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1. 토지제도
  • 1) 과전법체제의 확립
  • (4) 과전법의 내용과 그 운용
  • 나. 토지관리 규정

나. 토지관리 규정

과전법에 나타난 토지 관리의 규정들은 물론 분급수조지의 관리에 관한 것이었다. 과전법은 고려 후기에 문란해진 사전을 전면 혁파한 위에 전국의 토지에 대하여 전조를 공수함으로써 일단 국가수조지로 파악하여 국가 기관의 각 처에 분속시키는 한편, 그 수조권의 일부를 관인층을 비롯한 각 유역인에게도 절급하였다.

그런데 전국 전지의 대부분을 점하는 국가수조지는 사실상의 민유지로서 전통적인 관행에 따라 소유권에 입각한 토지 지배관계로 운용되어 갔으며, 거기에는 양전·수조와 같은 전통적 일반적 관리 이외에는 국가권력이 특별히 간여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과전법에 따라 새로이 설정한 분급수조지로서의 사전에 관한 한 사정이 달랐다. 그것은 국가의 권한에 속하는 수조권의 일부를 개인에게 위임한 것이므로 그 균평한 운용을 위해서도 국가의 특별한 관리가 필요하였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경기지역에 사전으로 설정된 토지에 대하여 비록 민전일지라도 “함부로 팔거나 함부로 증여할 수 없다”(H-25)는 규정을 두어 그 소유권의 일부까지 한동안 제약하였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수조권적 토지지배의 관행은 현실적으로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었으므로, 국가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가능한 한 제약함으로써 직접생산자 농민층을 보호하여 그 재생산 과정의 항구화를 실현하고자 노력하였다. 과전법의 토지관리 규정이 새로운 사전의 관리에 관한 내용을 실었던 까닭이 거기에 있었다고 할 것이다.

H-11. 무릇 科가 加해져 受田하고 새로 공문을 작성하는 경우에는 原券에 합하여 한 通으로 할 것이며, 별도로 文券을 만들어서는 안된다. 부모가 受田한 것을 나누어 가질 경우에는 원권을 관에 바쳐서 (관이) 朱筆로 그 위에다 ‘某丁은 某子 某孫이 절수한다’고 標注하고서 이를 말소하고 원권은 그 장자에게 돌려준다. 비록 전지는 적고 자식은 많다 하더라도 破丁하는 것은 허락하지 아니한다. 자기의 전지를 감하여 자손이나 타인에게 증여하는 경우, 父가 죽은 후 그 子의 科外 餘田의 경우, 夫가 죽고 자식이 없어 (夫의 科田이) 減半된 경우에도 위와 같이 원권에는 標注하고 말소한 후 원권은 그 原主에게 돌려준다. 또한 자기의 전지 모두를 타인에게 증여하는 경우에는 관에 보고하고 遞給토록 할 것이며 원권은 관에 반환한다.

이 규정은 분급수조지의 田券 관리에 관한 내용을 실은 것이다. 즉 ①원래 과전 따위 일정한 수조지를 절수한 자가 자기 科의 승진에 따라 다시 과전을 가급받은 관계로 토지문권을 새로이 작성하게 되는 경우, 두가지 문권을 꿰매어 1통으로 만들어야 한다. ②부모가 절수한 수조지를 자손들이 분할하여 수조권을 행사하게 될 경우, 그 原券을 제출하면, 당해 기관이 거기에다 “某丁은 某子 某孫이 절수한다”고 朱書로 표기하고 해당 전결의 字丁을 원권에서 割減해낸 다음 원권을 장자에게 돌려주는 절차를 밟으며, 비록 절수지는 적고 자손은 많다 하더라도 한 字丁 안에 묶여 있는 地番들을 여러 사람이 분할해 가짐으로써 원래 作丁되어 있는 字丁을 흩트리거나 깨뜨려서는 안된다. ③자기가 절수한 수조지를 자손이나 타인에게 증여하는 경우, 휼양전을 收食하던 자가 나이 20이 되어 자기 科 이외의 餘田을 반환하는 경우, 그리고 자식이 없어 夫田의 절반만을 수신전으로 수식하게 되는 경우에도 당해 기관이 위와 같이 표기하고 할감해낸 다음 원권은 그 原主에게 돌려 주어야 한다. ④자기의 절수지 전부를 타인에게 증여할 경우에는 당해 기관에 보고하고 遞給하여야 하며 그 원권은 당해 기관에 환납하여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가운데 ①항은 한 수조권자는 1통의 收租文券만을 소지하게 함으로써 수조의 문권이 난립하는 것을 방지하고, 동시에 국가에서도 수조권의 소재를 체계적으로 파악하기가 쉬워 그 절급과 환수에 보다 균형을 기할 수가 있으리라는 의도에서 이같은 규정을 두 것이었다. ②항은 일단 절수한 수조지를 분할해서 傳受할 때에는 반드시 당해 기관을 통해 응당한 수속을 거치도록 규정함으로써 수조권의 사사로운 분할과 이동에 따른 그 隱漏 따위를 방지하고자 한 조처였다. 그리고 그 분할과 이동에 있어서 破丁을 불허한 것은 字丁의 破碎로 인한 토지 파악의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고 또한 한 자정 안의 다수 地番들이 분할됨에 따라 일어나는 은루 따위를 막기 위한 조처였다. 국가는 모양과 크기가 천차만별인 전지 하나하나를 개별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는 일이었으며, 그래서 그것들에다 지번을 붙이고 5결 등 일정 단위로 묶어 천자문의 순서에 따라 作丁함으로써 그 遺漏를 방지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③④항도 마찬가지로 수조지를 傳受 혹은 遞給할 때 모름지기 당해 국가기관의 수속을 거치게 함으로써 그 隱占이라든가 脫漏를 방지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규정을 보면 일단 절급된 수조지는 그 분할 收食과 증여가 가능하도록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단지 고려 후기의 사전이 사사로이 전수됨에 따라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는 사실을 거울삼아, 과전법에서는 그것을 반드시 국가기관의 정당한 수속을 거쳐 시행하도록 법제로 규정해 두기는 하였다. 그러나 수조권의 분할과 증여가 가능하였다는 것은 이 시기 수조권에 입각한 토지지배가 아직도 강인한 힘으로 마치 물권처럼 행사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것은 그 같은 수조권이 설정된 토지에 대해서는 오히려 그 擅賣·擅與를 불허하고 있었다는 규정(H-25)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그것은 아마도 전대 이래 오랜 연원의 인습을 좇아 관행되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토지지배관계에서 지배층의 계급적 속성은 그만큼 강인하였던 것이다.

H-12. 무릇 科에 충족하도록 수전한 자가 부모가 죽은 후 자기의 전지로써 부모의 전지와 바꾸고자 하는 경우는 聽許한다.

자기 과에 따른 응분의 수조지를 그 부모의 절수지와 교환하여 절급받을 수 있다고 규정한 것은 관인층으로 하여금 그 부조의 절수지에 대한 우선적 보유를 보장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유력한 부조의 자손일수록 유리한 수조지를 확보하게 되는 길을 열어 주었던 것이다. 이 규정에 따라 관인층은 자기 조상 전래의 소유지 위에다 과전 등 수조지로서의 사전을 절수함으로써 소유권과 수조권의 양자를 동시에 행사하는 토지를 확보하는 길이 더욱 커지게 되었으리라 추측된다. 이른바「累代農舍」라는 형태는 그러한 연유를 통하여 존속하였던 것이다.

H-13. 범죄자 및 후손이 없는 자의 공문을 그 家人이 은닉하고 관에 환납치 않는 경우에는 그 죄를 통렬하게 다스린다.

범죄를 짓거나 후손이 없는 경우에는 그 절수지를 국가로 환납하여야 한다는 규정이다. 물론 수조지로서의 사전을 두고 말한 것이었다.

H-14. 무릇 누구든지 寺院·神祠에다 전지를 시납하지 못한다. 어긴 자는 그 자신에게 죄를 준다.

고려 후기에는 사원 등에 대한 시납전이 인민에 해독을 끼치고 나라를 병들게 하는 것으로서 크게 문제시되고 있었다.0082)李齊賢,≪益齋亂藁≫권 9 下, 策問. 과전법은 이미 사원 등에 대한 일정한 토지의 절급을 규정하였던 만큼(H-3), 아무나 자의적으로 토지를 시납하지 못하도록 금지한 것이다. 이 규정 또한 수조지를 두고 말한 것이었다. 앞서 살핀 대로 수조지의 일반적 분할 收食이나 증여는 허용되었지만, 그것을 사원 등에는 시납하지 못한다고 한 것은 다분히 유교 이데올로기적 정책의 구현이었다고 할 것이다.

H-15. 경오년(공양왕 2년, 1390) 이전의 공사전적은 모두 다 불태워 없앴으니, 그것을 감히 私藏하는 자는 국법을 훼손한 일로 논하고, 그 재산은 적몰한다.

고려 말 전제개혁 과정에서 공양왕 2년에 이미 공사의 전적을 모두 불태워 그 동안 횡행해오던 조업전적 사전을 혁파하였고, 또 과전법의 새로운 분급수조지 제도에 따라 수조지로서의 사전을 분급하였으므로, 그 이전의 사전은 전혀 인정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과전법 시행 이후로는 이법이 규정한 새로운 공전·사전의 제도만이 효력을 가지게 되었다.

과전법에서 새로 규정된 공전은 기사양전을 통해서 보편적 국가 수조지로 편성되었고, 국가의 재정적 용도에 따라 그 수조권이 중외의 각 기관 및 각 公處로 분속되었다. 그리고 사전은 과전·공신전·군전·사원전 따위와 같이 개인 혹은 私處에 수조권이 절급된 토지였다. 고려 전시과에서의 공음전이나 혹은 막대한 규모로 설정되었다고 생각되는 군인전과 그 전정연립 등의 원칙은 이미 소멸한 지 오래 되었다. 과전법에서의 사전은 전시과에서의 경우보다 그 규모에 있어서 크게 축소되었으며, 반면에 국가수조지로서의 공전이 크게 확대되고 보편화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형식상으로는 고려 말의 전제개혁이 개인 수조지로서의 사전을 혁파하고 억제한다는 원칙을 견지함에 따라 일어난 일이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 있어서는 농업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토지 소유권의 성장이 관념과 현실 양면에 걸쳐서 커지게 되고, 그래서 토지소유관게가 그 수조관계보다도 현실적 의미를 더 크게 가지게 되었으며, 이제 토지의 소유자 일반이 점차 재생산과정에서의 자립성을 상대적으로 획득해 가면서 국가를 직접 상대하게 되는 처지로 성장하였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고려 말의 사전개혁은 불법적으로 범람하는 不輸租의 사전을 혁파하였으나, 그같이 역사적으로 성장해 온 토지의 소유관계까지 변형시킬 수는 없었다. 과전법은 토지소유관계의 그 같은 대세에 따라 토지국유의 이념을 전혀 실현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과전법에서도 수조권에 입각한 토지지배관계는 아직 강인한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규정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보편적인 국가 수조지 즉 민유지 위에 설정된, 복고적인 관행의 법제에 의하여 가설된 토지지배의 형태에 불과하였다. 이 시기 토지지배의 機軸은 이미 소유권에 입각한 그것으로 이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H-16. 앞으로 무릇 사전이라 칭하는 것은 그 田主가 비록 죄를 범하더라도 몰수하여 공전으로 삼는 일은 허락하지 않는다. (죄를) 범했더라도 응당 (전지를) 받을 자는 자기 과에 따라 절수한다.

과전법 시행 당시에 사전으로 설정된 토지는 이후 그 절수자가 죄를 범하여 당해 전지를 몰수하게 되더라도 그것을 공전으로는 편입치 못하며, 또한 가벼운 죄의 경우는 자기 과에 따라 응당 수전하도록 규정한 것이다. 아마도 전국 토지의 일정한 양을 사전으로 보유해 두고 그것을 매개로 관인층의 신분을 보전케 함으로써 지배질서를 유지한다는 것은 과전법의 한 원칙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관인층의 신분제적 토지 지배관계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려는 의도에서 설정한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런 면에서 그것은 또한 전대 이래 사전 지배의 오랜 관행을 반영한 조처이기도 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사전의 규모를 축소하지는 못하도록 하는 한편, 앞서 살핀 대로 경기지역의 토지는 직사관의 사전으로 더욱 확대 절급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었음이 주목된다. 그러므로 과전법에 나타난 분급수조지제의 원칙의 하나는, 외방에서의 사전의 확대를 금단하되 경기지역에 한해서는 어느 정도 변통의 여지를 남겨 두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 초기로 들어가 국가 행정력이 정비되면서 결국 경기지역에도 사전의 규모를 점차 축소해 가게 되었다.

H-17. 杖 이상의 죄를 범하여 謝貼을 수취당한 자, 期功 이상의 친척과 혼인한 자, 한량관으로서 부모의 喪葬·질병 이외에 이유없이 三軍摠制府에 나아가 숙위하지 않은 지 100일이 된 자, 判禁 이후 동성과 혼인한 자, 수신전을 받고서 재가한 자, 전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공문을 작성하지 않은 자, 자신이 죽고 처자가 없는 자의 경우, 그 전지는 타인이 陳告遞受함을 허용한다.

즉 범죄로 告身을 회수당한 자, 가까운 친척과 혼인한 자, 한량관으로서 赴京宿衛의 의무를 게을리한 자, 동성 혼인자, 수절하지 않은 관인의 처, 절수지가 있으면서도 공문을 작성치 않은 자, 죽은 후 처자가 없는 자의 수조지에 대한 陳告遞受의 규정이었다. 사전을 절수할 관인의 수에 비하여 사전의 절대 액수가 항상 부족한 상태에 있었던 한편, 국가로서는 환수해야 할 사전의 구체적인 실상들을 자세히 알아내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위와 같은 사례가 생기면 그것을 먼저 발각하여 신고하는 자에게 우선적으로 절급하는 법제를 세웠던 것이다.

진고체수법은 인간의 이기심리를 이용함으로써 사전의 불법적 隱漏와 그 확대를 방지하는 요법이었으나, 그런 만큼 수조지 절급의 균평을 기하기는 어려웠다. 그것은 관인층의 도덕적 품위마저 손상케 하는 방향으로도 운용되었다. 그러므로 태종 17년(1417)에는 위와 같은 사례가 생기더라도 타인의 陳告 대신 그 친척이 진고하게 하는 한편, 그 분급도 호조가 직접 관장하는 제도로 바뀌는 등0083)≪太宗實錄≫권 33, 태종 17년 3월 정미. 변천을 겪으면서 한동안 운용되었다.

H-18. 신미년에 수전한 뒤 과외로 冒受하거나 공사전을 침탈하는 자는 율에 따라 決罪하고 그 절수한 과전은 타인이 체수함을 허용한다. 만약 증거도 없이 타인의 奸盜 등의 일을 妄告하거나 雷電·猛獸·水火·盜賦으로 인하여 피해가 일어난 것을 지목하여 죄명으로 삼아 타인의 절수지를 탈취하려 하는 경우에는 통렬하게 금단하여 다스린다.

과전법이 시행된 공양왕 3년(1391)을 새로운 分地制의 원년으로 삼아, 그 이후 수조지를 과외로 모수하는 자와 공사전을 침탈하는 자에 대한 처벌을 규정한 것이며, 동시에 타인의 범죄를 무고하거나 자연 재해가 일어난 것을 지목하여 죄명으로 삼아 타인을 무고함으로써 그 절수지를 침탈하려는 자에 대한 금단규정을 설치해둔 것이다. 조준의 1차 상소에서는 토지 국유의 이념을 실현하려는 의도에서 이러한 경우는 사형에 처하고 그 자손에 대해서까지 청요직의 서용을 금고하는 혹독한 규정을 설정한 바 있었다. 과전법은 그 같은 토지 국유의 이념을 구현할 수는 없었지만, 관인들 사이의 불법적 과전 쟁점 혹은 그 쟁탈의 경우에 대비하여 최소한의 처벌 규정을 설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H-19. 경기지역 공사전의 四標 안에 荒閑地가 있으면 백성들의 樵·牧·漁·獵을 聽許한다. 금단하는 자는 그 죄를 다스린다.

이 규정은 산림·초지·천택·수렵장 등의 황한지에 대한 농민들의 전통적 공동체적 이용을 개방한다는 내용을 규정한 것이다. 그것은 물론 전통적 관행에 불과하였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새로운 전법에서 새삼스러이 규정하는 이유가 따로 있었던 듯하다. 즉 경기지역에는 관인층의 사전이 집중적으로 절수되어 있고, 사전의 전주는 물론 일반 농민층보다 호강한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흔히 그 주변의 다른 지면에 대해서까지 배타적 지배권을 행사함으로써 불법으로 사전 자체를 확대시키는 한편 국가와 농민에게 큰 해독을 끼치기가 일쑤였음이 고려 후기의 현실이었다.0084)“跨州抱郡 山川爲標”라고 누누이 지적되는 고려 후기 私田의 경우를 상기할 일이다. 위의 규정은 그래서도 필요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산림·어렵지 등 황한지에 대한 공동체적 이용은 소농민경영의 재생산 지반의 유지를 위해서도 필요불가결한 조건이었다. 그런 만큼 그것은 전근대사회에서는 원시 이래의 보편적 관행으로 존속되어 오던 것이었다. 그 같은 황한지의 공동체적 이용이야말로 불안정한 재생산과정에서 부침하고 있는 중세 농민생활의 최후의 의지처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H-20. 기사년에 양전하지 못한 바닷가나 섬의 전지, 양전에서 누락된 전지, 양전을 법대로 하지 않아서 餘剩된 전지, 새로 개간한 전지는 각 도 도관찰사가 매년 편의대로 관원을 보내어 踏驗作丁하여 田籍에 續書하고 主掌官에게 보고하여 軍需에 충당한다. 여러 사람이 함부로 점유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위반자는 죄로 다스린다.

기사양전에서는 왜구의 침해로 인하여 서남해안 지역을 양전하지 못하였으며, 또한 그것은 이 시기 농법의 발전과 양전제의 변동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약 1년 사이의 단기간에 졸속히 수행되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脫漏·餘剩田을 많이 남겨놓게 되었다. 과전법이라는 전국적 토지법제를 시행하기 위해서는 전국의 전지 모두를 파악하여 그 법제에 따라 운용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새로 개간되는 토지와 함께 여러 가지 사유로 기사양전에서 빠뜨려진 전국의 모든 경지는 각 도 단위로 양전하여 田案에 올려 파악하되, 이제 새로 확보한 토지는 국가수조지로 편성하여 군수에 충당하도록 할 것이며, 개인의 擅占을 막는다고 표방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천점을 막는다는 것은 물론 그것의 사전화를 막는다는 말로서 곧 외방에서의 사전의 확대를 방지한다는 일관된 원칙의 표명이었다. 또 그것을 군수에 충당한다는 것은 조준의 3차 상소에서 보이는 것처럼 기사양전에서 파악한 田結로써는 군수 확보의 여지가 전혀 없다고 하는 현실적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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