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 이래 왜구에게 전국민이 시달리고 조선 초기에는 정식으로 국교를 재개한 만큼 조선의 일본에 대한 관심은 높았던 것 같다. 조선정부는 대일사행원은 물론 대마도주와 受職倭人·상인, 심지어는 일본사절들을 통해서도 조선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였다. 명에서≪日本國考略≫이란 서적이 나오자 바로 수입하여 복각할 정도로 일본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정보통로는 대일사행원들이었다. 그들은 사행의 명목과 관계없이 대부분 일본정세 탐지라는 목적을 수행하였고, 그 정보를 귀국보고(復命)를 통해 조정에 전달하였다. 특히 세종대 초기 尹仁甫·李藝·朴瑞生·宋希璟 등의 보고는 대일정책의 수립과 일본인식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들의 복명을 통해 막부를 비롯한 일본정계의 권력구조, 구주탐제와 서국지역 호족들의 세력분포와 대마도와의 관계·해적의 분포·경제사정 등을 알 수 있게 되었고, 일본인 통교자들에 대한 다각도의 통제가 가능하게 되었다. 성종 2년(1471) 신숙주에 의해 편찬된≪해동제국기≫는 조선 초기 일본에 관한 지식과 인식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이들 사행원들의 보고와≪해동제국기≫를 바탕으로 조선 초기 한국인들의 일본인식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일본은「왜구의 소굴」이라는 이미지가 있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유교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화이관에 입각하여 조선은 중국과 동등한 문화국(華)인 반면 일본은 유교문화를 갖추지 않은 오랑캐(夷)라고 하는 日本夷狄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 초기의 경우 일본이적관이 경직되지 않았고 실용적인 관점에서 일본의 문물을 인식하고 있었다. 대일사행원들은 일본의 경제와 기술 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도입을 시도하였고, 조선에서 생산되지 않는 일본의 특산물 등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표하기도 하였다. 또 일본의 문화나 풍속에 대해서 야만시하지 않고 문화적인 독자성을 인정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이러한 요소는 16세기 이후의 일본인식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그러나 일본에 대한 관심이 주로 정치·군사·경제적인 측면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다음으로 일본인식도 시대에 따라 미묘한 변화가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즉 건국 초기와 15세기 후반 이후의 일본관에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15세기 후반에 이르러 양국의 국내정세의 변화에 따라 조일통교의 양상도 변하게 된다. 이 시기 조선으로 보면 통치체제가 정비되고 대내외적 상황이 안정되어 갔는데 비해, 일본측은「應仁의 亂」 등으로 실정막부의 약체화현상이 두드러졌다. 특히 세조대 말기와 성종대 초기에 이르러서는 막부장군 스스로가 조선정부에 군사원조를 요구하고 통신부를 요청하는가 하면, 막부의 管領들도 독자적으로 사절을 보내 사원건립자금 등의 경제적 지원을 요구하였다. 심지어 사행시 가져온 물품에 대해 값을 낮게 쳐준다고 따지기도 하고 회사품이 적다고 항의하였다. 중종대 이후로는 일본국왕사가 와서 공공연히 상행위를 하기도 하였다.707)金柄夏, 앞의 책, 89쪽.
한편 막부를 비롯해 이 시기의 일본측 통교자들온 사행시의 서계에 朝鮮上國觀 내지 朝鮮大國觀을 표시하였다.708)高橋公明,<朝鮮遣使ブームと世祖の王權>(≪日本前近代の國家と對外關係≫, 吉川弘文館, 1987), 361∼364쪽. 이는 실정막부의 8대 장군 足利義政代의 서계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즉 조선을 ‘上國’이라고 하였고, 조선의 국왕에 대해서도 ‘殿下’ 대신에 ‘陛下’ 혹은 ‘황제폐하’를 사용하였다.
또 일본국왕사의 서계에 ‘臣僧’이라고 하면서 조선을 ‘皇華의 나라’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며,709)≪成宗實錄≫권 7, 성종 원년 8월 경오. 당시 일본 각지의 사신들은 세조에 대해 ‘불심의 천자’라고 칭하였다.
세조 12년(1466)에서 성종 2년(1471) 사이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실정막부와 기타 통교자들의 이러한「조선대국관」이 당시 일본이 처한 절박했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울지 모르지만 조선측의 일본인식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을 것임은 상상하기에 어렵지 않다. 외교적 상례를 벗어나 경제적 지원을 요청하는 행위와 그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저자세를 취하면서 대등국으로서는 사용하지 않는 용어를 쓰는 등의 태도는 대일멸시관을 자연스럽게 형성시켰으리라 여겨진다. 그 결과 성종대 초기에 확립된 대일통교체제와≪해동제국기≫를 보면 막부를 포함한 일본을「조선적 국제질서」속에서 편입시켜 파악하고 있으며 일본이적관이 보다 체계화 되어감을 알 수 있다.710)河宇鳳, 앞의 글, 99쪽.
16세기 이후로는 이와 같은 일본이적관이 더욱 심화되어 가는 양상을 보여준다. 15세기 중반 조선측에서 통신사 파견이 중지됨에 따라 일본의 국내정세와 변화상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졌고, 변방이 안정되면서 대일 무관심의 경향은 더욱 촉진되었다. 중종대 이후로는 대일정책에 있어서도 통제와 긴축일변도로 나가 새로운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는 측면이 없지 않았다. 즉 조선 초기와 같이 일본에 대한 적극적인 정보 수집을 바탕으로 한 능동적인 대일정책 대신 경제적인 교류를 전혀 도외시하는 명분론과 고식적인 대응책에 집착하는 소극성이 두드러진다. 일본인식에 있어서도 실용성과 문화상대주의적 인식에 근거한 신축적인 일본이해가 결여되는 반면 일본이적관이 심화, 경직화되어갔을 뿐이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