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21. 무릇 공사전의 전조는 水田 1결마다 糙米 30두로 하며 旱田 1결마다 잡곡 30두로 하고, 그 이외에 횡렴하는 자가 있으면 贓律로 논한다.
여기서 규정한 결당 30두라는 조액은 이른바 全實 연도의 최고액을 말한 것이며, 공전의 租는 중앙과 지방의 국고로, 사전의 조는 그 절수지로 수납되는 것이었음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0085)이에 관한 사실은 이 책 Ⅰ-1-3)<전세제도의 개편>에서 구체적으로 살피기로 하겠다. 조준의 1차 상소에서는 당시 토지 생산량의 1/10조로서 1결당 20두를 설정한 바 있으나, 정작 과전법에 와서는 그것이 30두로 규정되었다. 어느 편이 1/10에 가까운 수조액이었는지는 단언하기 어렵지만, 그 동안 전제개혁에 관한 논의가 개혁파의 주도로 진전되어 왔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에 과전법의 경우가 더욱 거기에 가까운 것이 아니었는가 한다.
고려 전시과에서는 공전과 사전에 각기 다른 수조율이 적용되었다는 학설이 분분하지만, 후기에 와서는 적어도 법제상으로는 공·사전 모두 1/10로 되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사전의 경우는 특히 법외의 횡령뿐 아니라 오히려 田主의 난립에 의한 중첩 수조가 보편화되어 농민을 할거적으로 수탈하였다. 과전법은 그 같은 조업전적 사전을 일단 모두 혁파하고 새로운 급전법에 따라 수조지를 새로이 절급하는 한편 1/10조율을 엄격히 적용함으로써 전주의 난립이라든가 무단횡렴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실로 “조종의 取民은 1/10에 그쳤다”0086)≪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신우 14년 7월 大司憲 趙浚 等 上書.라고 하는 것이 개혁파 사류의 기본 인식이었던 것이다.
H-22. 능침·창고·궁사·공해·공신전을 제외하고 무릇 전지를 절수한 자는 모두 세를 납부하는데 수전 1결은 백미 2두, 한전 1결은 황두 2두로 한다. 구경기는 料物庫에 납부하고 신경기 및 외방은 풍저창·광흥창에 분납한다.
사전에서도 그 전조의 일부를 세로서 국고에 납부하게 하는 규정은 고려의 전시과에서도 운용되고 있었지만, 그것은 1결에 기껏 7승 5흡 정도로서 그야말로 전세라고 하는 명목을 세워둔 것에 불과하였다.0087)≪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租稅. 그런데 과전법에서는 전시과에서 보다 그 세액이 더 많아지게 되었음이 특징이다. 그것은 국가수조지에서의 전조가 1/10인 것과 마찬가지로 과전의 전주 등으로부터 국가가 수취하는 세도 그 전조의 1/10로 되어야 하는 것이 천하고금의 通義라고 하는 보편적 원리의 적용과 관련된 일이기도 하였다.0088)≪太宗實錄≫권 3, 태종 2년 2월 무오.
1結 稅 2斗는 그 租 30斗의 1/15에 불과하므로 엄격히 1/10은 아니다. 다만 30斗는 2石이므로 그렇게 명목을 끌어다 붙였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능침·창고·궁사·공해전은 모두 왕실 및 국가기관의 수조지이며 거기에서는 이미 규정에 따라 전조를 수취하는 까닭에, 또 공신전은 사전 가운데서도 유일하게 과외로 자손에게 대대로 이어 전하는 특권이 부여된 가장 강력한 수조권적 토지지배의 유형이었으므로, 각기 세의 규정을 적용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국가 지배체제가 더욱 정비된 조선 태종 2년(1402)에 가서는 공신전도 면세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에 공신전·과전·군전 등 모든 사전에 대해서도 천하 고금의 通義인 1/10세를 징수한다는 원칙이 실현되어 갔던 것이다.0089)≪太宗實錄≫권 3, 태종 2년 2월 무오.
이들 모든 분급수조지에 대해서도 1결 2두라고 하는 얼마 안되는 稅나마 규정해 둔 것은, 무릇 조세의 근원적 수취권은 언제나 국가가 보유한다는 원칙을 지켜가기 위한 표현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즉 왕토사상 혹은 토지 국유사상의 의제적 표현이었다고 풀이된다.
H-23. 만약 대군을 조발하여 糧餉이 부족하게 되면 공사전을 불문하고 경비의 다소에 따라 임시로 액수를 정해서 公收하여 支用하고, 무사하게 되면 그친다.
과전법은 또한 국가 비상시의 경우 사전조의 공수에 관한 권한을 발동할 수도 있다는 규정을 두었다. 그 같은 권한의 발동 근거는 물론 토지국유라는 전통적 의제적 관념에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같은 관념은 이미 사전개혁의 과정에서 현실로 관철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조선을 개창한 이후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논의된 바 있으며 또 실제로 행사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0090)≪太宗實錄≫권 12, 태종 6년 10월 신묘 및 권 18, 태종 9년 10월 경술·11월 기묘, 그리고 권 26, 태종 13년 8월 임자.
H-24. 田主가 佃客의 所耕田을 빼앗으면 1負에서 5負까지는 笞 20으로 하고 매 5負마다 1등을 더해서 杖 80에 이르기까지 죄를 주고 職牒은 환수하지 않는다. 1결 이상의 경우에는 그 字丁을 타인이 체수하는 것을 허용한다.
과전법은 아직도 수조권적 토지지배의 강인한 인습을 반영하고 있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토지의 소유자를 마치 단순한 경작자인 양 佃客으로, 그 소유 및 경작지를 소경전으로, 그리고 그 토지에 대한 수조권자를 전주라고 규정한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그것은 물론 과전법에서 비로소 정립된 개념이 아니며, 토지국유사상에서 비롯된 전통적 의제적 관념0091)가령 전시과가 제대로 운용되고 있던 고려 전기에 조세납부자는 분명 토지의 소유·경작자인데도 그것을 전호로 호칭하였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租稅 예종 3년 2월 判).이 전제개혁이라고 하는 변동기를 맞아 지배층의 의사에 따라 다시 법제적 개념으로 확인되기에 이른 것이었다. 즉 토지의 원래 수조권자는 국왕으로 대표되는 국가이며 따라서 국왕 즉 국가가 田主이지만, 단지 그 수조권을 국왕이 어느 개인에게 절급하였으므로 이에 따라 그 개인이 전주로 행세한다는 관념에서 위와 같은 전주·전객의 관계가 설정되었다고 해석된다. 수조권적 토지지배라는 것 자체가 워낙 전근대국가에서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관인층의 계급적 지배체제를 유지 운용시켜 가는 중요 지반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런데 1결 이상의 토지 탈점을「處死」로 설정하였던 조준의 1차 상소에서의 엄격한 처벌 규정이, 과전법에 와서는 당해 字丁의 타인 체수를 허용하는 정도로 완화되기에 이른 사정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이었을까. 조준의 1차 상소는 철저한 토지국유의 원칙, 즉 토지의 철저한 국가관리의 원칙을 실현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전제개혁의 논의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원칙은 도저히 관철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토지 지배관계는 현실적으로 국유가 아닌 개인의 소유를 기축으로 하여 전개되고 있었으며, 세력이 있는 관인층일수록 그 사회세력의 근원은 이미 그 같은 소유관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수조권적 토지지배는 비록 왕토사상으로 분식된 국가권력의 강인한 토지 관리권에 근거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사실 그 바탕을 이루는 소유관계 위에다 가설한 부차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비록 분급수조지로 설정된 토지라 할지라도, 전객이 법에 따른 전주의 수조권의 행사를 침해하지 않는 한, 토지에 대한 사실상의 지배와 관리는 기본적으로 그것의 소유자 겸 경작자인 전객 개인의 소관에 속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수조권이 비록 법제화 관행에 따라 가설된 부차적인 토지 지배권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행사하는 자는 세력을 가진 관인층이었다. 개별 농민의 소유지가 그러한 세력가에게 침탈당할 수도 있다는 것은 고려 후기 사전의 예에서 증명된 객관적 사실이었다. 위의 조항에 보이는 소경전 침탈 금지규정은, 공권력을 행사하는 국가로서 그 존립지반인 농민의 자기 소유지 경작권, 나아가서는 그것의 바탕이 되는 토지소유관계를 보호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선에서 설정한 것이었다고 이해된다.
H-25. 전객은 자기 소경전을 가지고 別戶人에게 함부로 팔거나 함부로 증여할 수 없다. 만약(전객이) 사망·이사하여 戶絶한 경우라든가 餘田을 많이 점유하여 고의로 荒蕪케 한 경우에, 그 전지는 전주가 임의 처분하는 것을 허락한다.
위의 규정은 일단 분급수조지로 설정된 토지를 그 소유·경작자가 자의적으로 매매나 증여함을 금지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의 토지지배 관행으로 보아 매우 특이한 사항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고려시대에도 토지의 매매와 증여는 소유자의 의도에 따르는 것이 이미 오랜 사회적 관행으로 시행되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려 후기의 관행에 따라 과전법에서도 전주가 수조권을 행사하는 일은 자기 자신이나 혹은 그 대리인이 전객을 직접 상대하여 실현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전주가 모르는 사이에 당해 전지의 전객이 바뀌게 되면 그 수조권의 실현에 지장이 생겨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규정은 경작자가 함부로 변동되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전주의 수조권을 보호하려는 의도에서 설정한 것이었다. 이 조항의 뒤편에 경작자가 없어지거나 혹은 고의로 진황시킴에 따라 수조권을 실현할 수 없게 되는 경우 전주가 당해 전지를 임의로 처분할 수 있다고 규정한 것도 마찬가지 취지에서 설정한 조처였다.
과전법은 사회경제적 관행에 역행하는 규정까지 설정해가면서 수조권자인 관인층의 계급적 이익을 크게 배려하였다. 그러나 이 당시 토지의 지배관계는 연작농업의 일반화라고 하는 농업생산력의 일정한 발전을 바탕으로 이미 소유권을 기축으로 하여 전개되고 있었다. 소농민 경영의 분화가 상대적으로 활발해지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그러므로 개인 소유지의 매매·증여는 법제로써 금단해 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으며, 따라서 세종 6년(1424)에 이르러 그 금지 규정은 철폐되고 말았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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