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10. 의식주생활
  • 1) 의생활
  • (3) 몽고복식의 영향

(3) 몽고복식의 영향

 몽고침입에 의한 풍속사적 충격은 원종 13년(1272) 원에 오래 머물렀던 세자(후의 충렬왕, 1275∼1313)가 辮髮胡服하고 귀국하자 사람들이 탄식했고 심지어 우는 사람마저 있었다고 기록은 전한다.1150)≪高麗史≫ 권 27, 世家 27, 원종 13년 3월 기해. 이 때는 고려가 몽고와 강화한 지 10여 년이 지났으나, 三別抄의 저항이 끈질기게 계속되고 있던 무렵이라, 몽고풍에 대한 반발과 갈등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고려를 복속시킨 뒤, 元 世祖는 원종 원년에 국서를 보내 고려에서 청한 여섯 가지를 허락하며 “의관은 본국의 풍속을 따라 모두 고치지 말라”1151)≪高麗史≫ 권 25, 世家 25, 원종 원년 8월 임자.고 했었다. 그러나 신하들 중에 친원파가 생겨서, 국왕에게 복식제도를 원제로 고치기를 청하기도 하였다. 저간의 사정은 일찍이 몽고에서 고려로 귀화한 무신 印公秀가 원의 풍습을 따라 복색 고치기를 원종에게 권했을 때, 원종이 “나는 차마 하루아침에 갑자기 祖宗의 가풍을 바꿀 수 없으니 내가 죽은 뒤에 그대들 마음대로 하도록 하라”1152)≪高麗史≫ 권 28, 世家 28, 충렬왕 즉위년 12월 정사.고 한 데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사정은 뒤바뀌어, 원으로부터 왕으로 책봉된 충렬왕은, 그 직후 원에서 시집오는 齊國大長公主를 맞으러 서북지방으로 행차했을 때, 수행한 중신들이 몽고풍으로 머리를 깍지 않았음을 나무라고 있다. 이에 대해 신하들의 대답은 “머리 깎기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 다 같이 하기를 기다릴 뿐”이라는 것이었고, 후에 머리깎기를 앞장서는 사람들이 있어 다른 신하들도 머리를 깎기에 이른다.1153)≪高麗史≫ 권 28, 世家 28, 충렬왕 즉위년 10월 신유. 그리하여 충렬왕 4년(1278) 왕은 원의 의관을 쓰도록 했고, 이로부터 머리를 깎고 머리를 땋지 않은 사람이 없게 되었다.1154)≪高麗史≫ 권 28, 世家 28, 충렬왕 4년 2월 병자 및 권 72, 志 26, 輿服.

 이와 같은 경위는 원의 풍속을 받아들임에 적지 않은 저항과 혼란이 있었음과 아울러, 원의 제도 수용이 원에 대한 사대외교의 필요에서 나온 측면이 강함을 말해준다. 改服令이 있은 직후 충렬왕이 원에 들어가 장인이 되는 원 세조에게 나라의 어려운 사정을 여러 가지로 호소하고 있음도 그런 사정과 부합한다. 이 때 흥미로운 것은 원 세조와 역관 康守衡 사이에 복식에 대한 문답이 있었던 것이다. 즉 고려의 복색은 어떠한지를 묻자, 韃靼(몽골)의 의복과 모자를 착용하는데, 조서를 펴거나 명절을 하례할 때는 고려복으로 일을 본다고 대답하였다. 또 세조 자신이 고려복을 못입게 했다고 하나 그럴 까닭이 없다고 하고, 고려에서 무엇에 근거하여 예절을 폐했는지를 물었다.1155)≪高麗史≫ 권 28, 世家 28, 충렬왕 4년 7월 갑신. 이 문답에서 주목할 것은 고려가 원제를 쓰기로 했다고는 하나, 오히려 막중한 공식행사에는 고려복을 착용한다고 한 점이다. 여기 말한 고려복은 송제를 본뜬≪상정고금례≫의 公服일 것이 틀림없으므로, 이 때 고려의 공복제도는 2중구조를 이루고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들어온 몽고풍은 점차 성행하였다. 고려에 대한 원의 간섭이 거의 한 세기에 이르고, 역대 왕비를 원에서 맞은 까닭에 궁중 풍속이 몽고화하였으며, 다루가치[達魯花赤] 등 많은 몽고관원과 군병이 장기 주재하고, 여·원간에 교통과 통혼이 성했던 만큼, 우리 풍속에 미친 몽고풍의 영향이 매우 심각했던 것이다. 복식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후대의 한복 중에는 고려 때 몽고에서 들어왔다는 옷가지와 장식이 여러 가지가 있으며, 韓服樣式의 어떤 특징은 몽고옷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지적도 없지 않다.

 그 중 고려시대에 몽고에서 들어왔다고 하는 것의 대표적인 예는 簇頭里이다. 이와 관련하여 崔南善은 “의식용 복식은 가장 몽고풍을 가미하게 되었다. 지금도 여자의 禮裝에 쓰는 족두리는 몽고에서 士夫女가 외출할 때 쓰는 모자이고, 신부복식으로 珊瑚珠꾸러미의 도토락댕기 역시 몽고 기혼녀의 頭飾으로 쓰는 도톨이라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1156) 崔南善,≪故事通≫(三中堂, 1946, 85쪽 ;≪六堂崔南善全集≫ 1, 玄岩社, 1973, 149쪽). 족두리는 곧≪고려사≫에 보이는 姑姑冠이며,1157)≪高麗史≫ 권 89, 列傳 2, 淑昌院妃 金氏. 이것이 족두리로 와전되었다는 것이다. 이 밖에 조선시대 戎服 등으로 두루 입었던 철릭[天翼·帖裡]도 고려시대에 처음 입기 시작했으며, 몽고옷 중의 質孫과 유관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1158) 金東旭·高福男,<出土 朝鮮時代 遺衣의 服飾史的 硏究>(≪服飾學會誌≫ Ⅱ, 1978), 2쪽. 둘다 上衣下裳이 연결되고 直領인 꾸밈과 모양이 같기 때문인데, 지금 남아 있는 安珦(1243∼1306) 초상화1159)≪韓國의 肖像畵≫(國立中央博物館, 1979).의 복식이 바로 질손이라 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몽고복식이 한복양식에 미친 영향은 주로 저고리(襦)의 길이와 관계된다. 우리 옷의 고유양식은 바지-저고리(上衣下袴) 또는 치마-저고리(上衣下裳)이며, 저고리는 길이가 긴 長襦로서 허리띠로 앞을 여미는 것이다. 이 모양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확인이 되는데, 고려시대 몽고옷의 영향으로 길이가 짧아져서, 허리띠 대신 고름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것은 조선시대 학자들의 통설로서, 너무 짧아 가슴을 못 가리고, 입기에도 불편한 女服 저고리는 오랑캐 풍습이니 고쳐야 한다는 복식론이 나오게 된 것이다.1160) 李京子,≪韓國服飾史論≫(一志社, 1983), 77쪽.

 그러나 근래의 실증적 연구에 따르면 그와 같은 주장은 國俗인 저고리를 胡俗으로 보는 관념에서 나온 것이며, 우리 옷의 저고리는 상고시대 이후 계속해서 단소화경향을 보인 끝에, 특히 여복에서 독특한 한복미를 낳은 것으로 보고 있다.1161) 李京子, 위의 책, 79쪽. 실제로 여말선초의 것으로 알려진 木偶像 5점에서 고구려 고분벽화의 인물상과 매우 흡사한 차림이 확인되는 것이다.1162) 李京子,<木偶像에 나타난 服飾 硏究>(≪服飾≫ 2, 1974). 이들 목우의 남자상은 띠가 있는 袍, 여자상은 띠 없는 長襦차림인데, 이로 미루어 보면 한복양식은, 고려시대 몽고옷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우리 상고복식의 양식전통을 연면하게 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비록 몽고옷의 영향이 컸다고는 하나, 그 영향은 궁중과 사족지배층에서 뚜렷하고, 일반의 복식생활을 뒤바꿀 만한 것은 아니었다고 해야 옳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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