한 몽고군은 주력을 경상도 방면으로 투입시켜 대략 그 해 11월경 경주에까지 들어가 철저한 파괴적 구략을 일삼았으며, 황룡사 또한 그 와중에 적에게 파괴 소실되었던 것이었다.257) 몽고군에 의한 황룡사탑의 소실 시기에 대하여≪高麗史≫에는 고종 25년 윤4월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李奎報의≪東國李相國集≫과 一然의≪三國遺事≫등의 기록을 종합해 볼 때 윤4월이 아닌「冬月」(10∼12월)의 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수년간 계속된 몽고의 침략전쟁으로 고려의 전토는 황폐되고, 민생은 극심한 곤란에 처하여 속수무책이던 강도정부는 마침내 고종 25년 12월, 사신을 몽고에 파견하여 침략군의 철수를 요청하였다. 당시 몽고에 보낸 表狀 가운데 몽고의 장기침략으로 인한 고려의 사정을“백성은 땅에 정착함이 없고 농사는 때에 거두지 못하니 이처럼 풀만 무성한 토지에서 무엇이 생산되겠습니까”258)≪高麗史≫권 23, 世家 23, 고종 25년 12월.라고 묘사하고 있다. 당시 趙玄習·李元祐·李君式 등을 비롯한 대규모 투항민이 발생한 것도 이러한 경제적 피폐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몽고의 제3차 침략은, 수년 전 고려로부터 당한 패배를 보복하며 아울러 고려를 완전히 제압할 목적으로 대대적인 군사적 공세를 가한 것이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고려의 上表를 계기로 철수하였다. 이후 당분간 양국은 외교적 통로를 이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일시적 합의를 보았지만 결과적으로 전쟁은 매우 장기적인 양상으로 전환되어 갔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