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세종대에는 여진족의 침입에 적극적으로 대응했으나, 점차 이러한 영토의식도 미약해져 갔다. 그리하여 ‘폐4군지역’이 마치 경역에서 제외된 듯한 표현을 흔히 보게 된다. 또 한편으로는 4군을 철폐한 조처는 영토의 포기가 아니라, “첫째 군사상 국경 방어선의 후퇴이며, 둘째로 법제상 4군 관제의 폐지이다”328)李仁榮, 앞의 글, 84∼85쪽.라고 지적되기도 한다. 전자의 구체적인 실례로≪新增東國輿地勝覽≫(이하에서≪輿覽≫으로 약칭)을 들 수 있다.≪여람≫에 실려 있는 평안도지도를 살펴보면, 강계 동북단으로는 薛罕嶺, 북단으로는 黃靑洞山, 서남단으로 獨山을 표기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여람≫에 실려 있는 지도들은 약도에 불과하여, 관읍 이름과 그 관읍의 鎭山을 주로 표기하고 있다. 그렇더라도 이 지도에서는 ‘폐4군지역’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는 표현을 찾아보기 어렵다.≪여람≫지도상에서 제외됨으로써 영역을 내버린 것처럼 인식되는 면도 없지 않다고 생각된다. 조선시대에 제작된≪여람≫계통의 여러 지도에서도 한결같이 강계 북단으로는 황청동산이 위치하고 있고, 동으로 설한령(薛列罕嶺·雪寒嶺)이 위치하고 있다.
그런데≪여람≫강계부 산천조의 기록에는 ‘폐4군지역’의 지명을 다음과 같이 나열하고 있다.
茂昌―何眼洞·呼丹·立巖洞·羅漢德·時介·元時德·都乙恨洞·家舍洞·大薰豆 閭延―小薰豆·墨洞·那里川·甘音洞·漏屯洞·奉天臺·夫乙毛洞·朱沙洞 虞芮―所弄怪洞·趙明干洞·於用怪洞·申松洞·時時乃洞·南坡洞 慈城―小浦里·古道洞·波場洞
이와 같은 내용들은≪여람≫의 도별 지도가 매우 간략한 약도임을 말해 주는 것이며, 志의 기록이 상세할 수밖에 없는 地理便覽書로서의 성격을 알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여람≫의 지도를 가지고 ‘폐4군지역’ 및 조선 초기 서북지방경역을 논할 수는 없다.
≪여람≫지도의 표현은 다분히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후에 제작된 지도들은329)鄭尙驥의≪東國地圖≫형식을 갖춘≪海東地圖≫·≪我東輿地圖≫·≪東域圖≫등의 지도를 말한다. ‘폐4군지역’이 자연경계선인 압록강으로 둘러싸여 있음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주요 강과 재 이름 몇 개만을 표기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지역에 대한 행정구역의 복설과 의식의 변전은 지도상에도 명료하게 나타나, 압록강을 경역의 한계선으로 표시하고 있다. 가령 金正浩의≪靑邱圖≫·≪大東輿地圖≫등은 압록강을 국경으로 하고 있고 魏源의≪海國圖志≫가운데 朝鮮圖(북부지방 부분)의 국경선 구분은 압록강, 두만강의 彼邊을 점선으로 하고 있다. 이 지도의 표현대로라면, 압록강·두만강 건너까지 우리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표현은 국경 개념에 대한 확실한 근대적 인식이 없었던 데 연유한 것으로, 다만 압록강과 두만강을 구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어쨌든 4군이 폐지되면서 여연과 무창군의 주민은 龜城府로, 우예와 자성군의 주민은 강계부로 이주되었다. 이에 따라 이 지역은 空地化되어 ‘폐4군’이라 하는데, 논자 중에는 4군이 폐기된 후 여진인이 이곳을 장악하였으므로, 이곳은 조선의 강역 밖이라는 논리를 펴기도 했다.330)瀨野馬熊,<遺稿>(≪東洋學報≫12·13, 朝鮮總督府, 1918). 그러나 이 지역은다소 허술하긴 하지만, 군사지역으로 관할되고 있다. 그 근거를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신증동국여지승람≫江界都護府 建置沿革條에 “세조조에 우예·자성의 2군을 혁파하고, 그 주민을 강계부로 옮기고, 후에 진을 두었다”고 하였다.
둘째≪輿地圖書≫江界都護府 烽燧條 중 把守處에, 이른바 압록강연변 파수처로 약 126개소가 밝혀져 있다(괄호 안 里數는 다음 파수처까지의 거리임).
① 厚州江邊 五統洞把守(10리) ② 冬乙應洞把守(15리) ③ 板幕把守(15리) ④ 駕馬都郎把守(15리) ⑤ 煮之嶺把守(15리) ⑥ 水碓洞把守(15리) ⑦ 厚州上把守(10리) ⑧ 鴨緣江邊厚州下把守(5리) ⑨ 厚州獐項把守(7리) ⑩ 朴鐵上仇非把守(15리) ⑪ 朴鐵下仇非把守(10리) ⑫ 大羅信洞把守(5리) ⑬ 羅信上仇非把守(5리) ⑭ 羅信下仇非把守(10리) ⑮ 小羅信洞把守 (10리) (16) 竹岩上仇非把守(7리) (17) 竹岩中仇非把守 (10리) (18) 竹岩下仇非把守(10리) (19) 三兄弟洞把守(5리) (20) 小三洞把守(15리) (21) 大茂昌把守(15리) (22) 小茂昌把守(15리) (23) 茂昌仇非把守(10리) (24) 葡萄洞把守(10리) (25) 葡萄上仇非把守(5리) (26) 葡萄中仇非把守(5리) (27) 葡萄下仇非把守(10리) (28) 莫從洞把守(10리) (29) 河山堡把守(10리) (30) 豆之洞把守(10리;馬馬海權管留防處) (31) 豆之上仇非把守(5리) (32) 豆之中仇非把守(8리) (33) 豆之下仇非把守(8리) (34) 吾郎哈洞把守(7리) (35) 吾郎哈仇非把守(10리) (36) 竹田把守(80리;楸坡萬戶留防處) (37) 金倉仇非把守(7리) (38) 金倉洞把守(15리) (39) 束乭上仇非把守(10리) (40) 束沙洞把守(10리) (41) 束沙仇非把守(10리) (42) 束乭下仇非把守(10리) (43) 淵洞把守(13리) (44) 三洞把守(10리) (45) 葛田上仇非把守(8리) (46) 葛田中仇非把守(10리) (47) 葛田下仇非把守(10리) (48) 金同洞把守(10리) (49) 楸上仇非把守(10리) (50) 楸下仇非把守(10리) (51) 上獐項把守(10리) (52) 中獐項把守(10리) (53) 下獐項把守(10리) (54) 梨坡把守(10리) (55) 上立岩把守(10리) (56) 下立岩把守(10리) (57) 上長氷崖把守(10리) (58) 中長氷崖把守(10리) (59) 下長氷崖把守(7리) (60) 上德仇非把守(10리) (61) 下德仇非把守(10리) (62) 中江把守(10리;從浦萬戶留防處) (63) 中江仇非把守(10리) (64) 乾浦把守(10리) (65) 乾浦獐項把守(10리) (66) 胡芮仇非把守(10리) (67) 胡芮下仇非把守(7리) (68) 胡芮洞口把守(10리) (69) 胡芮下邊把守(10리) (70) 于屹洞把守(10리) (71) 早粟上口非把守(10리) (72) 早粟中口非把守(10리) (73) 早粟下口非把守(10리) (74) 所儀德把守(15리) (75) 早粟田把守(15리) (76) 伐洞把守(15리) (77) 蘆洞把守(15리) (78) 乾浦把守(15리) (79) 慈城上口非把守(15리) (80) 慈城下口非把守(15리) (81) 慈城洞口把守(10리;夞怪萬戶留防處) (82) 李仁洞把守(15리) (83) 西海坪口非把守(10리) (84) 獐項把守(10리) (85) 西海坪把守(10리) (86) 加木德把守(10리) (87) 照牙坪把守(10리) (88) 瓮巖把守(10리) (89) 知弄怪把守(10리) (90) 所乙三洞把守(10리) (91) 三江上口非把守(15리) (92) 三江中口非把守(10리) (93) 三江下口非把守(10리) (94) 玉洞把守(20리) (95) 林土把守(10리) (96) 崔用洞把守(10리) (97) 乾浦把守(10리) (98) 加羅地把守(10리) (99) 狄洞把守(10리) (100) 餘屯把守(10리) (101) 宰臣洞把守(10리) (102) 別外坪把守(10리) (103) 淸海亭把守(5리) (104) 東臺把守(5리) (105) 未他洞把守(15리) (106) 分土烟臺底把守(5리) (107) 分土把守(5리) (108) 許隣浦把守(5리) (109) 馬實里把守(10리) (110) 兩江把守(10리) (111) 傳牌栢子洞把守(15리) (112) 牛項嶺底把守(15리) (113) 洞牙致把守(15리) (114) 掛印峰嶺底把守(10리) (115) 鷹岐里把守(10리) (116) 眞木坡把守(15리) (117) 五家山洞口把守(10리) (118) 玄鳥洞把守(15리) (119) 正木坡把守(15리) (120) 竹田嶺底把守 (15리) (121) 泉川把守(15리) (122) 阿山洞口把守(15리) (123) 雲洞把守(15리) (124) 小雲洞把守(15리) (125) 蘆灘把守(15리) (126) 檜洞把守(15리)
이들 가운데 (36)번의 죽전파수는 도로의 분기점을 이루고 있다. 즉 죽전은 강가에 있는데, 이 곳에서 두 길로 갈라지게 된다. 하나는 위쪽으로 후주강변 오통동파수(①)로 통하게 되고, 다른 하나는 아래쪽으로 압록강변의 옥동파수((94))로 통한다. 그리고 옥동에서 兩江((110))에 이르는 16개 파수는 단지 邊報만 전한다고 하였고, 두지동파수((30))는 馬馬海權管留防處, 죽전파수((36))는 楸坡萬戶留防處, 중강파수((62))는 從浦萬戶留防處, 자성동구파수((81))는 夞怪萬戶留防處 등 1개의 權管留防處와 3개의 萬戶留防處를 두고 있었다.
주목할 만한 일은 이 지역 入防에 대한 것이다. 후주 오통동파수(①)로부터 옥동파수((94))까지의 93개 파수처는 여름철인 5월부터 가을철인 8월까지만 입방하고 양강파수((110))에서 옥동파수까지의 16개 파수는 4계절 12월 내내 守直한다고 하였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강계진관 소속의 10개 진보(神光鎭·平南鎭·馬馬海堡·楸坡鎭·從浦鎭·上土鎭·夞怪鎭·滿浦鎭·伐登鎭·高山理鎭) 가운데 4개 진보(馬馬海堡·楸坡鎭·從浦鎭·夞怪鎭)는 폐4군 지역에 유방처가 설치되어 있어서 체류하면서 방수하는 곳이다. 방수기간은 앞에서 제시한 바와 같다.
어쨌든 주민을 구성과 강계로 철수시켜 700리나 되는 이 지역의 기름진 땅이 한낱 무심히 버려진 땅이 되었지만, 지금은 採蔘場이 되었다고 했다.331)≪文宗實錄≫권 3, 문종 즉위년 8월 정유. 그리고 3군의 폐기에 대해 영토의 축소가 아니라는 논의가 전개되었다. 하연은 “우예 이상을 지금 비록 혁파하여 압록대강으로 경계를 한정한다 하더라도 여진인들이 이곳에 들어와 살 수는 없습니다. 진실로 영토를 줄이는 예가 아닙니다”332)≪文宗實錄≫권 5, 문종 원년 정월 무신.라고 하였다. 또 “만약에 大黨賊變이 생기더라도 임기응변으로 자성
이상의 각 관을 철수시켜 강계읍성으로 물러 들어가게 하고, 힘을 합쳐 고수한다면 누가 이곳에서 소요할 수 있겠습니까”333)≪端宗實錄≫권 9, 단종 원년 11월 갑인.라고 하는 주장도 나왔다. 또 “비록 3읍을 폐기하고 大江으로 경계를 한정하더라도 우리의 봉강은 옛날과 같습니다”334)위와 같음.라고 하는 주장도 나왔다. 경계선을 압록강으로 설정하여 3읍은 폐기하고 적변이 있을 때는 힘을 합쳐 고수한다면 영토의 축소는 없다는 것이다.
논리는 더욱 발전하여 평안도 도체찰사 朴從愚는 3읍의 주민을 법도 밖으로 놓아 둘 수 없으므로 자성군에 探候兵을 파견하고, 강계절도사가 1년에 두 차례씩 순찰케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폐4군 지역을 군사지역으로 파악함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셋째,≪元永冑日記≫를 들 수 있다. 이것은 그가 高山里僉使로 있었던 정조18년(1794)에 폐4군지역을 순찰했을 때의 일기이다. 다음은 일기 첫머리이다.
正宗 계축(정조 17;1793)에 강계 제진에 문무의 지체와 명망에 따라 모두 택함을 받게 되었는데, 翰林 洪樂游를 夞怪萬戶로, 前正言 鄭履綏를 馬馬海權管으로, 前府使 梁梡을 上土僉使로, 前府使 元永冑를 高出里僉使에, 前府使 李謙會를 楸坡萬戶로, 前校理 鄭尙愚는 전에 이미 神光僉使로 補했다. 갑인 봄, 모두 4군의 지형을 자세히 살피고 돌아왔다. 이 일기는 그 때에 적은 것이다.
일지 형식의 이 일기에 의하면, 1794년 4월 7일 원영주는 욋괴만호 홍낙유 등과 함께 瓜花鎭(욋괴)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아침에 출발, 정오에 上土鎭에 도착했는데, 여러 鎭將들도 일제히 도착하였다. 4월 9일 상토진을 출발하여 麻田嶺을 넘어 三川→紫作嶺→慈城舊基→皮木嶺→乾浦→夞怪留防所→伐谷→早粟坪→卞屹洞→虞芮舊基→中江從浦留防所→項岩→上中長氷崖→梨坡→獐項→金同洞→三洞→葛田下上仇非→淵洞→(閭延)舊堡→金倉洞을 거쳐 동월 17일에 竹田(楸坡)萬戶留防所에 도착하였다.
이와 같은 폐4군 지역의 현지답사는 여진인의 시세 변화에 따른 대응의 필요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즉 청이 건국됨에 따라 조선 북쪽 변경에 살던 많은 여진인들이 중원으로 이동하였다는 점과, 폐4군 지역에 대한 개척의 기운이 활발하게 일고 있었던 데 연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체와 명망이 높은 인물들을 새로이 邊將으로 임명하고 곧바로 변계답사를 실행케 한 것은 강계 인민을 위한 일이었을 뿐 아니라, 여진족과의 교린관계, 국방수어책에 유의하여 4군의 복구가 가능한가, 민폐를 회생시킬 수 있는가 등 변경 요새의 사정을 살피기 위한 것이었다.335)≪承政院日記≫정조 18년 3월 8일. 군사지역화되어 있는 폐4군 지역을 행정구역으로 복구하기 위한 사전답사였던 것이다.
넷째,<李汝節手本>의 검토이다. 이여절에336)이여절의 출신에 관하여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정조 16년(1792)에 함경도 富寧府使를 지냈고, 뒤에 경상도 昌原府使에 전임되었으나 정조 19년 6월에는 嶺南暗行御史 柳畔의 탄핵을 받아 刑具違制, 用刑濫酷의 연고로 9월 평안도 渭原郡에 유배되었다. 뒤에 사면을 받아 함경도 長津府使가 되고, 순조 원년(1801) 黃某를 拷問에 붙여 천주교도 黃嗣永으로서 誣服시킨 죄에 의하여 함경도 穩城府에 유배되고, 다시 전라도 南海縣의 軍卒로 충당되었으나 뒤에 다시 석방, 전라도 全州府使에 부임되었다. 대해서는 앞에서 인용한≪원영주일기≫말미에 “을묘(정조 19) 겨울에 渭原郡 정배죄인 李汝節이 江界馬馬海土兵으로 充定되어 폐4군을 살피라는 명을 받았다”고 하여, 이여절의 신분과 조사연대, 원영주 등의 답사시기와 거의 때를 같이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또 그가 토병으로 충정된 사실이 매우 비중 있는 일로 취급되고 있다.
이여절의 답사지역은 앞에서 인용한 바 있는≪여지도서≫의 압록강변 파수처와 동일하다.337)*舊慈城郡地域에서는 玉洞에서 乾浦까지의 노정((94)∼(78))
*舊虞芮郡地域에서는 蘆洞에서 中江仇非까지의 노정((77)∼(63))
*舊閭延郡地域에서는 中江(從浦萬戶留防處)에서 金倉仇非까지의 노정((62)∼(37))
*舊茂昌郡地域에서는 竹田(楸坡萬戶留防處)에서 厚州江邊五統洞까지의 노정((36)∼①) 즉 그는 정조 19년 12월 13일에 강계부를 출발하여 압록강연변을 답사하고, 이듬해 정월에 복명서를 조정에 제출하였다.338)≪備邊司謄錄≫183책, 정조 20년 정월 11일. 그의 답사일정은 옛 자성·우예·여연·무창군 등의 4지역이었고 주된 답사 내용은 지형·道里의 원근·민호·賊路·城邑基址·留防所 등이었다.
거주민의 철거로 空地化정책을 쓴 것은 사실이지만, 폐4군 지역의 압록강연변에 93개소(또는 94개소)의 파수처를 두어 방수케 한 것은 이 지역을 군사지역으로 파악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리하여 조선의 서북방면 국경선은 압록강의 자연경계선으로 자연스럽게 획정되었고, 압록강 연변 파수시설이 국경지대의 경계선을 분명하게 하였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