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적이 우리 나라에 침입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다.≪三國史記≫와<광개토왕비문>은 당시 왜구 침입과 피해가 적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604)≪三國史記≫新羅本紀 始祖 8년·南海王 11년·祗摩王 10년·脫解王 17년·奈解王 13년조 등에 왜적이 침입한 기사가 보인다. 또한<광개토왕비문>에는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하게 했다. 男居城으로부터 신라성에 이르니 倭가 그 안에 가득찼다. 관병이 이르르니 왜적이 물러났다”는 기사가 보인다. 뿐만 아니라 문무왕이 왜구를 진압하기 위하여 바다 가운데 능을 만들도록 유언하였다는 사실과 신문왕 때의 感恩寺 창건에 얽힌 설화에서도 신라가 왜구에 대하여 얼마나 고심했는지를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왜구에 대한 기록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고종 10년(1223) 5월에 왜가 金州를 노략질하였다는 기사가 보인다.605)≪高麗史≫권 22, 世家 22, 고종 10년 5월. 계속하여≪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고종 12년 4월에 왜선 2척이 경상도 연해지방 주현에 침략하므로 군사를 일으켜 모두 잡았으며, 고종 13년 정월에도 왜구가 경상도 연해지방 주·군을 침입하였고, 같은 해 6월에 금주를 침입하였다. 또 고종 14년 4월에는 왜구가 금주를 침략하므로 防護別監 盧旦이 군사를 출동시켜 적선 2척을 사로잡고 적 30명을 죽였으며, 5월에는 왜적이 熊神縣을 침략하므로 別將 鄭金億 등이 산 속에 잠복해 있다가 적 7명을 죽였다.
고종 10년(1223)에서 14년에 이르는 5년간을 고려시대 왜구 흥기의 초기로 볼 수 있는데, 당시 고려의 사정은 내우 외환이 심해져 가고 있던 때였다.606) 당시 고려의 사정은 고종 3년부터 해마다 거란이 침입해왔고, 최씨의 독재정치가 심해 갔으며 고종 9년에는 義州賊 韓恂의 무리가 東女眞을 끌어들여 의주를 침범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때에 침입한 왜구는 주로 금주(김해)를 중심으로 일부분의 지역에 출몰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당시의 적의 위세는 미약했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에서는 매년 계속되는 왜구의 침입에 대하여 엄중한 항의를 했으며, 이에 대하여 일본측에서는 고종 14년 5월에 편지를 보내어 고려 변경을 침략한 죄과를 사과하고 아울러 우호관계를 맺고 통상할 것을 청하였다.607)≪高麗史≫권 22, 世家 22, 고종 14년 5월 을축. 이에 대하여 고려에서는 같은 해 12월 及第 朴寅을 일본에 보내어 왜 구의 침입을 금지해 줄 것을 교섭하니 일본은 박인이 보는 앞에서 적의 무리 90여 인을 잡아 죽였다.608)≪高麗史≫권 22, 世家 22, 고종 14년 12월. 이러한 고려측의 금구교섭 때문이었는지 고종 15년에서 46년에 이르는 30년간에는 적어도 문헌상으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기간에도 고려는 금주에 성을 쌓아서 왜구를 대비케 하였으며,609)≪高麗史≫권 82, 志 36, 兵 2, 城堡 고종 38년. 원종 즉위년 7월에는 監門衛錄事 韓景胤·權知直史館 洪貯를 일본에 파견하여 해적의 금지를 요구했다. 또 일본측 기록에 의하면 고려 고종 19년(1232)에 肥前境社의 주민이 야음을 타서 고려를 습격하여 재물을 도적질하여 돌아왔다고 한다.610)≪吾妻鏡≫後堀河 貞永 원년 윤9월 17일. 따라서 이 30년 동안에도 왜구의 침입이 계속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당시 고려의 사정은 거의 매년 왜구보다 규모가 큰 東眞兵·蒙古兵 등 북쪽 오랑캐의 침입에 시달려 강화도 천도까지 해야만 했다. 게다가 洪福源 등의 반란과 몽고병이 남하하여 내륙 깊숙히 들어와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고려는 왜구에 대하여 힘이 미치지 못하였으며, 왜구 또한 이 기간에는 규모가 작아서 연해의 도서지방을 약탈하는 정도였다. 그것도 장기간 주둔하기보다는 앞에 말한 바와같이 야음을 이용하여 빠르게 행동을 취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고려의 지방관리들은 잠깐 나타나는 왜구에 대하여 강화도의 조정에 보고하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이었다.
고종 15년 이래로 문헌상에 보이지 않던 왜구의 기사는 원종 4년(1263) 2월에 다시 나타난다. 왜구가 금주 관내인 웅신현의 勿島에 침입하여 조공선을 약탈한 사건이 그것이다. 이에 대하여 고려에서는 같은 해 4월에 太官署丞 洪泞·詹事府錄事 郭王府 등을 일본에 파견하여 禁賊을 교섭하였다. 당시 고려에서 보낸 첩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양국이 통교한 이래로 해마다 정해진 예에 따라 進奉하는데 한 번에 배 2척에 불과하며 혹 다른 배가 우리 연해 村里를 요란케 하면 엄하게 징계하고 금할 것을 약정하였다. 그런데 2월 22일에 배 한 척이 까닭없이 勿島에 들어와 곡미와 紬布를 약탈하고, 椽島에 들어와 백성들의 의복·식량 등 생활 필수품들을 약탈하여 정해진 약조를 어겼다. 이에 첩장을 보내니 약탈자를 추궁하여 징계함으로써 양국 화친의 意義를 공고히 하기를 바란다(≪高麗史≫권 25, 世家 25, 원종 4년 4월 갑인).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우선「進奉船」이다. 이 배로 매년 한 차례씩 진봉하는데 선박수는 2척으로 정하였으며, 그 외의 일본 배의 도항은 엄하게 징계하여 금하기로 약정되었던 것이다. 이것으로 볼 때 고려에서는 일찍부터 왜구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진봉의 형식으로 무역케 하였으며, 이 때 매년 2척으로 정한 것은 당시 고려가 왜인의 출입을 극히 제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일본에서 진봉선이라 칭한 것은 교역내용이나 성격이 완전한 朝貢下賜의 형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해 8월 홍저 등은 일본에 다녀 온 후, “해적을 추적하여 보니 대마도 倭奴들이었고, 그들에게서 쌀 20석, 귀밀 20석, 소가죽 70령을 징발해 가지고 왔다”고 하였다.611)≪高麗史≫권 25, 世家 25, 원종 4년 8월 무신. 그 후 원종 6년(1265) 7월에도 왜구가 남도의 연해 주군을 침구하니 장군 安洪民 등으로 하여금 삼별초군을 거느리고 방어케 하였다. 원종 때의 왜구에 관한 내용은 위의 두 기사 뿐인데, 이 때를 전후한 고려의 사정은 고려에 침입하여 주둔한 몽고병이 서서히 철수를 하는 등 여·원간의 화해분위기가 조성되는 시기로 고려에서는 원에 대하여 신경을 쓰던 때였다. 바로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왜구는 고려의 연해를 침구한 것이다.
원종 6년의 침구 이후로 충렬왕 6년(1280)까지는 왜구의 침입이 소강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이 때는 원의 일본정벌이 준비되는 기간으로 고려에서는 원의 강압에 의해 정벌 준비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이 기회에 원을 이용하여 일본을 철저히 토벌 경략케 함으로써 왜구의 근절을 도모하려고 하던 때였다. 따라서 고려에서는 타의적이나마 정벌군의 정비가 이루어지고 있던 때였다. 당시 일본은 여러 차례에 걸친 원 세조의 招諭를 거절하면서 원의 침입에 대비하던 때이며, 또 실제로 원의 東征이 있던 때이었으므로 왜구의 침구가 소강상태에 들어간 듯하다.
충렬왕 6년 5월에 왜구가 다시 固城과 合浦에 침구하여 어부를 납치해 갔으므로 대장군 韓希愈를 보내어 해도를 지키게 하고 또 忽赤·巡馬·諸領府 등에서 200인을 뽑아 경상도와 전라도를 나누어 지키게 했다. 또한 이듬해 10월에는 전주에 鎭邊萬戶府를 설치하여 방비에 주력하였다. 이러한 고려의 적극적인 방비책으로 그 뒤 왜구가 본격적으로 창궐하기 시작하는 충정왕 2년(1350)까지의 70년 사이에는 충렬왕 16년(1290)과 충숙왕 10년(1323)의 두 차례의 침구 기록밖에 보이지 않으며 그 피해도 경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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