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40년(1253) 야굴의 몽고군은 서해도 양산성전투 이후 내륙을 따라 철원 춘천 등지를 연이어 공함하였다. 그 중 춘천에서의 싸움은 성내의 관민이 결사항전으로 모두 죽음을 선택한 비극적 사태를 보여주고 있다.
春州城(춘천)을 포위한 몽고군은 먼저 出降을 요구하였으나 이것이 거부되자 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고 거기다 이중의 목책과 참호로써 성을 철저히 고립시켰다. 몽고군이 춘주성을 적극 공격하면서 여러 겹으로 성을 포위하는 것 이외에 이중, 삼중의 장치를 마련한 것은 이들이 처음부터 춘주성을 도륙하고자 계획하였던 때문이다. 이는 춘천민과 안찰사 朴天器의 대몽 항전 결의에 자극된 일종의 보복전이었고, 이후의 공략에 그 위력을 선전하려는 의도였던 듯하다.
당시 춘주 성중에는 박천기 휘하 약간의 사졸과 입보한 춘주민이 있었다. 싸움이 장기전으로 접어들자 성안의 물이 고갈되면서 소, 말을 잡아 그 피를 마실 정도로 비참한 형편이었다. 방어에 한계를 느낀 박천기는 마침내 결사대를 조직, 적의 포위망을 돌파하는 최후의 시도를 감행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몽고군이 사전에 파놓은 저지선에 걸려 좌절되었다. 성이 함락당하자 춘주민의 대부분은 적에게 도륙당하였는데 다음의 기록은 이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몽병이 춘주를 함락할 때 朴恒이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부모의 죽은 곳을 알 수 없었다. 그리하여 성 아래 쌓인 시체가 산과 같았는데 모양이 비슷한 자는 모두 거두어 묻기를 3백여 인에 이르렀다(≪高麗史≫권 106, 列傳 19, 朴恒).
촌주인 박항이 죽은 시체 가운데 부모로 의심되는 것만 300여 명을 장사지냈다는 것이나“성 아래 쌓인 시체가 산과 같았다”는 기록은 당시 성이 함락된 후 춘주민들이 철저히 유린당했던 비극적 상황을 여실히 보여 준다. 위의 기록에 뒤이어“뒤에 母가 포로되어 燕京에 있음을 듣고 두 번이나 가서 이를 구하였으나 끝내 이르지 못하였다”고 하여 그의 모친이 원의 수도 연경에 포로로 끌려갔던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이로써 보면 당시 일부 살륙을 면한 춘주민은 적의 포로로 잡혀갔던 것이다.269) 춘주성 싸움의 현장은 오늘날 춘천시내 소재의 鳳儀山城으로서 일시적인 피란이 가능하였지만, 장기적인 守城處로서의 조건은 충분하지 않았다.
춘천에서의 참화는 몽고군이 인근지역에서 고려민의 저항을 약화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전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춘천전투 다음달 10월, 몽고군의 포위공격을 받은 楊根城(양평군)의 방호별감 尹椿은 성내의 이민을 이끌고 적에게 투항하였다. 그리고 투항한 고려인은 곧이어 몽고군에 의하여 전투에 재투입되었으며 일부는 성에 잔류시켜 군량 준비에 활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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