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1. 몽고 침입에 대한 항쟁
  • 3) 몽고의 침략에 대한 항전
  • (1) 살례탑군에 대한 항전
  • 라. 광주 및 처인부곡민의 승전

라. 광주 및 처인부곡민의 승전

 고종 18년(1232) 12월, 충주성 전투를 끝으로 몽고는 이듬해 정월, 고려와의 화의진행에 따라 일단 철군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최씨정권의 강화천도로 여·몽간의 전쟁은 재개되었다.

 재침한 몽고의 살례탑군은 고종 19년 8월부터 12월에 이르는 5개월 간 고려에 체재하며 정복전쟁에 종사하였는데 당시 선발부대는 대구지방까지 남하하여 현종조에 제작된 符仁寺 소장의 대장경을 불태우는 등 구략을 일삼았다. 살례탑 자신은 내침 초기 안북부에 장기간 주둔하며 북계지역 일대를 장악하고 강도정부와의 교섭을 벌이다가 대략 10월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남하한 것으로 보인다.

 살례탑이 거느린 몽고군의 주력은 개경을 거쳐 한양산성을 공취하고 이어 광주를 거쳐 처인성에 이른다. 그들은 아마도 경기·충청도를 경유하여 경상도 방면으로의 진로를 계획하고 있었던 것 같다. 처인성에 이르는 중도, 광주에서 살례탑군은 저항하는 광주민과 일대 접전을 벌였다. 이에 대해서는≪고려사≫에 기록이 누락되어 있지만 당시 전투를 지휘하였던 李世華의 묘지명에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고종 19년) 이 해 여름 정부가 오랑캐의 침략 때문에 도읍을 옮기게 되었는데 廣州는 중부지방의 거점이었기 때문에 조정에서 적임자를 논하고 李世華를 파견하여 지키게 하였다. 겨울 11월에 몽고의 대병력이 수십 겹으로 포위하고 온갖 계략으로 여러 달 동안 공격이 계속되었다. 이세화는 밤낮으로 성을 수리하고 방비하며 상황에 따라 대처하되 기이한 계책을 내어 혹은 사로잡고 죽인 것이 심히 많으니 오랑캐들이 불가능함을 알고 드디어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李奎報,≪東國李相國集≫권 12, 李世華墓誌銘).

 아마 11월부터 12월에 걸치는 기간 중 몽고군은 온갖 계략으로써 광주산성의 함락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광주부사 이세화는 주민들과 일체가 되어 상황에 따른 임기응변으로 그 공격을 막아내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몽고군을 사로잡거나 죽인 것이 대단히 많았기 때문에 몽고군의 대병력도 아무런 소득없이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광주전투의 승전에서 한 가지 주목되는 사실은 입보한 주민들의 역전에 크게 힘입었다는 점이다. 원래 城守戰에서는 입보민들의 협력이 전투의 성패를 크게 좌우하는 것인데 이 점에 있어서 몽고의 1, 2차 침공 때에 광주가 몽고군의 공격을 능히 극복한 공으로 주민의 조세를 면제케 했다는 기록은 좋은 증거가 된다. 강도정부가 광주민의 조세를 면제케 한 것은 확실히 파격적인 조치가 아닐 수 없는데, 특히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그것이 바로 광주민의 전공에 대한 집단적 포상 조치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만큼 당시 몽고군 격퇴에 광주민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동시에 당시 싸움이 전체 전국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살례탑의 몽고군을 좌절시켰던 광주산성은 방어에 유리한 요충이었을 뿐만 아니라 광주관아에 가까운 지점이었을 것으로 보아 日長山城 즉 오늑의 南漢山城이었음에 틀림없다. 당시 광주민들은 남한산성에 입보하여 지리적 여건을 이용하면서 적의 포위공격을 분쇄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광주성전투 직후 2차 침략의 몽고군이 남진과정에서 경유하게 된 處仁部曲(오늘날의 龍仁郡 南四面)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며, 처인성은 南四面 衙谷里의 구릉에 위치한 소규모의 토성으로서 당시 처인부곡의 중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몽고군이 육박해 오자 처인부곡민들은 난을 피하여 이 작은 성에 입보하였고 살례탑이 지휘하는 몽고군과 공방전을 벌였다. 그 해 12월 중순, 이곳에 함께 입보하여 있던 白峴院의 승려 김윤후의 활약으로 적장 살례탑이 사살됨으로써 몽고군은 고려로부터 철퇴하게 된다. 이 싸움은 막강한 몽고침략군의 사령관을 사살하였으므로, 여·몽전쟁 중 고려가 거둔 가장 큰 승리로 알려져 있지만 기록의 소략으로 구체적인 전황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김윤후의 처인성승첩이 우연한 사건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그 후 몽고의 5차 침략기인 고종 40년(1253) 충주산성 전투에 의해 입증된다. 당시 충주산성의 방호별감으로 파견되어 수성의 책임을 맡게 된 김윤후는 충주민을 노비에 이르기까지 전력화시키는데 성공, 적장 也窟이 지휘하는 몽고군의 포위공격을 70여 일간이나 막아냄으로써 적의 남진을 좌절시켰다. 이는 처인성 승첩이 김윤후의 지휘력에 크게 힘입었음을 암시한다. 다만 종래에 처인성전투에서 김윤후가 마치 직접 화살을 쏘아 적장 살례탑을 사살한 장본인인 것처럼 알려진 것은 사실과 다르다.

 처인성전투에서의 김윤후의 역할은 대동한 약간의 휘하 승도들과 함께 성으로 피란한 주민들을 지휘한 일이었다. 처인성전투는 다른 전투와는 그 성격이 크게 달랐는데, 곧 관에 의해 주도되지 않은 순수한 지역민들의 자력적인 항전이었다는 사실이다.

 처인성전투의 김윤후 자신은 난을 피하기 위해 들어온 경우였거니와 당시 입보민들은 거의 처인부곡민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처인성은 낮은 구릉 위에 위치한 흙으로 쌓은 작은 성에 불과하여 먼 곳으로부터의 입보란 생각하기 어렵고, 이곳에 군사나 관리가 있을 이유도 없다. 몽고군이 내침하자 성에 피란하였던 입보민들은 생존을 위하여 적과 싸우게 되었던 것이니, 처인성전투의 전력은 거의 처인부곡민들이었던 셈이다. 이와 같이 처인성승첩이 순수한 지역민들의 자발적 항전이었다는 것은 후대에 이 사건을 의병 궐기의 선구적 사례로 인식하였다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

 처인성전투에 있어서 처인부곡민들의 역할과 관련해 주목을 끄는 것은 처인부곡이 處仁縣으로 승격된 사실이다. 충렬왕 31년(1305)에 작성된 崔瑞의 묘지명에 “中統 元年 出爲處仁縣令”이라 하여 그가 원종 원년(1260) 처인현령으로 임명되었다는 기록에서 확인된다. 이는 처인부곡이 고종 19년의 승첩 이후 윈종 원년에 이르는 사이에 主縣으로 승격된 사실을 말해준다. 이 기간 동안 처인부곡이 주현으로 승격한 이유는 역시 고종 19년의 승첩일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처인성전투에서의 부곡민들의 항전에 대한 포상 조치이며 동시에 처인부곡민들의 역할을 실제적으로 입증하는 자료가 되는 셈이다.266) 尹龍爀,<蒙古의 2차侵寇와 處仁城 勝捷>(≪韓國史硏究≫29,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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