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에서 지역 주민들의 역전에 부딪혀 몽고군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남하하였다. 이들은 고종 41년 9월 초순쯤에 충주 지경에 들어왔는데, 多仁鐵所를 비롯 충주의 여러 지역에서 활발한 항몽전이 전개되었다.
충주의 서쪽 근교 中原郡 利柳面 일대로 전하는 다인철소민의 항전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게도 그 기록이 극히 단편적이다. 분명한 것은 이 전투의 주체가 철소민이었다는 것, 그리고 당시 이들의 전공이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 전공에 대한 포상으로 강도정부가 소를 현으로 승격시킨 사실에서 확실해진다.
추측컨대, 다인철소 항전의 전략적 중요성은 다름아닌 이 지역이 철소, 즉 철제도구의 생산지였다는 지역적 특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믿어진다. 전시에 있어서는 무기류를 비롯한 각종 군수의 공급이 끊임없이 요구되는데, 이 때에 철광은 특별히 중요한 자원이었다. 일단 채굴된 철광은 인근 지역에서 제련의 과정을 거쳐 각종의 철제품 제작으로 이어지며 이러한 작업은 철소에서 소민의 집단노동에 의하여 이루어지게 된다.
충주가 당시 고려의 중요한 철산지였음은 다인철소의 존재에 의하여 짐작할 수 있는 것이지만 다인 이외에도 관내에는 여러 곳에 철산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하여 충주에서 산출되는 토산품 중에서 철은 그 으뜸으로 꼽히곤 하였다. 충주의 철이 항몽전쟁 당시 호미·괭이·솥 등 일반 생활도구 이외에 칼·창·화살촉 등 각종 무기류의 제작에 사용되고 있었음은 崔滋의<三都賦>에서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다.273)≪東文選≫권 2, 賦 三都賦.
≪新增東國輿地勝覽≫권 12, 江華都護府 形勝.
고려에 내침한 몽고군은 식량 등을 거의 현지조달한 것으로 보이는데, 무기류의 공급을 위해서 철산지와 관련 기술자를 확보하는 것이 몽고군에게 있어서 중요한 관건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전쟁 수행의 군수적 면에서 볼 때, 충주지역의 확보는 고려에 있어서나 몽고군에게 있어서나 전략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갖게 된다. 충주지역에서 피아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된 배경에는 이 지역이 갖는 특수성과 일정한 연관을 갖는 것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다인철소민에 의해 몽고군이 격퇴되자 강도정부는 이곳을 현으로 승격시키는 파격적인 포상 조치를 취하였는데 이는 무기류의 제작 및 공급처라는 전략적 중요성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다인철소 항전의 시기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그것이 고종 42년(1255)의 일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종 42년은 차라대에 의한 침략이 진행되던 때인데, 그것은≪고려사≫지리지의 충주목조에“고종 42년에 다인철소민들이 몽고군의 방어에 공이 있다고 하여 翼安縣으로 승격시켰다”고 한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이로 보아 고종 42년이라는 연대는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인용한 위의 기록은 두 가지의 내용, 즉 다인철소민의 항전 사실과 철소의 현으로의 승격 사실이 함께 묶여져 있음이 주목된다. 따라서 고종 42년이 이 두 가지 사실 중 어느 쪽에 해당하는 것인지는 좀더 구체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전후 사정을 종합해 볼 때 다인철소민의 항전은 익안현 승격 조치보다 한 해 앞선 고종 41년의 일이었다고 판단된다.274) 尹龍爀,<몽고의 침략에 대한 고려 지방민의 항전>(≪國史館論叢≫24, 1991).
고종 41년 8월 하순 진천에 침입한 몽고군은 임연이 지휘한 주민들의 항전으로 패퇴하였고 다시 충주 다인철소에서 소민의 항전에 부딪혀 역시 타격을 받았다. 그 후 차라대의 몽고군은 직접 충주를 공격하였지만 비바람이 몰아치고 성 안의 충주인이 맹렬히 반격하자 상황이 여의치 않음을 알고 물러나고 말았다. 충주와 인근지역의 사람들은 몽고군이 침입하자 산성에 입보, 적의 포위공격에 대응하였던 것인데 여기에서의 충주산성은 아마 인근 月嶽山의 산성을 말하는 것 같다.
이듬해 충주 지역에서의 전투 기록은 또 다시 보인다.≪고려사≫세가 고종 42년 10월조에“몽고병이 大院嶺을 넘으므로 충주에서 정예한 군사를 보내, 1천여 인을 격살하였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는 충주인들이 지리적 여건을 이용, 인근의 대원령에서 남하 중인 몽고군을 요격, 적을 크게 격파한 사실을 전하는 것으로 격살한 자가 1천여 명이라는 것은 전투의 치열성과 더불어 고려의 대승첩이었음을 암시한다.
충주인의 대몽전승지 대원령은 충주와 문경, 영남과 호서의 경계선에 자리잡은 요충으로서 고려에 내침, 영남으로 나아간 몽고군은 거의 이 지점을 통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대원령 일대는 충주 및 월악산과 연결되어 고려의 대몽전 전개과정에서 최대의 전투지가 되었던 것이다. 대원령은 신라시대의 鷄立嶺인데 고려 초에 彌勒大院寺가 인근에 창간되어 번창하면서 지명까지 바뀌게 되었다.275) 崔壹聖,<歷史地理的으로 본 鷄立嶺>(≪湖西史學≫14, 1986). 이 지역은 대원사 이외에도 많은 사찰이 조성되었지만, 몽고군의 내침으로 대몽전쟁기에 모두 불탄 것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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