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1. 몽고 침입에 대한 항쟁
  • 3) 몽고의 침략에 대한 항전
  • (3) 야굴군에 대한 항전
  • 나. 양산성과 동주산성의 전투

나. 양산성과 동주산성의 전투

 고종 40년 7월, 고려에 내침한 야굴의 몽고군은 서경과 土山(평남 상원)을 경유하여 남하하던 도중, 8월에 서해도의 椋山城을 함락하고, 이어 내륙의 東州山城을 공함하였다. 양산성은 성 4면이 가파라서 오직 한 길로 겨우 사람이 출입할 수 있는, 지리적으로 매우 험한 천연의 요충이었다. 양산성의 성안에는 방호별감 權世侯의 지휘하에 인근의 군현민이 다수 입보하여 있었다. 내침한 몽고군은 양산성을 조직적으로 공격하였다. 성문을 포격하여 부수고 화살을 비오듯 쏘아댔고 또 석벽에 사다리를 걸치고 올라와 불화살을 쏘아 성안의 집들을 연소시켰다. 몽고군의 집중공격으로 기선을 제압당한 양산성은 방호별감 권세후의 자결 이후 마침내 적에게 함몰되었으며 몽고는 철저하게 살륙을 자행, “성안의 죽은 자가 무려 4,700여 명, 남자 10세 이상은 도륙되고 그 부녀와 어린아이는 사로잡아 나누었다”는 참담한 상황을 연출하였다. 양산성전투의 경우 다수의 입보민과 천연지세를 고려할 때 몽고군을 충분히 격퇴할 수 있는 여건이었지만, 정부 파견 지휘관의 태만으로 인하여 방어력 결집에 실패함으로써 대량 살륙이란 비극적 결과를 가져온 예이다.

 양산성전투에서의 실패는 다음 동주산성에서도 되풀이된다. 당시 동주산성에는 강화도로부터 백돈명이 방호별감으로 파견되어 방어를 책임지고 있었다. 성내에는 동주의 부사 및 판관 휘하 州人들 이외에도 인근 금성·금화 등지에서 역시 현령, 감무 등의 관원과 지역민이 합께 입보하고 있었다. 백돈명은 이들을 전체적으로 통할하면서 대몽방어전을 수행하였다. 당시 수확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백돈명은 추수하려는 입보민들의 출입을 금지시켰고, 이로 인하여 상하간의 심한 갈등이 야기되었다 이같이 상하가 어긋나 있을 때 몽고병이 성에 당도하였다. 이에 백돈명이 정예군 600명을 내어 싸웠으나 사졸들이 도주해 버렸고, 이러한 상황에서 몽고군에 의해 성은 함락되고 말았던 것이다.

 몽고군의 5차 침입에 당하여 강도정부는 지방의 주요 요충지에 다수의 방호별감을 파견, 산성을 중심으로 한 방어전에 임하였다. 이들은 수령들의 입보조치를 통괄하면서 전투지휘의 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방호별감들은 현지의 실정을 모를 뿐만 아니라 농민들의 사정도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인 조치를 강행함으로써 방어전의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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