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제1기(충정왕 2년∼공민왕 22년)
왜구가 창궐하기 시작한 것은 충정왕 2년(1350)부터라고 할 수 있다.≪고려사≫에 의하면“왜구가 고성·죽말·거제를 침입하니 合浦千戶 崔禪과 都領 梁琯 등이 이를 격파하고 300여 명의 적을 죽였다. 왜구가 우리 나라에 침입한 것이 이 때로부터 시작되었다”612)≪高麗史≫권 37, 世家 37, 충정왕 2년 2월.라는 기사가 보인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庚寅의 倭寇」이다. 여기에서 보이는“왜구의 침략이 이 때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기록은≪고려사절요≫·≪동사강목≫등 여러 문헌에도 보인다. 그러나 왜구의 침략에 관한≪고려사≫의 기록은 고종 10년(1223)에 이미 있었으며,「왜구」라는 말이 숙어처럼 된 것도 충렬왕 세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런데 특별히 여기에서 충정왕 2년이 왜구침입의 시작이라고 한 것은 주목할 만하며,≪고려사≫나 조선 초기 실록 등 여러 기록에서“庚寅以來倭寇”라고 한 기사가 보인다. 이 말은 전후 사정을 살펴볼 때 이 때 왜구의 침략에 의한 피해가 특히 컸고 또한 그 후에 계속적으로 침입하였기 때문에 경인년의 사건을 중시하였던 데서 나온 것으로 이해된다. 충정왕 2년은 여·원연합군의 2차 일본정벌이 있은 지 69년째로, 고려와 일본과의 관계는 이로부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때에 왜구가 창궐하게 된 이유에 대하여, 여·원연합국이 일본을 정벌했던 영향이 국민적 자각에 준 효과가 크고 또 자존심과 자부심을 향상시킴으로써 일본민의 고려에 대한 태도에 변화가 생겼고, 또한 당시의 격전지였던 대마도를 비롯한 博多 방면의 士民들이 과중한 전쟁비용의 부담에 의한 고통과 피해를 짊어져야 했으므로 왜구에 대해 지원했다는 견해가 있다.613) 靑山公亮,≪日麗交涉史の硏究≫(明治大學, 1955), 78∼79쪽. 그러나 고려 충정왕 2년 무렵 당시의 일본은 南北爭亂이 격화되던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민의 자부심이 발흥해 왜구가 창궐했다고 보기 어렵다. 그보다는 당시의 일본이 혼란기로서 치안이 어지럽고 폭력배들의 횡포가 증대해 각지의 군웅할거로 질서가 문란해졌으므로 궁핍한 변방민들의 해외 활동이 자유로웠을 것이다. 당시 고려는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연해의 방비에 힘을 기울여 왔으나 충정·공민왕 때에 이르러서는 원의 국내사정으로 고려에까지 원군을 요청하고, 고려는 이에 응하여 원군을 파견하여 남쪽의 방비가 소홀해졌다.
이러한 상황 아래 충정왕 2년 2월에 침입하기 시작한 왜구는 같은 해 4월에 100여 척이 순천·남원·구례·장흥 등 전라도지방을 침입하여 조운선을 약탈하였고, 5월에는 66척이 다시 순천에 침구하였으며, 6월에는 20척이 합포에 침구하여 합포영에 불을 질렀다. 계속하여 6월에는 장흥부, 11월에 동래군을 침구하였으며 진도현을 내륙지방으로 옮기는 사태에 이르렀다. 이렇게 충정왕 2년에 남해연안을 황폐하게 만들었던 왜구는 다음해에는 갑자기 북상하여 지금의 인천 앞바다에까지 이르렀다. 즉 충정왕 3년 8월에 왜선 130척이 紫燕島와 三木島에 침입하여 민가를 분탕하니, 조정에서는 萬戶 印璫·前密直 李權으로 하여금 西江에 둔을 치게 하여 대비토록 하였다.614)≪高麗史≫권 37, 世家 37, 충정왕 3년 8월 무자. 그러나 같은 해 8월에 다시 南陽府와 雙阜縣에 침입하여 식량을 약탈하였다. 이에 다시 인당과 이권에게 명하여 왜를 잡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권은“장수가 아니며, 祿을 먹지도 않으므로 명을 받들지 못하겠다”고 하며 나아가 싸우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들을 볼 때 당시의 왜구가 얼마만큼 맹위를 떨치고 있었는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왜구는 충정왕의 뒤를 이은 공민왕 때에 기세를 더하여 창궐하였다.
왜선이 대거 침입해 오니, 金暉南이 병사가 적어 대적하지 못하고, 西江까지 후퇴하여 구원병을 청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領兵들과 忽赤을 동원하여 西江·甲山 및 喬桐에 나누어 보내어 방비케 하였다. 부녀자들이 길에 몰려나와 통곡하고 都城이 크게 놀랬다. 또 百官과 民戶에서 군량과 화살을 차등있게 거두었다(≪高麗史≫권 38, 世家 38, 공민왕 원년 3월 기미).
이것은 왜구가 개경에까지 이른 최초의 기사이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공민왕 전시대를 통하여 왜구의 침입이 없던 시기는 왕 5년과 17년 두 해뿐이다. 우선 초기의 큰 사건을≪고려사≫공민왕 세가에서 살펴보면 원년(1352) 9월에 50여 척이 합포에 침입하였고, 왕 3년 4월에 전라도 조운선 200여 척을 약탈하였으며, 6년 9월에는 昇天府 興天寺를 약탈하고 며칠 뒤에 교동을 약탈하였다. 또 7년 3월에는 角山城(고성 부근)에 침구하여 고려의 배 300여 척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으며, 9년 5월에는 전라도 옥구지방과 양광도 평택·牙州(아산)·新平 등지에 침입하고 龍城 등 10여 현에 불을 질렀다. 다음 달인 윤5월에는 강화에 침입하여 관민 300여 명을 죽이고 쌀 4만석을 노략했으며 교동현에 불을 지르는 큰 사건이 있었다.
이처럼 왜구의 침입이 계속되던 당시 고려의 사정은 원과의 우호관계 속에서도 보다 독립성을 찾으려 애쓰던 시기였다. 공민왕 5년(1353)에는 雙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함주 이북의 땅을 수복하였으며, 원의 내란 진압에 고려군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공민왕은 북방의 실지회복에 주력하였고, 이 때까지만 하여도 왜에 대하여 그다지 큰 신경을 쓰지 않은 듯하다. 그런데 공민왕 7년에 들어서 심한 가뭄으로 각 지방에서는 굶어죽는 자들이 속출해 왕이 금주령을 내리고 스스로 하루 한 끼밖에 먹지 않으며 자성할 만큼 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국내의 혼란 속에 북방에서는 홍건적의 침입까지 있게 되니 고려로서는 남북의 두 외적에게 협공당한 형세가 되었다. 민심은 더욱 불안하고 개경에까지 자주 나타나는 적의 위세에 공민왕 9년(1360)에는 잠시 白岳(長端)으로 移御까지 하였다.615)≪高麗史≫권 39, 世家 39, 공민왕 9년 7월 신미. 왕 10년에는 홍건적의 2차 침입이 있었고 개경은 적에게 수개월 동안 점령당하기도 하였다.
왜구의 침구는 그 이후 더욱 격심해 갔다. 다시≪고려사≫공민왕 세가에 의하면「金鏞의 난」이 일어난 다음달인 공민왕 12년 4월에는 왜선 213척이 교동에 들어와 정박하였고, 이듬해 3월에는 왜구 200여 척이 葛島에 정박하였으며, 楊州에 침구하여 200여 호에 불을 지르기도 하였다. 또 동왕 19년 2월에는 內浦(충남 연해지방)에 침구하여 병선 30여 척을 부수고, 21년 6월에는 東界 安邊 등지에 침구하여 부녀를 사로잡고 倉米 만여 석을 약탈해 갔다. 이 때의 왜구 피해는“해변에서 50리 혹은 30, 40리 떨어진 곳에서야 살 수 있는데 이는 왜구 때문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616)≪高麗史≫권 42, 世家 42, 공민왕 19년 5월 갑인. 이러한 왜구의 침입에 대하여 고려조정에서는 都巡問使·萬戶·鎭邊使·防禦使·巡問使 등으로 하여금 대항하여 싸우도록 하는 한편, 군대의 증강과 훈련도 계속하고 있었다.
창궐기 초기의 왜구를 그 이전의 왜구와 비교하여 보면, 그 특징으로 침입지역이 금주(김해) 관내의 연해에서 전국의 연해 지역으로 확대되었다는 것과 수도인 개경 근해에 자주 출몰하였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남해의 일부분에서 모든 해안으로 침입이 확대되었다는 것은 계속되는 내란과 외적의 침입으로 국내 질서가 문란해진 사실과 한편으로는 원이 약해지는 기회를 이용하여 북방의 국경선에도 함께 관심을 쏟았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수도 개경부근에 자주 출몰한 것은 조운선과 조창을 습격한 것으로 미루어 전국의 租米가 집결되는 곳이기 때문에 개성부근을 자주 침구한 것으로 볼 수 있다.617) 수도 개경부근에 자주 출몰한 것에 대하여 靑山公亮(앞의 글)은“직접 중앙정부를 위협하여 통교의 정상화를 기하려는 의도였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당시 왜구는 일본을 대표할 수 있는 집단이 아니기 때문에 타당한 견해라고 볼 수 없다.
나) 제2기(공민왕 23년∼우왕 4년)
왜구 창궐의 제2기는 공민왕 23년(1374)부터라고 할 수 있다. 우선 통계상으로 볼 때 이 때부터 계속해서 침구 횟수도 잦아졌다. 창궐기 초기의 침구 횟수가 23년간에 134회인데 비하여, 제2기는 18년간 403회로 많은 증가를 보이고 있다. 이 숫자는 1년에 22.4회 이상의 많은 횟수이다. 특히 우왕 3년같은 경우에는 월평균 4.3회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고려사≫에는 공민왕 23년 이래 왜구가 다시 창궐했음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경인년부터 해적들이 나타나서 우리 나라 섬 백성을 침요하기 시작하여 백성들이 모두 손상을 입고 있는 것은 매우 민망한 일이다. 이 까닭에 병오년에 萬戶 金龍 등을 보내어 사태를 통보하였으며 그 때 해적을 금지하겠다는 征夷大將軍의 약속을 받아온 후 한동안 편안하였다. 근래 갑인년 이래로 해적이 또다시 창궐하므로 判典客寺事 羅興儒를 재차 귀국에 보내어 양국간에 해적이 또 준동하고 있는 것은 실로 불상사라는 뜻을 전하였던 것이다(≪高麗史≫권 133, 列傳 46, 신우 3년 6월 을묘).
위의 내용은 우왕 3년 6월 判典客寺事 安吉祥을 일본에 파견하여 전한 해적의 금지를 요구했던 서한의 일부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갑인년, 즉 공민왕 23년(우왕 즉위년)을 기점으로 하여 다시 왜구가 자주 침입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제2기 가운데서도 특히 우왕이 다스리던 시기는 왜구가 가장 극심했던 시기였다.≪고려사≫列傳 崔瑩條에 의하면 우왕 이후 왜적이 더욱 창궐하여 백성들이 전일에 비하여 살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우왕 원년에는 3도의 常徭·雜貢·鹽稅의 감면을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이 왜구의 피해가 커짐과 함께 침입 규모도 전에 비하여 훨씬 대규모로 변하고 있다. 즉 공민왕 23년 4월에는 왜선 350척이 합포에 침구하였고, 우왕 5년 5월에는 騎 700·步 2,000이 진주에 침구하였으며 이듬해 5월에는 왜선 100여 척이 結城·洪州에 침구하고 7월에는 왜선 500여 척이 鎭浦에 침구하였다.
뿐만 아니라 침입지역도 초기의 연해지방에서 내륙 깊숙히까지 침입하고 있다. 앞의<표 3>에 나타나 있듯이 제2기에만 177지역이 한 번에서 열번의 침입을 받았다. 이처럼 당시 왜구의 창궐이 극에 달하고 잔폭해진 원인은 당시 일본사정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일본은 남북조 쟁란기의 후반기(1372;고려 공민왕 21∼1391;공양왕 2)가 시작되어 懷良(皇子親王)이 九州에서 활동을 개시하기 시작한 때이다.618) 이 때부터 왜구가 극심하게 된 이유에 대해≪高麗史≫권 114, 列傳 27, 金先致條에는 우왕 초기에 김선치로 하여금 왜인 藤經光을 유인하여 살해하려고 했는데 계획이 누설되어 실패하였음을 전하고, 그 뒤부터 왜구가 침입할 때마다 부녀자와 어린아이까지 살상하였으므로 전라·양광도 연해 주군들은 텅비게 되었다고 하였다. 즉 김선치에게 원인을 돌리고 있는데 일본학자들은 이 기사를 크게 취급하여 왜구의 창궐이 마치 고려가 신의를 지키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대로 당시의 일본 국내사정이 왜구의 활동을 활발하게 한 원인이라고 보여지며 실제로 懷良이 大宰府를 함락시킨 1372년부터 왜구의 침입이 심하여졌다. 여하튼 이 무렵 왜구의 활동은 극성스러웠고 이에 따라 우왕 3년에는 개경이 바다에 가까워 왜구의 화를 당할 염려가 크다고 하여 도읍을 내륙 깊숙한 철원지방으로 옮기려 한 일도 있었다.
이처럼 제2기의 왜구는, 초기에 해안지방을 약탈하던 것에서 벗어나 점차 내륙까지 침입해 오고 그에 따라 전술도 바뀌었다. 즉, 초기 침입시에는 보이지 않던 騎兵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倭寇記≫에는 왜구가 말을 배 안에서 사육하고 상륙해서는 바로 기보대오를 만든다고 하였으며619) 竹越與三郎, 앞의 책, 24쪽. 우왕 3년(1377)에 黃山江에서 김해부사 朴葳와 싸운 覇家臺萬戶라는 왜장은 큰 말을 타고 싸웠다고 하였으며, 또한 황산대첩에서 이성계가 포획한 말이 1,600여 필이라는 것을 보아도 이 때의 왜구들은 내륙지방을 목표로 기병화한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왜구의 침입이 제2기에 들어와서 내륙지방으로 옮겨온 까닭은 무엇일까. 왜구는 해적이므로 해상이나 해안지대의 행동이 자유로운데도 행동반경에 한계가 있고 위험이 큰 내륙으로 옮기게 된 것은 연해 주군으로서는 침구의 목적을 달성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왜구로 인하여 해안의 주군은 미곡 생산이 격감되었고 조운이 통하지 않게 됨에 따라 조세의 운반을 해운에서 육운으로 옮기게 되었던 것이다. 이 제2기 동안에는 조운선을 습격당한 일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조운의 불통으로 해운에서 육운으로 옮기게 되니 해상에서 약탈행위가 어렵게 된 왜구가 내륙 깊숙히 들어오게 되었는데, 이것은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성계의 황산대첩 등 육지에서 왜구가 크게 패한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이 기간동안 또 한 가지 주의를 끄는 것은 이른바 假作倭寇 즉, 假倭이다. 가왜란 왜구의 잦은 출몰로 사회가 혼란해지자 이 때를 이용하여, 왜구를 가장하고 도적행각을 벌인 일부 국내의 不良民을 말한다. 이런 가왜의 신분은 대개 禾尺과 才人들이 대부분이었다.620)≪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戶婚. 이런 가왜들에 의한 피해도 자못 컸다. 우왕 8년(1382) 4월에 화척들이 왜적이라고 거짓으로 칭하고 관가와 민가를 털어 갔는데, 이 때 判密直 林成味 등이 포획한 수가 남녀 50여 명, 말 200필에 달한 것으로 보아621)≪高麗史≫권 134, 列傳 47, 신우 8년 4월. 그 규모도 상당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들은 교주·강릉도의 화척과 재인들의 집단 거주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경우가 많다. 이 지역에서 가왜가 나타난 것은, 당시 이 지역이 왜구의 침입이 가장 적은 지역이었으므로 왜구를 막기 위한 관리를 파견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당시 고려 조정은 왜구가 많이 출몰하는 지역에 대하여는 군대 등을 파견하여 치안관계 등에 신경을 썼지만 교주도나 강릉도는 비교적 그렇지를 못했던 것이다.
우왕 6년(1380) 진포싸움에서 패퇴한 왜구는 우왕 9년을 고비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니 이 기간은 왜구가 창궐기를 지나 점차 쇠퇴해가는 시기이다. 침입 횟수도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우왕 9년에 50회 침구하였던 왜구가 10년에는 19회로 줄어들었으며 계속해서 격감하고 있다. 이 때부터 마지막 9년간에 침구한 횟수는 72회로 연평균 8회가 되는데 이는 전에 비하여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또한 규모에서도 소규모로 축소되었다. 이 기간에 가장 큰 왜선단은 80척으로622)≪高麗史≫권 137, 列傳 50, 신우 14년 5월. 100척을 넘지 않았다.
이처럼 왜구가 쇠퇴해 간 이유로는 우선 화약·화포 등의 신병기로 인해 고려군의 전력이 강화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우왕 6년 8월 진포싸움에서 화포를 사용하여 500여 척의 왜구를 전멸시킨 대타격 이후로 왜구는 쇠미해 가는 기색이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또 우왕 9년의 관음포싸움에서 승리한 고려군이 이듬해 10월에는 왜구 침입의 근거지라 할 수 있는 丑山島에 船卒을 주둔시키는 데 성공하여 이후로 왜구의 걱정이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623)≪高麗史≫권 113, 列傳 26, 尹可觀. 그 후 고려에서는 왜구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대책을 추진하여 무력으로 토벌하기에 이르렀다.
우왕 14년(1388) 8월에는 鄭地 등이 왜적과 싸워 50인을 죽이고 60여 필의 말을 얻었다. 이러한 왜구에 대한 적극책은 이후로 계속되어 공양왕 원년(1389) 박위의 대마도정벌 이후에는 더욱 적극적인 대책으로 변화하였다. 그 결과 공양왕 2년에 6회, 3년에 1회, 4년에 1회에 걸쳐 왜구가 침구했을 뿐이다. 이러한 숫자는 전과 비교하여 왜구가 창궐하던 시대가 끝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 시기의 고려는 정치적·경제적으로는 말기적 현상을 나타내고 있으나, 이성계·조준·정지 등의 신진관료층에 의하여 군사력이 강화되고 기강의 확립을 추진하는 등 내부적으로 서서히 국력을 회복하려는 단계였다. 특히 우왕 10년 축산도에 군대를 주둔시킨 이래 섬을 수색하여 왜구를 포획한 것은 이전에는 없었던 일로, 고려의 군사력이 강화되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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