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1. 몽고 침입에 대한 항쟁
  • 3) 몽고의 침략에 대한 항전
  • (4) 차라대군에 대한 항전
  • 다. 상주산성·입암산성 입보민의 항전

다. 상주산성·입암산성 입보민의 항전

 고종 41년(1254) 고려에 대한 침공을 감행하였던 차라대는 9월 충주에 당도하여 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충주인의 맹렬한 반격으로 이를 포기하고 남하를 계속하였다. 이후 여·몽간의 대대적 공방전은 尙州에서 벌어지는데, 동 10월의 기록에“차라대가 상주산성을 공격하자 黃嶺寺의 승려 洪之가 제4관인을 사살하였다. 사졸로 죽은 자도 과반수나 되니 적이 드디어 포위를 풀고 퇴거하였다”276)≪高麗史≫권 24, 世家 24, 고종 41년 10월 무자.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홍지가 속해 있었던 황령사는 경상도의 초입에 해당하는 상주군의 북쪽, 銀尺面 黃嶺里에 위치하는데 몽고군이 충주로부터 대원령을 넘어 남하하자 이들 인근 지역민들은 보다 남쪽의 험한 곳에 위치한 상주산성에 들어가 적을 맞아 싸웠던 것이다.

 당시 홍지는 휘하의 승도들을 중심으로 입보한 상주민을 규합, 자체적인 방어체계를 갖추어 차라대의 공격에 대항하였던 것이라 생각된다. 이 전투에서 적은 차라대의 지휘에도 불구하고「제4관인」이라는 고급 지휘관이 사살 당하였다. 그리고 몽고군은 사졸의 죽은 자가 과반이라 하였듯이 전투는 고려의 승첩으로 종결되었다.

 홍지의 지휘로 차라대의 몽고군에게 타격을 주었던 전투지 상주산성은 상주 서쪽 50여 리 지점의 白華山城이었다. 백화산성은 비교적 물이 풍부하고 지리적 측면에서 방어요건이 좋기 때문에 입보한 주민들이 흥지의 지휘하에 적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혔던 것이다. 이는 고종 19년 2차 여·몽전쟁 당시 처인성에서 白峴院의 승려 김윤후가 입보민들을 지휘하여 몽고 원수 살례탑을 사살하였던 사건과 상통한다. 백화산성이 대몽항전 당시 상주민들의 입보처로서 사용되었던 대표적 성곽이었던 사실은 항몽전쟁기, 아마도 고종 41년경 상주의 州吏 金祚의 가족이 바로 이 백화산성으로 피난하였던 사실에서도 입증되고 있다. 백화산지역은 S자형의 깊은 골짜기가 특히 발달하여 당시 성안에 입보하여 있던 상주민들이 이러한 지형적 특성을 이용, 일종의 유격전에 의하여 적을 패퇴시켰을 것이다.

 상주산성의 승첩은 몽고군의 고급지휘관을 포함한 다수의 적군을 궤멸시킨 큰 전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기록은 겨우 승전의 사실 정도만을 간략히 전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상주산성에서의 항전이 중앙정부와 아무런 관련을 갖지 않은 채 순수한 지역민들의 자위적 항전이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 사실적 내용이 간과되고 묻혀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277) 尹龍爀,<몽고의 慶尙道 침입과 1254년 尙州山城의 승첩>(≪震壇學報≫68, 1989).

 고종 41년 10월 상주 백화산성에서 홍지와 상주민에 의해 패퇴한 차라대의 몽고군은 이후 대구지방을 경유, 남하하여 12월 경남의 산청지방까지 내려갔다가 이듬해 초 북쪽으로 퇴거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초 국경지대로 물러났던 몽고군은 동년 8월 다시 침략을 자행하였다. 이들의 군사행동은 고종 43년(1256) 9∼10월까지 계속되어 전라도 남부지역에 이르기까지 고려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당시 차라대의 몽고군은 전라도 일대의 공략에 전력을 집중하였고, 그 과정에서 고종 43년 3월 長城의 笠巖山城에서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당시 몽고군은 고종 43년 3월부터 대략 7월까지의 수개월 동안 전라도 남부지역에 그 전력을 집중시켰다. 몽고군의 선발대는 43년 초부터 전라도 일대에 출현하였던 것 같다. 그리하여 입암산성에 입보, 몽고군과 대전한 宋君斐 등의 부대는 동년 정월 강도로부터 파견된 고려의 중앙군이었다. 장군 이광, 송군비 등이 남하할 당시 몽고군은 전라도 서해안의 영광 일대에 주둔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이광은 수군으로, 그리고 송군비는 내륙으로 협공하는 작전이었던 듯한데, 이러한 고려군의 전략은 몽고군에게 사전 노출되어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이광·송군비가 수군을 거느리고 남하하였다가 영광에 주둔한 몽고군을 수륙 양면에서 공격하는 작전을 세운 것으로 보면 송군비의 군은 아마 전북 줄포만(부안·고창군)에서 일단 상륙, 전력을 보강하여 영광에의 진입을 시도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러한 작전이 어긋나자 가까운 입암산성에 입보, 몽고군과 대전하게 된 것이다. 입암산성은 전라지역의 가장 대표적인 입보처로서 당시 주변의 군현에서 다수의 吏民이 이미 병란을 피하여 들어와 있었던 것 같다. 송군비의 중앙군은 이들을 함께 지휘하면서 몽고군의 공격에 대응하였다. 입암산성 전투의 구체적 양상에 대해서는 다음의 기록이 참조된다.

성중의 장정들은 모두 적에게 투항하고 어린애나 노인들만 남아 있었다. 하루는 宋君斐가 짐짓 약한 자 몇 사람을 성밖으로 내어 보내니 몽병이 성안의 식량이 다된 줄로 알고 군사를 거느리고 성밑에 이르는 것이었다. 이에 송군비가 정예병을 거느리고 들이쳐 격파하니 살상이 심히 많았고 4명의 관인을 사로잡기까지 하였다(≪高麗史≫권 24, 世家 24, 고종 43년 3월 기미).

 당시 입암산성에 입보한 송군비의 군은 성중에 고립되어 매우 불리한 상황에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꾀를 내어 적을 이완시킨 다음 갑작스러운 공격으로 몽고군을 대파하였다. 고려군의 책략에 몽고군은 성중의 식량이 다한 것으로 알았다 하거니와, 이는 당시의 전투가 상당히 장기전이었음을 말해 준다. 이 싸움에서 살상자가 심히 많았다는 것, 그리고「官人」으로 기록된 적의 고급장교 4명을 포로로 하였다는 것은 고려군의 대승을 단적으로 입증하는 것이다.278) 笠巖山城은 전북 井邑郡과 전남 長城郡의 양도에 걸쳐 위치한다. 둘레 15km의 보기드문 大城址로서 조선시대에도 여러 차례 개수되었으며 전라도 제일의「保障之地」로 꼽혀왔다. 성곽의 구조 및 성안의 시설 등에 관해서는 全羅道 邑誌 가운데<長城府邑誌>·<笠巖山城鎭誌>그리고 柳永博,<藏書閣 所藏 笠巖山城圖 考證>(≪國學資料≫30, 文化財管理局, 197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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