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이 고려에 가한 정치적 간섭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제후국으로의 강등 조치, 혼인정책과 지배층 분열정책, 입성론과 노비개혁론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를 순서에 따라 간략히 검토하기로 하자.
가) 제후국으로의 강등 조치
몽고가 파견한 다루가치의 정치적 간섭과 함께 고려에 주둔한 몽고군 지휘관들의 내정 간섭을 강하게 받게 된 고려는 몽고의 제후국으로 지위가 격하되어 갔다. 이 시기에 이루어진 제후국으로서의 강등 조치는 다음과 같다. 고려 국왕은 祖나 宗과 같은 묘호를 사용할 수 없고 원의 諸王이나 재상들이 사후에 부여받는 忠字를 포함한 묘호를 원으로부터 받아야 했다.325)≪高麗史≫권 33, 世家 33, 충선왕 복위년 10월 병신. 또 자주국의 국왕으로서의 위상이 상실되어 의식·의복·용어 등이 모두 제후국의 그것으로 격하되고 말았다. 또 의식에서 왕의 행차시 山號·萬歲 등을 부를 수 없게 되고, 黃袍의 착용이 저지되었으며,326)≪高麗史≫권 32, 世家 32, 충렬왕 27년 5월 병오. 종래 사용했던 여러 가지의 용어도 격하되었다.327)≪高麗史≫권 28, 世家 28, 충렬왕 2년 3월 갑신.
이러한 형편에 의해 정치제도도 지위가 격하되어 고려 전기 이래 당나라·송나라 제도를 바탕으로 한 3省 6部 및 樞密院을 중심으로 했던 정치체제가 붕괴되어 6典조직의 기능이 약화되었으며, 僉議府 및 密直司의 양부하의 4司체제로328) 이 4司체제로의 변경은 이보다 10년 전인 1264년(至元 1) 이래 원에서 6部를 4부로 일시 축소시켰다가 다시 6부로 환원하는 등 6차에 걸친 변동이 있었는데, 이와 어떤 관련성이 있는 것 같다(≪元史≫권 85, 志 35, 百官 1). 축소되었다. 이러한 여러 관부의 개폐를 통합 또는 명칭의 변경은 그 기능이나 역할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은 아니었고, 단지 원의 그것과 대비하여 하위로 격하시킨329) 최고 관부인 첨의부는 원의 官署 등급에 의해 정4품 아문이 되었는데, 그 위치는 원의 6부 예하의 諸寺·諸監(정3품∼종3품)보다 하위였고, 후일 종3품, 종2품으로 승격되었으나, 이 위치조차 위상이 크게 약화된 6부와 비슷한 위치였다(≪元史≫권 91, 志 41 上, 百官 7). 동시에 그들의 고려에 대한 내정 간섭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기구의 간소화를 꾀한 것이었다.
이러한 현상들은 결국 고려가 원의 한 제후국으로 전락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며, 이로써 국내에서의 국왕의 지위까지 약화되었다. 그 후 후기 정동행성이 설치되면서 고려왕조는 비록 외형상이지만 원의 하나의 지방 행정구역으로 변모되었다.
나) 혼인정책과 지배층 분열정책
고려왕실이 격하되게 된 또 하나의 단서는 여·원왕실의 혼인에 의한 것이었다. 무신 집권자들에 의해 추락된 왕권을 회복시키기 위해 원종은 몽고의 후원을 받고 여·원왕실간의 혼인을 요청하였다. 이는 원 세조의 대고려 회유정책에 의해 수락되어 고려와 원의 왕실은 한집안과 같은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고려왕은 원 왕실의 왕자나 부마격으로서 제왕의 하나가 되었다.330) 여·원간의 왕실혼인에 대해서는 蕭啓慶,<元麗關係中的王室婚姻與强權政治>(≪元代史新探≫, 新文豐出版公司, 1983) 참조. 이로써 고려 국왕은 독립된 왕국의 통치자로서가 아니라 원 제실의 부마로서 원제국 안에서 확고한 지위가 보장되었고, 이 지위를 이용하여 국내에서의 왕권을 어느 정도 신장시킬 수 있었다. 이는 고려가 세계적인 제국인 원의 지배하에서 끝까지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중요한 한 요인으로서 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고려측의 외교적 노력에 큰 성과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위상은 고려왕실의 격하라는 절대적인 희생 위에서 얻어진 것에 지나지 않았다. 곧 원은 공주의 下嫁를 통해 고려왕실을 그들에게 부속·접목시키고, 이를 통해 고려왕실의 감시, 국왕의 자주적 성향 견제 그리고 내정 간섭 등을 효과적으로 도모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고려 왕위의 여탈이 그들의 마음대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는 고려왕위가 원제국 지배체제 내에서의 부마·제왕의 위상으로 존재했으므로, 원 왕실내의 제왕의 分封·폐지 또는 원 행성의 승상직 교체와 동일한 수준에서 고려의 왕위도 교체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원 성종의 사후 황위계승전의 향방에 따라 충렬왕·충선왕의 고려왕으로서의 위상이 달라졌던 점이나, 文宗·寧宗·順帝의 제위교체에 따른 심각한 황위쟁탈전 속에서 재상인 燕帖木兒와 伯顔의 집권에 따라 충혜왕의 즉위·폐위·체포 등이 이루어진 것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고려왕위의 빈번한 교체는 고려가 원제국 내에서 외형상으로는 독립된 번국(外藩)으로 존재했지만 실제로는 內藩과 비슷한 위치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원에 의한 국왕의 퇴위 및 소환 조치는 왕위쟁탈전을 야기시켰다. 대표적인 예로 충선왕의 퇴위에 뒤이은 충렬왕과 충선왕의 대립, 충숙왕의 소환·구류를 즈음한 심왕 暠의 도전 및 그 연장 속에서 이루어진 충숙왕·충혜왕·심왕 고의 3자 대립 등을 들 수 있다.331) 충숙왕 6년, 충선왕에 의해 만들어진 金字大藏經의 發願文에 의하면, 충선왕의 아들로 王燾·王暠·王煦의 3인이 나타난다. 이들은 각기 親所生인 충숙왕, 조카로서 입양된 심왕 고, 權溥의 아들로 입양된 왕후 등으로 親子와 養子가 구분없이 동등한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준다(千惠鳳,<瀋王 王璋發願의 金字大藏 三種>(≪書誌學報≫1, 1990). 이러한 부자·형제·숙질간의 왕위를 둘러싼 대립이 일어난 것은 원의 왕실 및 재상들의 영향력이 고려 왕위 계승에 강하게 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갈등은 원에 의한 遼瀋지방의 심왕(처음의 瀋陽王)과의 대립·조장으로 더욱 심각해져, 고려 왕실의 후예가 고려왕과 심왕으로 갈라지면서 고려 및 원에서의 주도권 쟁탈을 위한 양자의 심각한 대립이 계속되었다.332) 이에 대한 새로운 자료로는 遼陽等處行中書省左丞額淋沁公神道碑(黃溍,≪文獻集≫10, 上)가 참고된다. 이러한 대립 양상은 고려 말인 공민왕대에 심왕 고의 손자인 篤朶不花가 고려왕이 되려는 의도에까지 연결된다.333)≪高麗史≫권 91, 列傳 4, 宗室 2, 江陽公滋 附 瀋王暠. 이러한 대립은 기본적으로 원의 분열정책에서 기인한 것으로 원에 진출해 있던 고려인 세력이 양측에 가담하여 심각한 후유증을 남기게 되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입성문제까지 제기되게 되었던 것이다.
원의 고려 분열책동은 고려의 관료층에게도 추진되었다. 고려왕조가 원제국 지배체제내에 정착하게 되면서 정치·사회적으로 큰 변화가 초래되었는데, 그 중 주목되는 것의 하나가 원과의 관련하에서 이루어진 새로운 정치지배세력의 등장이다. 이는 국제관계에서 한 국가가 특정국가의 주권에 영향을 미치게 될 때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의 하나로서, 당시 원의 영향력이 고려에 강하게 침투하는 속에서 양국의 외교관계에 관련된 인물들이 정치적으로 부상될 수밖에 없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외교에 따른 통역관층·助兵에 따른 군관층·공물 요구에 따른 鷹坊 관료층 그리고 왕실의 혼인에 따른 怯怜口層 등의 부류이다.334) 이들의 정치적 진출에 대해서는 閔賢九,<高麗後期의 權門世族>(≪한국사≫8, 국사편찬위원회, 1974) 참조. 이들은 고려 전기 이래의 전통적인 지배층의 충원 방식이 소멸되지 않은 가운데 새로운 방식으로 등용되어 지배세력이 되었다. 이들 새로운 관료층의 양산으로 인해 관료층은 포화상태에 이르게 되었고, 한정된 관직으로서는 그들의 정치적 참여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가 없었다. 따라서 지배층간에 높은 관직을 차지하여 정치적 지위를 확보하려는 노력이 맹렬히 전개되었는데, 그 지름길은 국왕의 신임이나 원의 후광을 받는 것이었다.
그런데 고려 왕권이 원에 의해 크게 견제되고 있었던 당시 상황에서는 국왕의 신임보다는 원의 영향력을 이용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다. 그래서 관료 중에는 고려내에 존재했던 정동행성, 제군만호부 그리고 고려도원수부 등을 매개로 원의 관직을 수여받아 친원적인 경향을 띠는 경우가 많았다.335) 宋寅州,<元壓制下 高麗王朝의 軍事組織과 그 性格>(≪歷史敎育論集≫16, 1992), 93∼97쪽. 또 원에 진출한 공녀·환관·고려인 출신 고관 등을 통한 원과의 연줄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비정상적인 방식에 의해 관료 및 관료 예비군이 팽창하는 속에서 관료들간의 관직을 둘러싼 대립이 크게 일어났고, 그것은 국가정책의 결정이나 집행을 둘러싼 갈등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었다. 원의 강한 내정간섭하에서 자주적인 국가운영이 불가능했던 당시로서는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래서 원에 의해 이루어진 잦은 왕위 교체에 편승하여 지배층은 각기 파당을 형성하여 왕실의 부자·형제·숙질을 각기 편들면서, 국가운영을 둘러싼 대립과는 거리가 먼 왕위 쟁탈전에 휩쓸리게 되었다.
이러한 왕위 쟁탈전에 휩쓸린 고려 지배층의 대표적인 분열의 예를 들면, 충렬·충선왕의 대립 속에서 일어난 韓希愈·李英柱와 金忻·印侯의 대립, 충숙왕과 심왕 고의 대립에서 빚어진 曹頔·蔡河中과 柳淸臣·吳潛의 대립, 충숙왕과 충혜왕 측근세력들의 대립, 조적의 반란으로 인한 충혜왕당과 조적당의 대립 그리고 충정·공민왕의 즉위 과정에서 나타난 지배층의 분열 등을 들 수 있다.
원은 이러한 지배층의 분열·대립을 기화로 충렬·충선왕대에는 정동행성관을 증치하여 고려의 국정을 직접 장악하기도 하였고, 충숙왕대 이후에는 정동성관의 驅使 또는 사신을 직접 파견하여 이를 해소하려 하였지만, 원인들의 독단과 불법으로 혼란만을 가중시켰다. 그러한 과정에서 원은 대립하는 각 파당의 어느 한 편을 들지 않고 늘 양측을 원에 불러들여 對辯시키되,336) 그 대표적인 예로 고려 軍額문제로 李藏用과 王淳의 대변, 韋得儒의 무고로 인한 金方慶과 위득유의 대변, 洪重喜의 무고에 의한 충선왕과 홍중희의 대변, 조적의 난으로 인한 조적당과 충혜왕당의 대변 등을 들 수 있다. 양자의 주장을 함께 받아들이면서 어떠한 결말도 내리지 않아 새로운 불씨를 남겨 놓곤 했다. 또 특정 사건 발생시에 誣告를 했거나 치죄 대상이 된 인물에 대해서도 가벼운 처벌을 내려 곧 방면함으로써 고려의 왕권을 제약하려 하였으며, 고려왕이 법을 위반한 관료를 스스로 치죄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황제에게 품의하여 결단하도록 하였다.337)≪高麗史≫권 29, 世家 29, 충렬왕 5년 정월 무진 및 권 31, 世家 31, 충렬왕 25년 4월 신해. 이는 원이 고려의 지배층을 분열·대립시켜 고려측의 자주적인 국가운영을 저해하려고 하였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이와 함께 후술하는 바와 같이 고려 지배층의 분열과정에서 몇 차례에 걸쳐 제기된 입성문제에 대해서도 이를 교묘히 조종하여 고려의 국론을 크게 흔들어 놓기도 하였다.
한편 원은 고려와 접촉한 이래 고려내에 그들의 향도세력 양성에 힘써 많은 부원배를 양성하였다. 이들 부원배들은 고려의 허실을 몽고에 보고했고, 고려가 자주적 성향을 조금을 보여도 원에 고해 이를 극력 저지하였다. 또 이들은 원의 세력을 배경으로 위세를 부리면서 고려에서의 우월한 정치적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왕위 계승전에 적극 참여했고, 국왕과의 충돌에 있어서도 공공연히 왕명에 불복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의 횡포로 왕권은 더욱 추락하게 되어 이들의 제거 없이는 정상적인 국가 운영을 기대할 수 없는 형편에 이르게 되었고, 이들로 인해 지배층 사이의 대립·투쟁은 더욱 심각해져 갔다.
다) 입성론과 노비개혁론
원이 고려에 가한 정치적 간섭 중 비록 관철되지 않았지만 가장 큰 소용돌이를 일으킨 것은 立省論과 노비개혁론이었다. 입성론은 원의 여타 행성과 달리 운영되어 어느 정도 독자성을 띠고 있었던 정동행성의 체제를 원의 그것과 같은 체질로 바꾸려는 논의였다. 이것은 고려의 자주성을 완전히 부인하고 고려를 본토의 영토와 같이 만들려는 정책으로서 정동행성관의 증치를 통한 정치적 압제가 소기의 효과를 거두지 못하게 되자, 새로운 방법의 모색으로 나타난 것이다.338) 高柄翊, 앞의 글(1970), 238∼250쪽.
北村秀人,<高麗末における立省問題について>(≪北海道大學文學部紀要≫, 14-1, 1965).
이는 정동행성 행성관의 증치 말기였던 충선왕 복위(1308∼1313) 이후부터 충혜왕 복위 4년(1343)까지 약 30여 년에 걸쳐 5차례 제기되었다. 이 입성론은「立行省 削國號」·「立省 比內地」등과 같은 구호하에 고려왕국을 소멸시켜 중국내의 여러 행성들과 같은 위치로 떨어뜨리고 고려의 백성들을 원의 軍民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이는 기본적으로 고려의 독립된 국가로서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으로서, 어떤 때는 원조정에서도 그 논의가 상당히 진행되어‘廢其國 爲郡縣’하여‘立三韓省 制式如他省’하려는 단계까지 이르기도 하였다.339)≪元史≫권 178, 列傳 65, 王約.
≪新元史≫권 198, 列傳 95, 回回.
宋濂,≪宋景濂未刻集≫下, 喀喇公神道碑銘.
이에 대해 고려의 지배층은 자신들이 누려왔던 현실적 지위를 상실당하는 것이었기에 강력한 반대를 전개하였으며, 원에서도 찬반 양론이 있었다. 원의 반대론자는 丞相 拜住·集賢殿大學士 王約·僉議中書省事 回回·通事舍人 王觀 등을 들 수 있다. 그 중 왕관은 고려는 원의 동족 울타리로서 원과 혼인으로 맺어진 국가이므로 긴밀한 관계를 지니며, 풍토와 습속이 중국과 달라 원의 법제를 실시하면 차질이 생기고, 토질이 빈약하므로 변경을 지키는 군인의 경비를 원이 부담하게 되어 이득이 없으며, 고려의 불충한 한두 사람의 청원으로 이를 실시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340)≪高麗史≫권 125, 列傳 38, 姦臣 1, 柳淸臣.
이러한 입성론은 遼陽의 홍씨세력, 심왕과 그 일당, 왕위 계승을 둘러 싼 고려 지배층의 분열, 정동행성을 매개로 고려와 관련을 가진 한인 그리고 부원배의 책동 등과 같이 고려와 관련된 인물에 의해 제기되었다. 이에 대해 원측은 武宗 이래 빈번한 제위 교체와 권신들의 세력 쟁탈로 인해 정국이 혼란하여 중앙의 대지방 통제력이 점차 약화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를 원 국내와 같이 만들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입성론이 제기될 때마다 원은 많은 논의를 거쳐 신중히 대처하여, 고려를 독립된 번국으로 존속시킨다는 기본 방침을 그대로 준수하였다. 그렇지만 원은 입성론을 계기로 고려에 대한 내정간섭을 강화하여 그들에게 더욱 속박시키는 정책을 밀고 나가기 위해 이를 방관 또는 조장하였다.
입성론과 함께 원이 고려를 곤경에 몰아 넣은 것은 고려의 노비제 개혁문제이다.341) 노비제 개혁에 대한 서술은 張東翼, 앞의 글(1990) 참조. 이는 고려가 원에 복속된 이후부터 원의 압제가 계속되는 동안 고려에 파견된 원나라 사람들에 의해 몇 차례 제기된 바 있었다. 곧 원종 12년(1271)에 파견된 다루가치의 시도 및 세조 때 監國으로 파견된 帖帖兀의 시도가 있었다. 그 후 충렬왕 26년(1300) 闊里吉思의 개혁시에 구체적으로 추진되었고, 이것이 실패로 끝난 30년 후인 충혜왕 즉위년(1330)에도 입성론과 함께 또 다시 제기되었다. 이 중 활리길사에 의한 노비제 개혁 이외에는 구체적인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어떠한 성격의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활리길사의 그것을 통해 그 대체적인 성격을 유추해 보기로 하자.
활리길사에 의한 개혁 중 노비제 문제는 ‘驅良公事’라 하여 良賤交嫁에 의한 노비판별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노비의 부모 중 한쪽이 良人이면 양인으로 하는‘一良則良法’을 시행하려 하였다. 그런데 당시 원에서는 법제적으로 양천교가가 금지되어 있었으나, 사실상 양·천인간의 통혼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단지 良家女가 奴에게 시집을 가려 할 때는 관의 허락을 받되 노비가 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었다. 이러한 양천교가에 의한 소생의 신분 귀속 여부는 모친의 혼인형태에 따라 양·천이 구분되었다. 그렇지만 활리길사가 고려에서 시행하고자 했던 노비개혁은 이러한 원나라 제도보다는 내용이 확대되어 천인의 광범위한 양인화가 가능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이 개혁 내용은 ‘一賤則賤’을 祖宗의 成憲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고려정부 및 지배층의 이익에 심한 타격을 주는 것이었다. 노비는 토지와 함께 중요한 경제기반으로 국가나 개인의 성쇠와 직결되는 것이었고, 지배층은 노비제도가 계급적 질서를 유지하고 예의와 풍속의 교화를 진작시키는 근본이라 믿었다. 이러한 노비관 때문에 노비제의 개혁에 대한 고려측의 반발은 강력하였다.
활리길사가 원의 노비 법제를 초월하여 고려에서 ‘一良則良法’을 실시하고자 했던 의도는 분명히 알 수 없으나 그가 고려에 오기 1년 전 福建行省에서 權豪의 경제적 기반 확장을 봉쇄하려고 한 사실과342)≪元典章≫권 25, 戶部 11, 影避, 休遮護當差事.
≪元史≫권 20, 本紀 20, 成宗 大德 3년 6월 무오. 관련시켜 볼 수 있다. 즉 그것은 고려에서 행한 노비제 개혁이 지배층의 경제적 붕괴를 초래한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그런데 당시 고려에서의 노비신분 세습은 隨母法에서 ‘일천즉천’으로 확대되어 노비신분의 세습제와 노비증식책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는 노비가 국가의 중요한 생산수단으로 국가의 공적 생활에 있어서 公賤의 노동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고, 또 지배층의 사적 생활에서도 그들이 소유한 私賤의 힘에 의존하는 바가 매우 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활리길사에 의한 노비제 개혁이 ‘일양즉양’으로 전개되어 지배층의 경제적 기반을 크게 흔들어 놓는 결과를 가져오게 됨은 분명하다. 또 노비에게는 광범위한 贖良의 기회를 주게 되어 고려사회 계급체계의 일부를 붕괴시켜 고려왕조의 근본을 뒤흔들 위험성을 가지고 있는 조치였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활리길사의 노비제 개혁은 고려의 지배층을 약화시키고 더 나아가서 고려의 신분질서를 재편성하여 궁극적으로 원의 지배를 더욱 공고히 하여 고려를 원의 본토와 동일하게 하기 위한 조치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의도에서 이루어진 노비개혁은 상당한 수준으로 진전되었지만, 고려정부 존립의 기반을 흔드는 것이었기 때문에 고려 정부와 노비 소유주의 반발을 받아 실패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그의 개혁이 실패로 끝난 30년 후에도 입성론과 함께 연계되어 다시 제기되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는 단순한 내정간섭의 범주에 속한 것은 아니었다. 원이 계속 고려의 노비제 개혁에 집념을 보인 구체적 의도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활리길사의 개혁에 나타난 원의 의도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 지배층의 경제적 기반을 붕괴시킴과 동시에 고려의 사회신분 구조를 원과 비슷하게 변모시켜 고려를 그들의 內地와 동등한 입장으로 지배하려는 의도가 내재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