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1. 몽고 침입에 대한 항쟁
  • 3) 몽고의 침략에 대한 항전
  • (1) 살례탑군에 대한 항전
  • 나. 귀주성·자주성의 승전

나. 귀주성·자주성의 승전

 고종 18년(1231) 9월 몽고군이 귀주를 공격할 때, 귀주에는 서북면병마사 朴犀를 비롯하여 인근의 북계 여러 지역 지휘관들이 집결해 있었다. 귀주는 북계 내륙의 주요 요충지이며 전략적 가치로 인하여 일찍부터 중요시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몽고군이 용주·철주 등 압록강 하안 및 해안에 가까운 간선로의 여러 성을 공격 함락시키며 남진하는 상황에 내륙의 배후에 있는 귀주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그리하여 박서는 귀주에 지휘부를 구축하였고, 인근의 삭주·태주·위주의 주진병력도 이에 합류, 방어력을 보강하였으며 아울러 정주로부터 탈출해 온 金慶孫 등도 가세하였다.

 몽고의 침략군이 처음으로 귀주에 도착, 성을 포위한 것은 침략 개시 다음달인 고종 18년 9월의 일이었다. 이후 몽고군은 12월까지 대략 4회에 걸쳐 귀주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고, 이에 따라 쌍방의 교전이 치열하였다.

 9월 초, 몽고군의 공격에 직면한 병마사 박서는 성중의 4면에 부대를 각각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성의 동서면은 삭주분도장군 金仲溫, 남면에는 정주분도장군 김경손, 그리고 안북부와 위주·태주의 별초군 250여 명이 3면으로 나누어 수비하였다. 몽고군은 먼저 귀주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한 다음 서문·남문·북문을 각각 공격하였다. 쌍방의 공방전은 1개월 동안 지속되었는데 몽고군은 귀주를 일시에 제압할 목적으로 서문·남문·북문 등을 동시에 공격하였으며 고려군도 때때로 성 밖으로 출격, 적을 패주시키기도 하였다. 이 전투에서 김경손은 뛰어난 용맹성을 발휘, 고려군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이후 공방전은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는 바 그 과정에서 몽고는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고 있었다.

몽고병이 渭州副使 朴文昌을 사로잡아 성에 들어가 항복을 권유케 하므로 박서가 이를 목베었다. 몽고가 精騎 300명을 뽑아 북문을 공격하므로 박서가 이를 쳐 물리쳤다. 몽고가 樓車와 臺床을 만들어 소가죽으로 덮어씌우고 그 안에 군사를 감추어 성 밑으로 육박, 터널을 뚫자 박서가 성에 구멍을 내어 鐵液을 부어 樓車를 불태웠다. 여기에 땅까지 꺼져 몽고군 압사자가 30여 명이나 되었으며 썩은 이엉을 불질러 木床을 불지르니 적이 놀라 흩어졌다. 몽고가 또 대포차 15대로 성 남쪽을 급히 공격하므로 박서가 성 위에 대를 쌓고 포차로 돌을 날려 물리쳤다. 몽고가 기름으로 섶을 적셔 두텁게 쌓아놓고 불을 질러 성을 공격하므로 박서가 물을 뿌리니 불이 더 치열해졌다. 이에 진흙을 가져오라 하여 물을 섞어 던져 불을 껐다. 몽고가 또 차에 풀을 싣고 이를 태우면서 譙樓를 공격하므로 박서는 미리 樓上에 저수하였다가 물을 쏟으니 불이 꺼졌다. 몽고가 성을 포위하기를 30일, 百計로 이를 쳤으나 박서가 임기응변하여 굳게 지켰으므로 몽고가 이기지 못하고 물러났다(≪高麗史≫권 103, 列傳 16, 朴犀).

 위에 기록된 바와 같이 귀주전투는 누차·대상·대포차 등 각종 攻城機器가 동원되었고 트로이식 지략을 짜낸 몽고의 공격을 고려군은 정신력과 기지로써 대응하였다. 양군의 제1차 귀주공방전은 거의 한 달을 계속하였는데 몽고는 마침내“하늘이 돕는 바요 사람 힘이 아니다”라는 탄사를 발하고 물러났다.

 일단 퇴각하였던 몽고군은 10월 중순 귀주성에 대한 재공격을 감행하였다. 곧 인근 북계의 여러 성에서 모집한 고려의 降附民을 앞세워 공격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보다 많은 기기를 동원하였다. 이같은 작전은 고려의 방어를 더욱 어렵게 만들어 적의 맹공에 성이 함락될 뻔한 위기에 직면하기도 하였다. 또한 몽고군은 新西門의 요충 28개소에 포차를 나란히 설치, 귀주성 서쪽을 포격하였다. 그리하여 10월 말에는 성곽 200여 칸이 파괴되었으며 다음날 다시 50칸이 파괴되었다. 그 때마다 박서는 성안의 군사를 지휘해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 한편, 주민들로 하여금 무너진 성곽을 곧바로 수축케 함으로써 몽고의 재공격에 대비하였다.

 몽고의 귀주에 대한 3차 공격은 11월 중순에 재연된다. 몽고군은 포차 30대를 줄지어 대놓고 성곽 50칸을 파괴하였으나 귀주의 고려군은 이를 즉각 보수하고 무너지면 다시 수축하여 쇠고리줄로 얽어 놓아 몽고군이 더 이상 공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게다가 틈이 나면 나가 싸워 크게 이기기도 하였다.

 몽고군은 이미 전세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개경정부와의 화의를 진행시키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몽고군은 항복을 설유하기도 했지만 귀주는 끝내 거절하였다. 이에 몽고는 북계에 투입되었던 부대를 재집결시켜 귀주에 대한 무력공격을 시도하였으나 고려군은「大于浦」라는 큰 날이 달린 병기를 사용하여 적의 공격을 막아 내었다. 몽고의 한 노장은 귀주성 아래 그들이 동원하였던 무기와 성 주위를 둘러보며“내가 어려서부터 종군하여 천하 城池의 공방전을 여러 번 보았으나, 일찍이 이러한 맹렬한 공격에도 끝내 항복하지 않는 것은 처음 보았다”고 고려군의 항전정신을 칭찬할 정도였다.

 병마사 박서263) 朴犀는 1차 여·몽전쟁이 종식되면서 고려정부가 대몽관계를 의식한 정치적 차원에서 향리인 竹州로 귀향조치되었다. 최씨정권의 항몽전 결의에 의하여 후일 다시 등용된 그는 벼슬이 門下平章事에 이르렀으며 이름을 朴文成으로 고쳤다. 휘하 귀주의 전투병력은 바로 귀주의 주진군이 주력을 이루면서 인근지역 병력이 합세한 것이라 볼 수 있고, 여기에 귀주의 농민·백정 등이 전투를 도왔을 것이므로 귀주전투에서는 특히 주민의 역할이 지대하였다고 할 수 있다. 전투 후 귀주가 定遠大都護府로 승격된 사실은264)≪高麗史≫권 58, 志 12, 地理 3, 龜州. 이 지역 농민들의 적극적 공헌에 대한 집단 포상의 의미를 갖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귀주와 더불어 몽고의 1차 침략 당시 끝까지 적과 대항한 유명한 또 하나의 전투가 慈州城싸움이다. 자주는 철주나 귀주보다 후방인 평남 順川郡, 西京의 북방이며 따라서 자주성 전투의 시기는 귀주공방전 이후의 일이다.

 이 전투에 대해서는 자주부사 崔椿命이 吏民과 함께 끝내 성을 고수하였다는 사실만 전할 뿐 구체적인 전황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자주성은 부사 최춘명의 지휘하에 성민이 일체가 되어 적의 공격을 막아 내었으며 귀주전투의 양상을 방불케 하였던 것 같다. 12월이 되자 몽고는 고려정부와의 화의를 계기로 귀주에서와 같이 고려측 관리를 앞세워 항복을 설득하였다. 처음 고려정부에 의해 파견된 宋國贍의 설유가 거부되자 안북부 살례탑 진영에 파견되었던 淮安公 侹이, 항복한 고려 3군의 後軍陣主 大集成과 몽고 관인을 대동해 직접 성민을 설득하였다. 그러나 자주는 이러한 강력한 출항 권유에도 불구하고 조정의 명령을 받지 못했다 하여 끝내 항복을 거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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