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41년 7월 차라대가 이끄는 몽고군은 압록강을 건너 고려에 내침하였다. 이후 몽고군의 주력은 경기지역과 충청도를 거쳐 경상도 방면으로 남진, 남해안 晋州 인근까지 도달하였는데, 말기의 무인집정자 林衍이 鎭州(충북 진천)에서 농민들과 함께 몽고군을 격퇴하였던 사건은 바로 같은 해 8월 하순경의 일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임연은 일찍부터 무재가 특출하였고 이 때문에 역시 동향의 거물인 대장군 宋彦庠의270)≪鎭川宋氏大同譜≫에 의하면 송언상은 고종 23년 竹州城 싸움에서 승전한 방호별감 宋文冑와 동일인이다. 廝養卒이라는 군인이 되었다. 그러나 어떤 연유였는지 그는 송언상의 휘하에서 벗어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임연이 귀향해 있던 시기에 몽고군이 진주지방으로 침략해 들어왔는데, 임연은 진주민들과 함께 이에 맞서 싸웠고, 마침내 침략군을 격퇴하는 전공을 세우게 되었다. 그가 뛰어난 무재의 소유자였던 점, 그리고 이족 출신의 신분이었던 점에서 임연은 지방민들을 지휘하는 지휘자의 위치에 있었음이 분명하며271) 林衍은 鎭州人으로서 父系가 확실하지 않으나 어머니가 州吏의 딸이었다는 점에서 그 역시 鄕吏의 자손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이 때문에 전승에 대한 포상으로서 隊正이라는 무반직을 얻기에 이르렀다. 그 후 임연은 권신 金俊의 눈에 들어 그의 추천에 의하여 일약 낭장(정6품)으로 뛰어 올랐고, 김준의 특별한 비호를 받음으로써 마침내 정권 장악에까지 이르는 기반을 닦았던 것이다.272) 成鳳鉉,<林衍政權에 관한 硏究>(≪湖西史學≫16, 忠南大, 1988).
임연이 고향인 진주에서 몽고군을 격퇴한 시기는 아마 고종 41년 차라대 6차 침략 때인 8월 하순경으로 추측되며 당시 이 전투는 鎭州民의 순수한 자위적 차원의 방위전이었다.
오늘날 진천지역에서는 임연의 항몽전쟁을 榤尾山城에 연결시켜,「걸미산 의병」으로 칭하고 있다. 걸미산에 소재한 龍華寺에는 7m 높이의 거대한 미륵불이 남아 있는데, 용화사 앞 德文坪에 주둔한 적군을 장군으로 現身한 미륵불의 위력으로 물리쳤다는 전설이 전하고 있다. 이는 임연의 항몽전을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적군이 주둔하였다는 덕문평은 나중에 임연의 농장이 되었던 지역이기도 하며, 임연의 향리로 전하는 文白面 龜山洞도 이곳에서 멀지 않다. 따라서 위의 용화사 미륵불의 전설을 임연과 관련시킨다면, 당시 진주민들은 임연의 지휘하에 치소에 근접한 걸미산성에 머물러 있던 중 몽고 침략군이 덕문평에 이르자 이를 기습, 적을 격퇴하였을 것이라는 설명이 가능해진다.
진천(진주)싸움은 관이나 군의 도움없이 농민들의 순수한 자위적 항전 사례라는 점에서도 큰 의의가 있으며 이같은 항전 사례는 대몽항쟁기 본토에서 이루어진 대몽전쟁의 중요한 한 양상을 보여준다. 동시에 진주항전의 성공은 전투를 지휘한 임연이 중앙군에 발탁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 점에 있어서 이후 고려정치사의 주요한 향배를 가름짓는 한 단서를 제공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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