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1. 몽고 침입에 대한 항쟁
  • 3) 몽고의 침략에 대한 항전
  • (3) 야굴군에 대한 항전
  • 라. 충주민의 항전

라. 충주민의 항전

 고종 40년 야굴의 침략으로 야기된 고려의 대몽전에 있어서 아마도 최대의 전투는 忠州山城에서의 싸움일 것이다.

 당시 충주성 방어의 책임을 맡은 인물은 고종 19년(1232) 처인성 승첩으로 널리 알려진 김윤후였다. 그는 승첩 이후 승려생활을 청산하고 섭랑장을 제수받아 무반으로서 관도에 올랐는데, 이 무렵 그는 낭장으로서 충주산성의 방호별감에 임명되어 있었다.

 10월 충주에 당도한 몽고군은 야굴의 지휘하에 부장 아모간, 그리고 반역자 홍복원과 이현 등의 인도를 받은 주력군이었으며 남진과정에서 항복한 고려인들을 공격에 이용하고 있었다. 특히 양근성에서는 방호별감 尹椿이, 그리고 충주 인근의 천룡산성에서는 방호별감 趙邦彦, 黃麗縣令 鄭臣旦 등이 吏民을 거느리고 적에게 투항하였기 때문에 몽고군이 충주에 당도하였을 때는 많은 고려 降附民들이 딸려 있었다.

 야굴의 몽고군은 승승장구 남하를 거듭했지만 충주산성에 입보한 충주 관민들의 항전에 부딪혀 남진에 비로소 제동이 걸리게 된다. 충주성 포위 다음달인 11월이 되자 야굴은 몽고군 지휘부의 내부 갈등 때문에 소환됨으로써 전선에서 먼저 물러나게 되었다. 몽고군은 이후 부장 아모간과 홍복원 등이 충주성 공격을 계속하게 되지만 이러한 지속적이면서도 강력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충주성은 끝까지 사수되었다. 그리하여 10월부터 12월 중순까지 무려 70여 일에 걸친 끈질긴 공격을 방어해 냄으로써 충주민은 5차 침략의 몽고군을 좌절시켰던 것이다. 당시 김윤후는 몽고군의 포위로 성내의 식량이 거의 다하게 되자“만일 능히 힘을 다한다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관작을 내리겠다”고 사졸들을 독려하는 한편, 관노비의 명부를 불태워버리고 노획한 우마를 나누어 주었다. 이에 충주민 모두 죽음을 무릅쓰고 대적하였다. 이러한 사정을 참고하면 충주성의 승전은 김윤후의 뛰어난 지휘력과 충주민들의 강인한 항전의지의 결합으로 이룩된 것이었다고 하겠다. 처인부곡의 경우에서도 그러하였지만 김윤후의 뛰어난 점은 무엇보다도 피지배 민중들에게 잠재한 항전력을 불러일으켜 이를 실제적인 활동력으로 점화, 분출시켰다는 점에 있다.

 충주민의 승전은 몽고군의 남진을 좌절시킴으로써 경상도 지역에 대한 전쟁피해의 확대를 막았을 뿐 아니라 몽고로 하여금 화의를 명분삼아 서둘러 철군케 하는 계기를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적군이 철수한 뒤인 이듬해 고종 41년 2월, 충주인들은 몽고군 격퇴의 전공으로 사졸로부터 관노·백정에 이르기까지 군공에 따라 관작이 제수되었으며 뒤이어 충주는 國原京으로 승격되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