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대에 압록강 상류유역에 설치했던 4군을 철폐하여 주민을 강계부와 구성군으로 이주하였다. 이를 두고 이 지역 명칭을 gms히 ‘廢四郡지역’이라 하거니와 4군 철폐와 동시에 비어두었다고 해서 영토의 포기라든가, 군사상 국경방어선의 임시적인 후퇴였다든가, 법제상 4군의 폐군에 지나지 않는다는 등의 논의가 있어 왔다.
4군 철폐의 직접적 요인은 대내적으로 평안도가 축성·방수·기근 등으로극도로 피폐되어 있었다는 점과 대외적으로는 이만주·동범찰 등이 쳐들어오리라는 점 등이었다. 그리하여 문종대에 이미 적극적인 논의가 있었지만, 조종구지의식 때문에 결말을 얻지 못했다.
단종 원년(1452)에 檢討官 梁誠之가 재차 여연·무창·우예 등 3군의 철폐를 주장하자, 雲城府院君 朴從愚로 하여금 마땅한가를 직접 가서 살피게 하였다. 그 결과 압록강 상류유역의 3군은 단종 3년 4월에 철폐되었다. 이에 따라 자성군이 북방 방위를 위한 최북방이 되었는데, 세조 5년(1459)에 그것마저 철폐하고 주민을 강계로 이주시킴으로써 4군은 완전히 철폐되었다.
조선초에 4군 설치과정이 매우 적극적이었던 데 비하면, 4군의 철폐는 매우 소극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4군 철폐에 대해 영토권이라는 차원이 아니라 조종구지의 보존이라는 의식에 의해 봉강의 축소가 아니라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가령 문종 즉위년(1450) 8월 하연이 “우예 이상을 혁파한다 하더라도 압록강으로 경계가 생겨 여진족이 입거할 수 없으므로 땅을 줄이는 예와는 다르다”고 한 말이나, 단종 원년 11월에 양성지가 “3읍을 버린다고 하더라도 큰 강으로 경계를 삼으므로 우리의 봉강이 옛과 같다”고 한 말 등은 조종구지의식의 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태종 16년에 여연군의 설치를 필두로 4군이 설치된 이래, 세조 5년 자성군이 철폐되기까지는 40여 년이 경과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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