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고의 내침으로 최초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은 鐵州였다. 철주(평북 철산)는 압록강을 넘어 남하하는 적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요지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철주성의 전투에 대해서는≪고려사≫세가, 고종 18년 8월 임오일에“몽고 원수 살례탑이 咸新鎭(義州)을 포위하고 철주를 도륙하였다”고 간략히 기재되어 있다. 위의 기록은 몽고군의 고려 내침을 알리는 최초의 기사이다. 몽고가 다시 철주에 이른 것은 대략 8월 중순의 일이었던 것 같다.261) 山口修,<蒙古と高麗(1231) ―蒙古の第一次高麗侵攻―>(≪聖心女子大學論叢≫40, 1972). 철주에 당도한 몽고군은 포로가 된 고려의 지휘관들을 내세워 철주성의 항복을 설득하려 하였으나 철주민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몽고병은 전력을 다해 철주성에 맹공을 퍼부었고 양군의 공방전은 보름 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결국 철주성은 몽고군에 의해 처참히 함락되었다.≪고려사≫의 기록에서는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몽고병이 성의 공격을 매우 급하게 하고 성중에는 양식이 다하여 능히 지키지 못하여 곧 함락될 지경이었다. 판관 李希績이 성안의 부녀와 어린아이를 모아 창고에 넣어 불을 지르고 장정들과 함께 자결하였다”고 그 상황을 전하고 있다.
철주전투가 매우 인상적이었음은 金坵의 시<過鐵州>에서 생생히 묘사되고 있다.262) 金坵,≪止浦集≫권 1. 몽고군이 갑자기 철주를 공격하자 백성들은 방어사 李元禎, 판관 이희적의 지휘하에 철주성에 들어가 보름 동안 저항하였으나 식량이 다하고 또한 구원의 길이 보이지 않자 스스로 처자들을 죽이고 자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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