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의 침구가 창궐기에 들어서자 고려에서는 적극적으로 토벌을 감행하는 한편, 사절을 파견하여 왜구를 금하는 교섭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여·원연합군의 일본원정 이후 사절은 공민왕 15년(1366)에 처음 파견되었다. 그 해 9월에 고려에서 파견한 사자 金龍이 일본에 도착하였으며, 다시 11월에는 다시 金逸을 파견하였다. 당시 고려의 국내 사정은 金鏞의 亂(공민왕 12)과 德興君의 亂(공민왕 13) 등의 내란에 시달렸을 뿐 아니라 왜구의 개경부근 출몰이 잦아진 때였다.
이러한 시대상황 아래 고려에서는 왜구를 금하기를 요구하는 사자를 파견하고, 이에 대하여 일본의 征夷大將軍은 즉시 왜구를 금할 것을 약속하였으므로 비로소 왜구가 약간 줄어들게 되었다.632)≪東史綱目≫15 上, 공민왕 15년 11월. 그러나 당시의 일본은 신정권 제2대 征夷大將軍 足利義詮 말년에 해당되는데, 이 때는 남조의 官方정권과 대립하던 시기로 통일이 요원한 시대였다. 따라서 당시 일본은 막부정치가 지방에까지 강력히 미치지 못하던 때이므로 어느 정도 약속이 지켜졌는지 알 수 없으나 征東 이후 고려 정부와 일본 막부와의 사이에 최초의 교섭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이 공민왕 15년의 사절파견에 대한 답례로 일본은 동왕 17년 정월에 김일에 동반하여 승려 梵湯과 梵鏐로 하여금 보빙케 하였다. 그런데 이 때 온 일본사자를 신돈이 박대하였기 때문에 이들은 노하여 돌아갔다. 같은 해 7월에 일본이 다시 사자를 보내와 土物을 바쳤다. 고려정부에서는 그 해 11월 대마도 萬戶 宗慶에게 쌀 1천 석을 주었다. 이와 같이 막부당국과 禁寇교섭을 진행하면서 아울러 대마도주 등 금구교섭에 유력한 제후들을 후대하여 평화적인 교섭을 추진하였다. 우왕 원년 2월에는 判典客寺事 羅興儒를 통신사로 일본에 파견하였다. 이듬해 10월 나흥유가 일본에서 돌아올 때 일본은 승려 良柔를 보내어 보빙케 하고, 예물도 彩段·畵屛·長劍·酒器·金龍頭 등을 바쳤다. 또한 일본 승려 周佐의 글을 보내왔다.
우리 西海道일대와 九州는 亂臣이 할거하여 貢賦를 不納한 지 20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西邊海道의 우매한 백성들이 귀국을 침구하는 것이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조정에서 장수를 보내어 토벌토록 하고 있는데, 이제 구주만 평정하면 해적들을 금할 수 있음을 하늘에 맹세하고 약속하는 바입니다(≪高麗史≫권 133, 列傳 46, 신우 2년 10월).
왜구가 西海道 일대와 九州에 근거하였다고 미루고, 왜구를 금할 것에 성의를 표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교섭이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에도 왜구는 더욱 창궐하여 우왕 2년에만 46회 침입하였다. 이에 우왕 3년 6월에 판전객시사 安吉祥을 다시 일본에 파견하였다. 그가 가지고 간 國書에서는 두 나라의 우호와 항로의 안정 여부가 전혀 일본의 처리 여하에 달려 있다633)≪高麗史≫권 133, 列傳 46, 신우 3년 6월.고 경고하였다. 안길상은 일본에서 병으로 죽고 일본은 그 해 8월에 승려 信弘으로 보빙케 하였지만 일본은 회신에서 왜구들은 도망쳐 간 무리로서 명령을 준수하지 않기 때문에 금지하기가 쉽지 않다고 하였다.634)≪高麗史≫권 133, 列傳 46, 신우 3년 8월.
이에 고려는 다시 前大司成 정몽주를 파견하여 禁賊을 교섭케 하였다. 정몽주는 九州探題 源了俊을 만나 금적을 요구했으며, 그의 요구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원료준을 비롯한 일본인들은 정몽주의 박학다식과 인품에 감복하여 예우를 다해 대접했다. 그리고 정몽주에게 성의를 보이기 위해 우왕 4년(1378) 6월에는 원료준이 승려 신홍에게 군사 69인을 주어 고려에 가서 왜적을 잡도록 하였다. 신홍은 兆陽浦(전남 보성)에서 왜적선 1척을 포획하고 포로로 잡힌 20여 명의 부녀자를 방환하였다. 그러나 固城 赤田浦싸움에서는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같은 해 9월에 정몽주가 돌아올 때는 포로로 잡혀갔던 尹明·安遇世 등 수백 명을 돌려보내 주었으며 원료준은 周孟仁을 정몽주에 동반시켜 보빙토록 하였다.
그러나 왜구의 침입이 계속되어 우왕 4년 10월에는 다시 版圖判書 李子庸과 前司宰令 韓國柱를 파견하여 왜구의 금지를 청하였다. 이 때 이자용은 구주탐제 원료준에게, 한국주는 周防(山口縣)의 大內氏에게 가서 왜구의 금지를 요청하였다. 이에 대하여 일본은 승려 法印을 파견하여 보빙케 하고 토산물을 바쳤다. 한국주는 우왕 5년 5월에 돌아왔는데 그 때 백제 성왕의 후예라는 大內義弘이 朴居士에게 군사 186인을 주어 고려에 와서 왜적을 잡도록 하였고, 이자용의 귀국길에 원료준은 포로 230명을 돌려 보내면서 창검과 말을 헌상하였다.
이상과 같이 우왕 초기에 특히 사절의 왕래가 많았던 것은 우왕 3년부터 6년 사이가 왜구가 가장 창궐하였던 때이므로 우연한 일은 아니다. 당시의 구주탐제 원료준이 왜구의 진압에 적극적인 성의를 보이며 고려의 요구에 응한 것 역시 고려와 화친관계를 유지하려는 의도보다 당시의 일본사정 때문이었다. 이것은 우왕 5년의 사절 뒤로는 고려에서 보낸 사절보다 일본측에서 오는 사절이 횔씬 많아지고 있음을 볼 때 명백히 알 수 있다. 당시 구주탐제라고는 하지만 아직도 원료준에 복종하지 않는 장수들이 있어 불화가 계속되던 때였다. 따라서 고려의 뜻을 거슬리어 막부에 적의를 품게 하는 것은 스스로 큰 화를 초래하는 것이 되며, 왜구 중에는 더러 天皇軍과 밀통하는 자가 있었으므로, 왜구를 금함은 고려와 막부와의 정상교역과 천황군의 기세를 꺾는 데 유리하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사절의 왕래 가운데 한 가지 특징은 일본측의 사절로 처음부터 계속해서 승려가 오고 있다는 점인데, 이는 당시의 일본의 문화수준이 전체적으로 저급하고 특히 무신정권 아래서 일본의 지식인은 승려정도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 하겠다.
<羅鍾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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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