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는 왜구의 침입에 대해, 처음에는 변방을 괴롭히는 대수롭지 않은 해적으로 취급했으며, 왜구로 인하여 국가의 영토를 상실한다거나 하는 등의 일은 생각지도 않았다. 그것은 같은 시기에 있었던 북방 홍건적의 침입과 왜구의 침입에 대처하는 고려의 태도를 비교할 때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왜구의 규모가 커지고 왜구로 인해 국정이 문란해짐에 따라, 이에 대해 보다 강경책을 써서 토벌을 감행하였다. 그 예를 들면 우선 우왕 2년(1376) 7월에 있었던 崔瑩의 鴻山大捷을 들 수 있다. 우왕 2년 7월에는 왜구가 다섯 차례에 걸쳐 전라도와 충청도 9개 지방을 침구하여 소란을 피웠다. 이 때 대규모의 왜구가 연산 開太寺에 침입하니 元帥 朴仁桂가 맞아 싸웠으나 전사하였다. 이에 최영이 출정하기를 자청하여 여러 장수들과 함께 홍산에 이르렀으나 지세가 험하여 모두 나아가 싸우기를 꺼려하였다. 이에 최영이 몸소 사졸보다 먼저 돌진하니 사기가 크게 올라 적을 모두 무찔렀으므로, 그 후 왜구들은 최영을 가장 두려워하게 되었다고 한다.
왜구 토벌 중 가장 특기할 만한 싸움은 나세의 진포싸움과 이성계의 황산대첩이다. 이 싸움을 계기로 왜구가 쇠퇴했다고 볼 수 있을 만큼 중요한데, 신병기(火藥)를 처음 사용하기도 한 의미있는 전투다. 우왕 6년 8월에 왜구는 500여 척의 배로 鎭浦(금강입구·현 전북 옥구군 성산면)에 침입하였다. 타고 온 모든 배를 밧줄로 굳게 묶어두고 적은 병사만이 남아 배를 지키고 거의 다 상륙하여 부근의 김제·옥구·익산 등지로 흩어져 방화와 노략질을 자행하니 사람들의 시체가 산과 들을 덮고 적들이 운반하며 흘린 쌀이 길 위에 한 자 이상 깔릴 정도이었다고 한다. 이에 조정에서는 나세를 상원수로 하고 崔茂宣을 부원수로, 沈德符를 도원수로 하여 물리치도록 하였다. 진포에 이르러 최무선이 만든 화포로 적선을 불태우니 적선은 굳게 묶인 탓으로 쉽게 흩어질 수 없어 모두 불에 타버렸다.628)≪高麗史≫권 134, 列傳 47, 신우 6년 8월. 이 진포싸움에서 겨우 살아 남은 360여 명의 적들은 沃州로 달아나 먼저 상륙한 적들과 합류하였다. 돌아갈 배를 잃고 퇴로가 끊긴 왜적들은 永同 黃澗(永同郡)·中牟(尙州郡)·化寧(尙州郡) 등의 내륙으로 달아나면서 그들에게 포로된 자의 자녀를 살상하는 등 온갖 만행을 자행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왜구는 상주에 진을 치고 있다가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善州로 진을 옮기고 京山府로 쳐들어 갔다. 이 왜구를 토벌하면서 장수 朴修敬·裵彦 등 500여 명의 고려군사가 전사했다. 왜구는 이듬해 9월 남원 운봉현을 방화하고 引月縣(현재 南原郡 東面 引月里)에 주둔하여 장차 북상하겠다고 큰소리치니 중외가 크게 놀랄 지경이었다. 조정에서는 이성계를 양광·전라·경상도순찰사로 삼고, 변안열을 체찰사, 그리고 禹仁烈·李元桂·朴林宗·都吉敷·洪仁桂·林成味 등을 원수로 삼아 대토벌작전을 실시하였다. 이 전투에서 왜구는 阿只拔都의 용감함도 효력이 없이 크게 패하였다. 이 때 전사한 왜구의 피로 강이 빨갛게 되어 6, 7일간이나 변하지 않았으며 포획한 말이 1,600여 필이었고 병기도 무수히 많았다. 또한 처음에는 적군이 고려 군사보다 10배나 많았는데 70여 명만이 살아 지리산으로 도망하였다.629)≪太祖實錄≫권 1, 總書.
水戰에 있어서는 정지의 남해대첩을 꼽을 수 있다. 정지는 우왕 8년부터 海道元帥가 되어 수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함과 무기는 보잘 것 없어 이듬해 5월에 겨우 전함 47척을 마련하여 나주와 목포에서 경비하였다. 그 때 合浦元帥 朴曼殊가 왜선 120척이 경상도 연해에 들어와 연해의 주군을 크게 소란케 한다고 보고하자, 정지는 觀音浦에 이르러 적을 만나 이를 추격하여 朴頭洋에서 크게 무찔렀다. 적의 시체는 바다를 덮었고 화포를 쏘아 적선 17척을 불태웠다. 이 싸움에서 적은 17척의 大船과 2,000여 명의 인명피해를 입었다. 이 관음포싸움 후 고려 군사의 사기가 높아졌으며 이듬해 10월에 왜구 입구의 근거지라 할 수 있는 축산도에 船卒을 두는 데 성공했다.
그 후 공양왕 원년 2월에 당시 경상도 원수이던 박위는 병선 100척으로 대마도를 정벌하여 왜선 300척과 연해 가옥을 모두 없앴으며, 원수 金宗衍·崔七夕·朴子安 등이 잇따라 이르러 본국 포로 남녀 100여 인을 데려왔다.630)≪高麗史≫권 116, 列傳 29, 朴葳.
이렇게 대마도를 정벌할 수 있었던 당시의 고려의 사정은 이성계가 위화도회군 후 우왕을 강화도에 보내고 창앙을 세워 실권을 쥐고 있던 때였다. 이성계는 지리산전투, 황산대첩 등 여러 차례 왜구를 토벌한 경험으로 왜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왜구의 근거지이고 소굴인 대마도 정벌을 주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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