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1. 몽고 침입에 대한 항쟁
  • 3) 몽고의 침략에 대한 항전
  • (2) 당고군에 대한 항전
  • 나. 죽주민의 승전

나. 죽주민의 승전

 자주성을 함락하였던 몽고의 부대는 동 고종 23년 9월 충남지역까지 전출 남하하였다. 이들이 충청지역까지 내려가는 중도에 竹州城(안성군)에서 성을 둘러싼 치열한 방어전이 벌어졌다.

몽고가 죽주성에 이르러 항복을 권유하거늘 성안의 군사가 출격하여 이를 쫓았다. 몽고가 포로써 성의 4면을 공격하니 성문이 곧 무너지는지라 성안에서도 포로써 반격, 몽고가 감히 가까이 하지 못하였다. 몽고가 또 사람의 기름을 준비하여 짚에 뿌리고 불을 놓아 공격하거늘 성중의 사졸이 일시에 성문을 열고 돌격, 몽고의 전사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몽고가 여러 방법으로 공격하기를 무릇 15일이나 하였으나 마침내 함락시키지 못하자 이에 攻城 장비들을 불태우고 물러났다(≪高麗史≫권 103, 列傳 16, 朴犀 附 宋文冑).

 죽주전투는 대략 보름간 진행되었는데, 이 전투는 위에서 보는 것처럼 귀주전투의 축소판이었다. 먼저 고려의 항복을 권유한 다음 사방을 포위해서 포로써 부수고, 혹은 짚에 기름을 뿌려 성을 火攻하기도 하는 적군의 공격이나 그때그때 임기대응하는 고려의 수성전 양상에서 그러하다. 죽주성민들은 적의 허점을 따라 수시로 출격하여,「헤아릴 수 없이 많은」몽고군을 사살하였다.

 죽주전투는 귀주싸움에서 풍부한 대몽전의 경험을 쌓은 송문주의 지휘력에 크게 힘입은 것이 사실이지만 죽주민의 몽고에 대한 항전의식 또한 전승의 주요 원인이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내의 입보민들이 차지하는 전투력의 비중은 당연하지만 특히 죽주에서 더욱 주목되는 것은 죽주가 귀주성 대첩의 영웅 박서의 고향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귀주성 전투를 끝낸 직후인 고종 19년 2월, 몽고의 압력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죽주로 귀향하였던 것이다. 죽주 내침 당시 여전히 그가 고향에 우거하고 있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귀주승첩의 장본인이 죽주에 거처하게 된 사실은 죽주인들로 하여금 긍지와 함께 대몽 적대의식을 크게 고취시켰을 것으로 믿어진다. 죽주승첩은 이처럼 고취된 죽주민의 항몽정신에 크게 힘입었을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