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1. 몽고 침입에 대한 항쟁
  • 2) 몽고의 고려 침입
  • (4) 여·몽전쟁의 장기화
  • 나. 몽고의 5차 침입

나. 몽고의 5차 침입

 고종 36년(1249) 강화천도의 장본인이었던 최우가 사망하고 이어 고려측이 출륙의 기미를 보이자, 몽고는 이러한 고려의 변화에 기대를 걸고 그 사실성 여부를 확인하는 한편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다시 사신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집정자 崔沆은 지금까지의 고려의 대몽책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그리하여 집권 이듬해에 강도의 中城을 새로 구축, 방어체제를 오히려 강화하였을 뿐 아니라, 고종 38년에는 집정자 최씨의 후원에 의해 고종 23년부터 시작되었던 팔만대장경의 판각작업이 드디어 완성을 보는 등 몽고에 대한 대항체제를 정비하여 나갔던 것이다.

 한편 이 무렵 고종 38년 7월에 개최된 쿠릴타이에서는 蒙哥〔몽케〕가 황제에 선임되었는데 몽케 즉 헌종은 즉위 즉시 고려에 사신을 파견, 고종의 친조와 개경에의 환도를 촉구하였다. 이듬해 7월 고려에 온 多可·阿土 등의 사신을 통해 고려측의 반응 여하에 따라 즉시 고려를 정벌하겠다는 뜻을 전하였다.

 也窟에 의한 몽고의 5차 고려 침입이 개시된 것은 고종 40년(1253) 7월의 일이다. 몽고군의 압록강 도강, 내침에 대하여 본토 주민을 산성 혹은 연안의 섬으로 들어가도록 하는 즉각적인 조치가 취해졌다. 야굴은 4차 침략을 지휘했던 아모간과 홍복원을 5차 침략에 대동하였다. 따라서 5차 침략군의 주력부대는 4차 침략을 담당했던 아모간·홍복원 휘하의 병력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5차 침략의 몽고군은 고종 40년 7월부터 침공을 개시, 이듬해 정월 일단 철수하였다. 당시 몽고군의 내침 경로는 압록강을 건너 서해도로 남하한 종래의 경우와 동해안을 따라 진입하는 양면 작전이었다.

 야굴의 몽고군은 서경 및 土山(平南 祥原)을 거쳐 남하하던 중 8월 防護別監 權世侯가 입보민을 지휘하던 서해도 椋山城(安岳?)을 함락, 철저하게 성을 유린하였다. 이들은 개경 방면으로 남하하는 길을 취하지 않고 서해도에서 내륙의 길로 들어서, 중부 내륙의 요충인 東州(철원) 지역에 이르렀다.

 이 때 동주산성에는 인근의 금화·금성 등의 이민까지 다수가 입보하여 방호별감 白敦明의 지휘하에 대항하였으나 산성은 곧 함락되고 말았다. 몽고군은 이어 春州(춘천)에서 고려의 강력한 저항을 제압하고 9월 하순 성을 함락시켰다. 춘주성은 안찰사 朴天器의 지휘로 1차 침략 때의 鐵州城전투를 방불케 하는 비장한 싸움을 전개하였다. 춘주성을 점거, 처참한 도륙을 자행했던 몽고군은 이어 楊根城(양평군)을 점령하고 원주를 공격했으나 방호별감 鄭至麟에 의해 좌절되었다.

 한편 松柱가 지휘하는 몽고부대가 동북 변경에 출현, 高州·和州 등지에 이른 것은 8월 중순의 일이다. 이들은 다음달 동계의 거점인 登州(안변)를 포위 공격하였으나 고려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진로를 바꿔 10월 襄州(양양)를 함락하였는데 당시 고려인들은 인근의 설악산과 같은 험준한 산속으로 피난하거나, 산성을 중심으로 몽고군에 저항하였다.

 몽고군은 전쟁의 과정에서 홍복원과 李峴 등 고려의 부몽분자 즉, 항복한 고려 吏民들을 최대한 이용하였다. 그들로 하여금 향도적 역할뿐 아니라 고려의 여러 성들에 대한 항복을 유도하거나 고려군사의 사기를 꺾었으며 동시에 이들을 식량확보에 이용하는 등 매우 교묘한 수법으로 전쟁을 이끌었다. 天龍山城도 이러한 몽고군의 수법이 주효하여, 방호별감 趙邦彦, 黃驪縣令 鄭臣旦 등 지휘자들이 出降하였다. 따라서 야굴의 몽고군이 충주에 이르렀을 때는 적지 않은 부몽분자와 고려인이 동원되었던 셈이다.

 동주·충주·양근성·천룡성을 함락시키고 남하한 야굴의 몽고군이 충주에 당도한 것은 대략 10월 10일경의 일이었다. 몽고군은 이후 영남지역으로 남하하기 위한 전초 단계로서 충주산성을 포위, 집중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야굴이 지휘하는 몽고군의 집중공격에도 불구하고 다시 방호별감 김윤후에 의해 지휘된 충주민은 70여 일간 성을 사수함으로써 몽고군의 남진을 저지하였다. 이리하여 먼저 야굴의 몽고군이 기병 1천 명만을 데리고 철수하고 이어 12월 중순에는 몽고군이 충주성의 공격을 포기하고 물러났다. 충주산성 攻城 도중 야굴이 먼저 철수하게 된 이유는 몽고 지휘부 내에서 발생한 갈등으로 야굴이 소환령을 받게 된 때문인데 이러한 갈등은 몽고군의 고려 정략이 일정한 한계에 이르면서 야기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로 인하여 5차 침략군은 이듬해 고종 41년 정월 고려에서 철수하였다. 그러나 車羅大로 지휘관을 바꾼 몽고군은 재침을 단행하여 전쟁은 고종 41년부터 6년간 다시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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