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이전 한·중 사이의 경제적 교류는 일반적으로 朝貢과 回賜의 공식적인 무역형태로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여·원간의 경제적 교류는 군사적인 침공과 뒤이은 지배·복속의 정치적인 예속을 주축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양국의 호혜적인 무역거래보다는 압제를 받은 고려의 희생을 바탕으로 전개되었다.
고종 6년(1219) 이래 몽고는 江東城에서 고려군과 연합하여 거란족을 격파한 후 고려와 형제관계의 외교관계를 맺으면서 군사적인 우위를 기화로 사신을 자주 파견하여 이른바 歲貢을 강요하였다. 그 주된 품목은 비단·모시·붓·종이·수달피 등으로, 많은 양을 강요하는 가운데 몽고 사신들의 횡포가 매우 심하였다. 그 후 양국이 전쟁에 돌입하면서 몽고족의 강력한 무력을 제압할 수 없었던 고려정부는 한편으로 전쟁을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강화를 꾀하면서 몽고정부 및 침략군의 지휘관들에게 많은 물품을 주어 회유하려 하였다. 그렇지만 몽고는 고려가 부담하기에 어려울 정도의 공물을 요구하여 고려정부를 곤경에 몰아 넣었다.
이러한 형편은 고려가 몽고의 영향권 안에 들어간 이후에도 계속되어 몽고는 복속국들이 준수해야 할 六事를 고려에게도 예외없이 요구하였다. 이에 의한 공물의 납부 내용 및 규모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으나, 원측의 자료에 의하면 고려는 해마다 연초나 연말에 入貢使臣을 파견하여 歲貢·歲幣·方物 등으로 표현되는 공물을 바쳤다. 충렬왕 21년(1295) 제주도에서는 苧布 100匹·木衣 40葉·脯 6籠·獾皮 76領, 野猫皮 83領·黃猫皮 200領·鹿皮 400領·鞍轎 5副 등의 방물을 바쳤다.365)≪高麗史≫권 31, 世家 31, 충렬왕 21년 윤 4월 경오. 제주도가 이처럼 다양하고 많은 양의 방물을 바친 사실을 감안하면 고려정부의 공물은 엄청난 양에 달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공물 이외에도 원은 그들의 수요에 따라 각종 명목의 공물을 요구해 왔다. 그 주된 품목은 금·은·동·철 등의 각종 광산물, 도자기·金畵甕器·화문석·龍席·竹覃·金鐥·銀鐥·酒鍾·眞紫羅·黃漆·紙·藏經紙 등의 각종 수공업 제품, 비단·苧布·文苧布·細苧布·織紋苧布·布帛·皮貨 등의 의복 재료, 곡물·인삼·海菜·乾魚·乾脯·牛肉·鵠肉·鷂肉 등의 농수산물, 海東靑(鷹)·鷂·鷂子·鶻·馬·白馬·野稚 등의 동물 그리고 畵佛·대장경 등의 문화재 등이었다. 이에 비해 원이 고려에 하사한 것은 금·은·幣·西錦·약·서적 등으로 그 품목과 규모는 미미하였다.
이러한 원의 고려에 대한 경제적인 요구는 오랜 동안의 전란으로 황폐된 고려를 괴롭혔다. 특히 해동청 등과 같은 매의 요구에 응하여 응방이 널리 설치되었는데, 이 응방은 원의 세력을 등지고 여러 가지 특권을 행사하여 폐해가 많았다. 이러한 원으로부터의 요구는 결국 농민들의 부담이 되었고, 농민들은 고려와 원에 대한 이중적인 부담을 젊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많은 농민이 유민이 되어 각지로 떠돌아 다녔다.
이상과 같은 공물을 통한 여·원의 공적인 경제적 관계 외에도 양국의 접촉 초기에는 국경에 互市를 열어 서로가 필요한 물품을 거래하기도 하였으나, 고려가 몽고제국의 영향권 아래에 들어간 시기를 즈음하여 철폐되었다.366)≪元史≫권 5, 本紀 5, 世祖 中統 3년 정월 경오. 이후 양국간의 정치적인 긴밀한 관계에 동반하여 양국의 상인들이 자유로이 서로의 국경을 넘나들면서 활발한 교역을 전개하였다.367) 양국의 교역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이 참조된다.
陳高華,<元朝與高麗的海上交通>(≪震檀學報≫71·72, 1991).
張東翼,<高麗と元の間の經濟交流>(≪學人≫4, 中國 江蕭文藝出版社, 1993). 당시 양국간의 교통로는 육로와 해로의 두 통로가 있고, 그 중 해로는 북로와 남로의 두 갈래가 있었다. 육로의 경우 양국의 수도인 북경과 개경의 편도가 도보로 보통 1개월 정도 소요되었고,368) 高柄翊, 앞의 글(1970), 136쪽. 고려의 남단과 중국의 강남까지는 약 3개월 정도가 소요되었다. 해로는 당·송대 이래의 그것을 답습한 산동반도의 登州―옹진반도의 북로와 강남의 明州(寧波)―蓬萊―淮河入口―흑산도―개경의 남로가 있었는데, 이들 모두 편도 2∼3일 정도 소요되었다. 육로에 비해 해로는 짧은 시간에 상대국에 도달할 수 있었으나 험난하였고, 원의 수도가 북방에 위치하였으므로 사람의 왕래를 위시하여 간단한 화물의 운반은 주로 육로가 이용되었다. 해로의 경우는 육로가 너무나 멀어 시간의 단축을 위해서 이용되거나, 화물의 양이 많고 중량이 무거운 물건을 신속히 운반하기 위해서 많이 이용되었다.
이러한 교통로를 이용하여 양국의 상인들이 빈번히 왕래하며 활발한 무역을 전개하였다. 원의 상인이 고려에 진출한 예로는 廣寧출신의 상인이 고려에서 상행위를 하다가 법을 위반하여 제주도에 유배되었다던가, 강남의 상인들이 각종 물품과 노비를 배에 실어 고려에 진출하였다던가, 南蠻 상인이 안동지역에까지 진출하여 고려 여인과 혼인하여 정착하였던 사실 등을 들 수 있다.369) 程鉅夫,≪楚國文憲公雪樓程先生文集≫권 8, 太原宋氏善德之碑.
≪元典章≫刑部 19, 禁誘略 過房人口.
≪高麗史≫권 123, 列傳 36, 廉承益. 그 외 新安 앞바다에서 침몰된 원 선박의 존재 및 가요 쌍화점에 보이는 위구르 상인의 존재 등을 통해 원나라 상인이 고려에 많이 진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인이 원에 진출하여 무역한 예로는 충렬왕이 관료를 파견하여 益都府에서 麻布 14,000필을 판매한 것, 충렬왕비인 齊國大長公主가 인삼·松子 등을 강남에 보내 큰 이득을 보았다는 것, 충숙왕이 색목인 출신의 富商 崔老星(黨黑廝)을 측근으로 삼았던 점 그리고 충혜왕이 사적으로 원과 무역한 사례가 자주 보이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또 원의 수도인 연경의 조운 집결지인 通州 관내의 宛平縣에 고려인의 집단 거주지인 고려장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는 당대의 新羅坊과 유사한 존재였다. 이 고려장을 통해 고려인이 원내에서 활발하게 국제무역에 종사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의 산물이 무역을 통해 원에서 유통된 것으로는 화문석·茶·墨·紙·器皿·石溜璃·馬·熊掌·笠 등이 있었다.
이러한 양국간의 무역에 부과되는 세금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자료가 없다. 단지 원측의 한 자료에 의하면 고려 국왕이 사람을 보내 泉州·廣州에서 무역할 때, 그 곳의 市舶司에서 3/10세를 거두려고 하자(당시 원의 市舶稅는 1/10∼1/15였음) 浙江行省의 한 관료가 고려와 원의 긴밀성을 강조하며 시박세인 3/10은 면제하고 1/30의 商稅만을 징수하자고 주장한 사례가 하나 보인다.370) 姚燧,≪牧庵集≫권 16, 福建行省平章政事史公神道碑. 이것이 채택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양국간의 무역에 있어 시박세와 상세 등의 일정한 세금이 부과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