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 여·원관계의 전개
  • 1) 원의 간섭과 자주성의 시련
  • (1) 몽고제국 지배체제로의 편입과정
  • 나. 여·원연합군의 일본정벌

나. 여·원연합군의 일본정벌

 몽고는 세계적인 제국을 건설해 나가는 과정에서 일본정벌을 단행하였다. 그 동기는 기본적으로 세조 쿠빌라이의 천하통일이라는 정복 욕구에서 나온 것이지만, 송대이래 형성되어 온 동아시아 교역권 및 정치적 질서유지를 재건하고자 하는 욕구와 고려·일본·남송의 연결을 막으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추측되기도 한다. 이러한 몽고의 일본원정에는 몽고의 강요에 의해 고려가 깊숙히 간여하였다. 그에 따라 고려에 부과된 인적·물적 부담이 엄청나 고려가 지금까지 몽고에 장기간 대항할 수 있었던 국력을 크게 상실하게 되었다.311) 여·원연합군의 일본원정 과정에 대한 연구로는 다음의 글이 있다.
朴亨杓,<麗蒙聯合軍의 東征과 그 顚末>(≪史學硏究≫21, 1969).
金澈珉,<元의 日本遠征과 麗元關係>(≪建大史學≫3, 1973).
張東翼,<前期征東行省의 置廢에 대한 檢討>(≪大丘史學≫32, 1987).
金渭顯,<麗元 日本征伐軍의 出征과 麗元關係>(≪國史館論叢≫9, 1989).

 고려가 일본원정에 참여하게 된 시초는 몽고사신을 안내하여 일본을 招諭케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면서부터이다. 원종 7년(1266) 몽고가 黑的과 弘恩을 사신으로 일본에 파견하면서 고려로 하여금 그들을 안내하게 하자 宋君斐·金贊 등이 호송을 맡았으나, 거제도에 이르러 풍파가 험하다는 이유로 귀환하였다. 그 다음해에 몽고는 일본 초유를 고려에 위임하였고 고려는 潘阜를 파견하여 몽고 및 고려의 국서를 가지고 일본에 가게 하였으나, 일본에서 받아들이지 않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10여 차례에 걸쳐 몽고인과 고려인이 일본에 파견되었으나 구류되거나 피살되어 몽고의 일본 초유책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처럼 몽고의 일본 초유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초유과정에서 몽고는 자기 나라와 고려에서 전함을 만들기도 하였고, 흑산도를 위시한 고려의 남단에 사신을 파견하여 지형을 정찰하기도 하였다. 또 군량의 확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고려에 둔전을 설치하고 원종 11년에는 그 경영을 위해 屯田經略司를 설치하여 몽고군을 鳳州·金州·鹽州·黃州·白州·海州 등 10여 곳에 파견하였다. 이어서 몽고는 둔전의 경영을 위해 막대한 양의 농우·농기구·종자·군량 그리고 우마의 사료 등을 요구하여 고려의 경제적 기반을 크게 손상시켰다. 고려는 전쟁으로 인한 황폐화 속에서 몽고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크게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고, 민중은 농우·농기구·종자 등을 수탈당해 생업을 잃고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거기에다가 몽고는 둔전경략사를 통한 군량확보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해마다 군량의 보조를 강요하여 고려정부를 곤경에 몰아 넣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핑계로 고려의 내정을 여러 가지로 간섭하였다.

 둔전경략사를 통한 군량확보, 고려정부의 군량보조 및 전함건조, 이를 독려·감독하기 위한 몽고사신의 파견 등에 소요되는 경비의 대부분을 고려측이 부담하였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러한 준비과정을 거쳐 충렬왕 즉위년(1274)에 東征都元帥府의 蒙漢軍 25,000명을 중심으로 하여 제1차 일본 원정이 단행되었다. 동정도원수부는 고려에 주둔해 있었던 몽고군과 요동 및 한반도 북부출신으로 몽고에 귀부한 고려인 출신의 군인을 주축으로 하고 있어 이들의 뒷바라지는 대부분 고려가 짊어졌다. 게다가 고려도 군사 8,000명, 뱃사공 6,700명 그리고 전함 900척을 준비하여 이에 참전하게 되어 인적·물적으로 크게 수탈당하였다.

 제1차 일본원정이 태풍으로 전쟁을 해보지도 못한 채 실패로 끝나자, 원 세조는 그 계획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본에 宣諭使를 파견하는 한편 전쟁준비를 계속 지시하였다. 그러다가 충렬왕 5년에 남송을 완전히 정복하여 어느 정도 여력을 갖추게 되자 일본원정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이 때 고려는 남쪽 연변을 침략하기 시작한 왜구의 퇴치 및 몽고제국 내에서의 위치를 강화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로 인해 충렬왕은 일본원정의 추진기관인 征東行中書省의 丞相에 임명되어, 고려에 주둔한 忄斤都·洪茶丘 등과 같은 몽고 장수들의 횡포를 어느 정도 억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려는 또다시 큰 부담을 지게 되었다. 이 때 고려는 군사 10,000명, 사공 15,000명, 전함 900척, 군량 11만 석을 위시하여 많은 무기를 준비하게 되었는데, 이를 위해 국가의 모든 생산력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2차 일본원정은 고려에 위치한 정동행성 휘하의 고려군·몽한군 및 중국의 강남지방에 위치한 征日本行省 휘하의 江南軍까지 합세하여 일본을 공격하였으나, 태풍을 만나 10여 만 명의 인명 손실을 낸 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렇게 두 차례의 원정이 실패로 돌아간 뒤에도 원 세조의 집념은 여전하여 이후 여러 번 원정계획과 준비가 반복되어 제2차·제3차 정동행성이 중국의 강남에 설치되기도 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고려는 계속해서 시련과 희생을 당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처럼 원의 일본원정에 따른 고려측의 부담은 모든 생산력을 기울여야 할 만큼 컸지만, 그에 대한 반대 급부는 아무것도 없었다. 곧 제1차 원정 때에 동원된 고려의 막대한 군사력에 비해 고려의 장수들은 원의 장군직조차 제수받지 못하고 정동도원수부의 지휘하에 전쟁에 임했다. 또 제2차 원정을 위해 설치된 정동행성의 구성에서도 왕이 승상직에 임명되었을 뿐 여타 行省官에 고려인은 전혀 기용되지 못했다. 단지 고려의 장군 43명이 萬戶·千戶·摠把 등의 원의 군관직에 임명되었으나 이후 이들의 일부만이 관직을 유지하면서 원의 대고려견제책에 이용되어 고려의 중요 군사활동에 참여했고, 자손들에게 그 관직을 세습시키면서 附元的 성향을 물려 주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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