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가 원제국 지배질서하에 들어간 후 정치제도적인 면에서는 많은 변모가 있었으나 사회풍속면에서는 원 세조의‘土風不改’의 명에 의해 衣冠制度와 같은 토속의 공식적인 변화는 없었다. 그렇지만 원과의 관계가 장기간 지속되고 인적 교류가 빈번함에 따라 문물 교류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먼저 양국 왕실의 혼인관계로 인해 왕실을 중심으로 몽고인들의 생활방식인 몽고풍이 고려의 궁중을 위시하여 지배층사이에 널리 행해지게 되었다.371) 內藤雋輔,<高麗風俗に及ぼせる蒙古の影響に就いて>(≪朝鮮史硏究≫, 1961).
金庠基,<麗元間의 文物交流>(≪高麗時代史≫, 東國文化社, 1961), 678∼691쪽. 고려의 왕족이 원에 숙위로 장기간 체류함에 따라 앞머리를 깎고 뒷머리를 땋는 剃頭辮髮이라는 몽고식의 용모와 몽고식의 복장이 유행하였다. 또 몽고어가 널리 사용되어 정치제도에 있어 국왕측근 세력들에게는 必闍赤·速古赤·忽赤·愛馬 등과 같은 용어가 붙여졌으며, 공문서에 몽고식 어투가 많이 구사되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몽고식의 인명이 널리 사용되었고, 수라(水刺)·사돈(査頓)·단령(團領)·화자(靴子) 등과 같이 일상생활에서도 몽고어가 사용되었으며, 물고기의 이름에서도‘赤〔치〕’와 같은 용어가 많이 구사되었다. 그리고 몽고 지배층사이에 유행했던 畏吾兒 문자까지도 사용되었다. 또 원 공주들로 인해 몽고식의 천막 거주인 穹廬·氈幕·氈帳 등이 만들어지고, 몽고식의 부인 모자인 姑姑가 유행하였고, 몽고식의 각종 연회인 孛兒札宴·設比兒 등이 널리 보급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의복과 음식에 있어서 홀태바지·귀거리·달비·소주(아라끼酒) 등과 같은 풍속이 전래되었고, 才人의 각종 기술과 投錢 등에도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학술 종교적인 면에서는 더 큰 영향을 받았다. 일찍이 원 세조가“고려는 작은 나라이지만 匠工·奕技가 모두 한인보다 나으며, 儒人에 이르러서는 경서에 통하여 孔孟을 배운다. 그런데 한인은 오직 課賦 吟詩를 힘쓰니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라고 하여 고려의 문물을 찬양한 적이 있었으나,372)≪元史≫권 159, 列傳 46, 趙良弼. 원의 문물이 발전함에 따라 고려가 학술적으로 영향받은 것은 심대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의 하나가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유학사상인데, 이는 이후 우리나라 정신세계에 새로운 기풍을 조성하였다. 성리학은 安珦·白頣正 이래 고려인의 원 진출을 통해 자주적으로 수용되는 한편으로 정동행성 예하의 유학제거사를 통해 원인들에 의해 보급되기도 하였다. 그 학문적인 성격은 許衡을 중심으로 한 朱子의 道問學에 바탕을 두어 居敬을 위주로 실천윤리를 중시한 원의 북방유학이었다. 그 후 고려인의 원 制科 응시·국자감 입학 그리고 고려인의 광범위한 원 진출을 통한 강남 유학자와의 교유를 통해 窮理를 바탕으로 한 理氣論·心理論 그리고 주자의 학문에 陸九淵의 尊德性을 가미시킨 吳澄의 학풍이 수입되기도 하였다.373) 張東翼, 앞의 글(1992). 이러한 여러 갈래의 성리학은 고려에 도입되면서 불교 위주의 고려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어 큰 변화를 초래하였다.
한편 종교면에서도 원에서 유행하던 라마교·도교 그리고 강남의 불교 등이 수입되어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 라마교의 경우 고려의 불교를 사대적이고 세속적인 것으로 전락시켰다는 부정적인 면도 있으나, 그것의 전래와 함께 불교미술에 새로운 영향을 준 점에서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 강남의 불교 중 百丈海의 禪門淸規는‘一日不作 一日不食’을 슬로건으로 승려들에게 경작의 의무를 도입한 것인데, 이는 비대한 사원경제로 인해 사회에서 크게 지탄을 받고 있던 고려 불교계에 신선한 기풍을 조성하였다.
이 밖에 원에서 만들어진 授時曆·화약 등이 도입되어 고려의 과학 발전에 기여하였고,≪農桑輯要≫와 같은 농서가 전래되어 농업 발전의 한 토대가 되었으며 강남에서 유행하던 이앙법 및 목면이 전래되어 삼남지방 일부에서 시행 재배되기도 하였다.
한편 원에서도 고려인의 대대적인 진출로 인해 고려의 풍속이 유행되었다. 많은 고려 여인이 공녀로서 들어간 원의 궁중에서는 원 세조의 총애를 받은 宮人 李氏를 위시한 여러 궁인들의 비파솜씨로 인해 高麗樂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또 궁중에 소속된 고려인 급사·시녀들로 인해 고려방식의 의복·음식·기물 등이 유행하였는데, 이를「高麗樣」이라 불렀다. 당시 몽고인 사이에 유행했던 고려 의식주 생활의 대표적인 예로는 高麗饅頭·高麗餠·高麗雅靑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고려의 투항민과 유민들이 대대적으로 遼陽行省지역에 진출하여 농경생활을 지속하며 농지개혁을 꾀하였으므로 고려의 농법이 만주지역에 전수되었을 가능성도 높다.
<張東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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