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1. 몽고 침입에 대한 항쟁
  • 2) 몽고의 고려 침입
  • (4) 여·몽전쟁의 장기화
  • 다. 몽고의 6차 침입

다. 몽고의 6차 침입

 몽고의 차라대는 휘하의 余速禿·甫波大 등과 함께 영녕공 준 및 홍복원 등을 대동, 고종 41년 7월 고려에 내침하였다. 이들 몽고군 주력이 충주에 이른 것은 9월 중순이었는데 개경에서 충주까지의 경로는 양평군·여주군·이천군·안성군의 경기지역을 돌아 음성군을 거쳐 충주에 이른 것으로 짐작된다. 이것은 대체로 한강을 우회, 내륙을 종단하는 노선이다.

 경기 동부지역을 종단하여 충청도에 침입하였던 몽고군은 같은 해 8월 하순 무렵 鎭州(鎭川)에서 吏族 林衍에 의해 지휘된 주민들에 의하여 격퇴 당하였다. 그리고 충주 서쪽의 多仁鐵所에 침입한 몽고군도 소민들의 항전에 의해 역시 퇴각하고 말았다.

 車羅大는 9월 중순 본군을 이끌고 충주산성을 공격하였으나, 고려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공략을 포기한 채 경상도 지경으로 넘어갔다. 10월 尙州山城에서 다시 黃嶺寺 승려 洪之의 공격에 대패하였으나 몽고군은 대구지방을 거쳐 남진을 계속, 대략 12월 초에는 丹溪縣(山淸郡)을 거쳐 진주 부근에까지 내려갔다. 몽고군이 경상도 내륙의 길을 따라 남진, 경상도 남단 지역까지 이른 것은 아마 이것이 최초의 일이었을 것이다.

 몽고의 침략에 대항하여 고려는 충주·상주 등 각처에서 용감히 싸웠지만 전쟁의 피해는 대단히 심각하였다. 몽고군이 경상도에 진입한 고종 41년 10월, 정부에서 태묘에 祈告한 글에 의하면“백성은 힘이 궁하여 죽은 자는 해골을 묻지 못하며 살아남은 자는 노예가 되어 부자가 서로 의지하지 못하고 처자가 서로 보존하지 못한다”고 하였고, 당시≪고려사≫기록은 고종 41년 한 해 동안 몽고군에게 포로된 자가 206,800여 명, 살륙된 자는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한다. 이렇듯 몽고군이 지나는 곳마다 잿더미가 되는 최대의 전화였다. 이듬해 2월 하순에 이르러 개경 인근 지역으로부터 몽고군은 철수하였지만 상당수의 몽고군은 여전히 압록강 부근에 주둔하여 재공격을 대기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차라대 몽고군의 재침략이 개시되는 시기는 고종 42년 8월이었다. 몽고의 척후병이 강화 북쪽 맞은 편인 승천부에까지 이르자 강도에는 계엄이 선포되었다.

 이후 몽고군은 10월 초 영·호남의 경계지점인 대원령에서 충주군의 유격에 의해 큰 타격을 받으면서 경상도로 나아갔는데 차라대의 본군은 이듬해 고종 43년 초 전라도 방면으로 남하하였으며 이 시기는 전라도에서의 전투가 중심을 이룬다. 천안을 거쳐 남하, 3월에 영광 등지에 집결해 있던 몽고군이 정읍(혹은 長城) 笠巖山城에 입보한 고려군을 포위 공격했다가 참패한 것도 그 한 예이다. 이들이 북으로 철수하는 것은 9월 하순 이후였으므로 8월부터 개시된 군사 행동이 다음해 10월까지 연이어짐으로써 무려 1년 이상을 지속한 셈이다.

 차라대의 재침략은 전쟁의 기간이 길었다는 점에서 특징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몽고군의 전략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종래 본토 내륙에 대한 攻城戰만을 주로 하던 몽고군이 적극적으로 해안의 섬에 대하여 침공을 시도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고려의 해도 입보책에 대한 몽고군의 대응이라 할 수 있는데 특히, 차라대가 전라도지역에서 군사행동을 전개하는 동안 그 서해안지역에서 적극적으로 시도되었다.

 고종 44년(1257) 윤4월, 권신 최항이 사망하고 아들 崔竩가 집권하였으나 대몽정책의 태도는 변하지 않아 종래의 강경한 반몽정책이 계속 견지되었다. 그러나 최의정권이 갖는 권력의 취약성은 대몽 항전에서 하나의 변수로 남게 된다.

 북계지역에서 몽고군이 다시 침입하는 것은 고종 44년 5월의 일인데 이는 차라대에 의한 3차 침구가 된다. 이 때 몽고군은 몇 대로 나누어 남진하였는 바 선발부대는 甫波大에 의해 지휘되어 6월 초 개경을 거쳐 빠른 속도로 남진하였다. 뒤이어 그의 군사는 대략 7월 하순 이후, 강도에서 가까운 경기 일대를 구략함으로써 강도정부에 대한 압력을 강화하였다. 이 과정에서 몽고군사는 강도에서 멀지 않은 경기 서해도 연안의 도서에 대한 침공을 감행, 강도정부의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이러한 해도 침공전략은 고종 43년에 있었던 호서 연안 및 전라도 해안지역에서의 빈번한 해도 침공작전의 연속적 성격을 가지는 것이다. 이리하여 고종 44년에 이르러 이들은 보다 강화도에 가까운 경기·서해도 연안에서 이를 시도함으로써 전략적 효과를 증대시켰다.

 몽고가 다시 침입하자 강도정부는 매우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게 되는데, 곧 적진에 사신을 파견, 몽고군의 철수를 종용하였으며, 8월 초 몽고군이 철수하는 대로 태자를 입조시키겠다는 약속을 전달하였다. 이러한 화의의 진전에 따라 8월을 전후하여 차라대는 경기·서해도의 강도 주변지역에서의 군사활동을 억제시키는 조치를 취하고 사태를 관망하던 중 철군을 지시하는 황제의 명에 따라 10월에 고려로부터 철수하였다.

 이 시기의 몽고침략은 비교적 제한된 병력만이 남부지역에 투입되었고, 몽고군의 군사행동도 강도를 중심으로 한 경기·서해도지역에 집중되었다. 이는 강도정부의 굴복을 촉구하는 새로운 무력적 위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기간 중 주목되는 변화의 하나는 몽고와의 화의론을 주장하는 세력이 대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종 44년 7월 당시 왕자를 파견하여 몽고의 요구에 응하자는 화의론이 고위 관리들의 공식적 의견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이것이 고종에 의하여 거부되자 다시 崔滋와 金寶鼎이「力請」함으로써 마침내 방침을 확정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대몽화의론의 전개과정이었다는 것은 그 대표 인물인 최자와 김보정이 그 후 개경환도와 몽고에 대한「出降」을 공식적으로 발의하고 있는 것에 의해서도 입증된다.

 강도정부는 태자의 입조를 조건으로 일단 몽고군을 철수시키는 데 성공하였지만 이에 대한 이행은 지연되고 있었다. 같은 해 12월 고려는 좌복야 崔永과 함께 고종 40년에 이미 입조의 경험이 있던 왕자 安慶公 淐을 몽고에 파견한다. 이는 태자의 입조에 대신하는 절충책이라 하겠는데 이것은 몽고를 만족시키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이듬해 고종 45년(1258) 6월 몽고 차라대의 침략이 다시 되풀이된다.

 그는 개경에 주둔하면서 군사를 강화도 연안의 여러 지역인 昇天府·交河(파주군)·峯城(파주)·守安(통진)·童城(김포)에 보내 약탈함으로써 강도를 위협하는 한편, 태자의 출륙을 철군조건으로 다시 제시하였다.

 고종 45년 몽고군의 군사작전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적당한 선에서의 화의 타결로 고려를 복속시키려는 의도에서, 강화도 연안을 중심으로 경기 및 서해도지역에 집중되었던 것 같다. 여기에 11월부터는 散吉大王 등이 거느리는 몽고군이 동진군을 동원, 溟州(강릉) 지경까지 남침하여 마침내는 동북면의 방어체계가 와해되는 처지에 직면하게 되었다. 고종 45년 12월 龍津人 趙暉, 定州人 卓靑 등의 叛附事件을 계기로 동계의 화주 이북 15주가 이탈, 소위 雙城總管府의 성립을 본 것이 그것이다. 이같은 배경하에 고종 46년 초부터 태자 입조를 조건으로 하는 몽고군의 철군은 다시 논의되기 시작한다.

 고려정부는 고종 45년 12월 장군 朴希實 등을 몽고에 파견하였는데 이들은 도중 차라대의 둔소에도 들러 고려 태자의 입조를 약속했던 것 같다. 이러한 화의의 진전에 따라 몽고의 군사행동은 진정되어 3월 중에는 주현의 수령들로 하여금 피난민을 데리고 출륙, 농사를 짓도록 하였다. 고려의 태자 倎은 드디어 고종 46년 4월 하순에, 몽고를 향해 출발했으며 참지 정사 李世材, 추밀원부사 김보정 등 40명이 태자를 수행하였다. 이로써 여·몽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 하게 되었는데, 6월말 고려의 대몽전쟁을 줄곧 경험하였던 고종이 사망하고 곧이어 7월 몽고의 헌종 역시 남송정벌전에서 얻은 병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그리하여 고종 45년 3월 최씨정권의 붕괴 이후 4월 고려 태자의 몽고입조, 6월 강도의 내외성 파괴, 그리고 6∼7월에 걸쳐 고려 고종과 몽고 헌종의 사망이라는 일련의 연속적 사태의 발생으로 일단 고려의 대몽관계는 중요한 전환점이 마련되었다.

<尹龍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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