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40년 몽고 침략군에 대응하여 각 지방에서 소규모 유격전이 나타나는데 牛峰의 별초군이 金川지역에서 싸운 전투, 喬桐別抄에 의한 평주전투, 전주 별초군의 班石驛전투, 충주 金堂峽전투 등이 그것이다.
황해도 금천군에서의 전투는 고종 4년 8월 金郊·興義 사이에서 인근 우봉의 별초군 30여 명이 교위 金大就의 지휘하에 적을 요격한 것이었다. 이 싸움에서 우봉 별초군은 적 여러 명을 베고 아울러 무기류 등을 노획하였는데 당시의 몽고군은 적의 선발 척후부대였던 것 같다. 같은 달 전라도 지경까지 남하한 몽고의 척후기병 300명은 전주 남쪽의 반석역에서 지유 李柱가 지휘하는 별초군의 요격을 받는다. 전주의 별초군은 이 전투에서 적의 과반수를 격살하고 말 20필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9월 충주 금당협에서는 충주의 倉正 崔守가 복병을 두어 몽고병을 기습해 15급을 베고 각종 무기와 포로가 된 남녀 200여 명을 되찾아 왔다. 최수는 지역에서의 자신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주민들을 움직여 임시적으로 부대를 편성, 대몽전에 나섰던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이들 충주민에 의해 탈취된 200여 명의 포로는 이들이 몽고군의 구략으로 붙잡혀 간 농민들이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교동별초의 평주전투는 11월 중순의 일이다. 당시 교위 張子邦이 지휘하는 교동의 별초군은 평주성 밖의 몽고군 진영을 야간에 기습, 다수의 적을 격살하였다. 특히 장자방은 뛰어난 용맹으로 적의 屯長 20여 명을 백병전으로 사살하였는데, 그는 아마도 이 전공으로 인해 散員에 승진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이듬해에도 중부 내륙에서 몽고군을 요격하는 유격전을 계속 전개하고 있다.
이상의 유격전은 다른 시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한밤중 혹은 지리적 조건을 이용하여 적의 소부대들을 기습하는 것이다. 이러한 게릴라식 전투가 침략 몽고군을 끊임없이 괴롭혔으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들 유격전은 정부에서 파견된 군장교들에 의해 지방의 별초군 등이 투입되어 행하여지기도 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향리 등 영향력있는 인물이 농민들을 동원하여 적으로부터 인명과 재산을 보호하고자 했던 자위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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