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고군에 대한 고려의 전략이 각 지역단위의 산성 및 해도에의 입보를 중심으로 진행된 것은 각 지방의 농민, 노비, 소·부곡민 등 지방민들이 항전의 대열에 직접 서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지방민들의 광범한 항쟁참여는 고려 대몽항전의 중요한 특성이거니와289) 閔賢九는 고려 대몽항쟁의 특징을 정리하면서 그 이유 가운데 첫째로「하층의 농민과 노비, 즉 일반백성들」이 항몽전선의 주력을 이루었던 사실을 강조하였다. 이 점은 姜晋哲 등에 의해서도 주목되어 왔다.
閔賢九,<高麗의 對蒙抗爭과 大藏經>(≪韓國學論叢≫1, 國民大, 1978).
姜晋哲,<몽고의 침입에 대한 항쟁>(≪한국사≫7, 국사편찬위원회, 1974). 이같은 지방민의 동태는 몽고침입의 초기에서부터 주목되고 있다.
몽고의 1차 침략에 대한 고려의 방어전에서 보여진 인상적인 사실의 하나는 소위「草賊」으로 지칭된 유이농민 집단이 적극적으로 항몽전선에 참여한 사실이다.290) 초적세력의 항몽전 참여에 관한 연구로는 다음 글들이 참고된다.
金潤坤,<抗蒙戰에 참여한 草賊에 대하여>(≪東洋文化≫19, 嶺南大, 1979).
尹龍爀,<高麗 對蒙抗爭期의 民亂에 대하여>(≪史叢≫30, 1986).「초적」이라 불리는 이들 유이농민은 12세기 이래 고려 기층사회의 피폐를 배경으로 널리 출현하게 된 집단으로서 특히 무신정권 초기 일반 농민·노비와 함께 민란의 주체가 되었던 세력이다.
전쟁 초기 사료상에 구체적으로 등장하는 초적은 馬山(파주)·廣州·冠岳山·安南의 白岳, 그리고 경기의 초적 등 유이농민들이다. 이들 유이농민들은 그 본질상 반정부적 성격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데 뜻밖에도 이들이 외적 침입으로 인한 혼란 속에서 오히려 정부군에 자진 협조하여 대몽전선의 일선에까지 참여하였다.
이러한 일은 몽고의 고려 침략 직후에 이미 나타나고 있는 바 고종 18년(1231) 9월에 마산의 초적 괴수 2명이 최우에게 나아가 정예 5천으로 몽고군의 격퇴를 돕겠다는 제의를 하고 있다.291) 馬山의 현재 위치에 대해서는 尹龍爀, 위의 글 참조. 집정자 최우는 이 사건을 계기로 당시 개경부근에 출몰하던 유이농민 집단을 직접 불러서 달래는 적극적인 방책을 시도하였다. 곧 광주 관악산 초적의 둔소에 사람을 파견, 지휘자급 5인과 정예 50인을 유치, 우군에 편입시킨 것이다. 그리하여 고려 무신정권 성립 이후 정부에 대해 끊임없이 저항하고 싸워왔던 유이농민들이었지만 외세의 침략이라는 대외적 상황에 있어서는 오히려 정부와 손을 맞잡고 대몽전에 임한 것이다.
초적에 관한 사료에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그 규모인데 위에서 언급한 마산 초적의 경우는 최우에게「정병 5천」을 제의하고 있다. 이 숫자가 얼마간 과장된 것이라 할 지라도 당시 초적의 규모와 세력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음은 집정자 최우가 이를 계기로 경기지역의 유이농민세력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과 시책으로 나서고 있는 것으로도 짐작된다.
몽고침략 직후 정부에 내투한 이들은 실제로 고려의 방어군에 편성되고 또 대몽전에도 투입되었다. 이 사실은 이미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광주 관악산의 초적들이 3군의 하나인 우군에 보충되었으며 고려의 방어군이 몽고군과 처음으로 접전한 洞仙驛의 전투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9월 하순 고려의 3군이 황주의 동선역에 이르렀을 때, 8천 몽고군의 돌연한 기습을 받아 상장군 이자성이 화살에 맞는 등 아군이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런데 이 때 “마산 초적 2인이 몽병을 쏘아 넘어뜨림으로써 관군이 그 기세를 타고 적을 격퇴시켰다”는292)≪高麗史節要≫권 16, 고종 18년 9월. 것이다.
최씨정권의 경기지방 유이농민에 대한 적극적인 招撫政策은 대몽전 초기의 일시적인 시도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고종이 강화로 떠나기 직전인 고종 19년 7월의 기록에“安南判官 郭得星이 白岳 등지를 초무하자 적괴 20여 인이 내투하였다”는293)≪高麗史節要≫권 16, 고종 19년 7월. 기록은 이러한 사실을 암시한다.
몽고군의 침입에 대한 지방민의 전투 참여는 대몽항전에 있어서 매우 일상적인 내용의 하나였다. 그것은 고종 18년 1차 전쟁 당시 북계지역의 여러 성보를 중심으로 분명히 드러난다. 철주성·귀주성·자주성 등에서의 항전은 병마사와 수령 등의 지휘로 지역주민이 치열한 방어전을 전개하여 성을 지키거나 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던 것이다.
농민들의 항몽전 참여는 북계지역에서와 같이 주로 해당지역의 수령 혹은 강도에서 파견된 방호별감 등의 지휘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고종 19년 한강 남안의 광주에서는 이세화의 지휘에 따라 입보한 농민들이 몽고군의 예봉을 꺾었으며, 고종 23년 경기도 안성의 죽주성에서는 방호별감 송문주의 지휘하에 죽주민들이 적극 대응, 적을 물리쳤다. 고종 43년 전라도 정읍의 입암산성에서는 강도에서 파견된 송군비의 군사가 성안에 피란해 있던 주변지역 주민들의 도움으로 몽고군을 무수히 살상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 무렵 압해도에서는 적장 차라대가 직접 지휘하는 몽고군을 연안지역에서 입보한 농민들이 물리쳤다. 이러한 농민들의 항몽전 참여, 그리고 승전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인데 당시 농민들의 항몽전 참여가 이처럼 일반화된 것은 산성 및 해도입보를 중심으로 전개된 당시 항몽전의 전투 양상과 관련이 깊다. 고려정부가 중앙군을 방어군으로 편성하여 정면으로 침략군에 대응하였던 것은 몽고 1차 침략 때인 고종 18년에 1회적인 일로 끝나버리고 오로지 지역주민들의 산성 및 해도에의 입보를 주요 대응전략으로 삼았던 만큼 몽고군의 침입을 당하여 피해간 성이 포위될 때 농민들이 자위적 차원에서 항몽전에 직접 투입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대몽항쟁기 농민들의 광범한 항몽전 참여는 정부의 공식적인 방위력이 그 역할을 거의 담당하지 못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지방의 농민들은 수령이나 방호별감과 같은 정부관리의 지휘하에 산성이나 섬으로 입보하고 전투에 투입되는 경우가 기록에 많이 남겨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관리들의 지휘권 밖에서 전쟁을 피하기 위한 농민들의 입보 사례는 더욱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러한 와중에서 몽고군의 포위공격을 받을 경우 농민들은 자위적 차원에서 스스로 목숨을 지키지 않으면 안되었다.
고종 19년 용인의 처인부곡에서 김윤후에 의해 지휘된 부곡민들은 적장 살례탑을 사살하고 몽고군을 격파하여 이들의 남진을 막아냈다. 고종 41년(1254) 충청도 진천에서는 향리출신 임연의 지휘하에 농민들이 침략군을 격파하였으며, 이 때 인근 충주의 다인철소에서는 역시 소민들이 몽고군을 물리쳤다. 같은 해 10월 상주산성에서는 홍지라는 승려에 의해 지휘된 난을 피해 입보한 주민들이 현지의 지리적 조건을 이용, 차라대군을 대파하였다. 이같은 사례는 모두 정부의 행정·군사조직과 관계없이 지역주민들이 자위적 차원에서 전개한 전투에서 거둔 커다란 승전 사례들이다. 이로써 볼 때 지역 주민들의 피란 입보, 그리고 침략군에 대한 대항은 기록으로 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항몽전쟁기간 중 매우 광범하게 나타난 양상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대몽항쟁기 피란과 생존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농민들이 대몽전에 그대로 노출되고 비조직적으로 투입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한편으로 그만큼 전시하 농민들의 생존 여건이 열악한 상황에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尹龍爀>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