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4. 조선업
  • 3) 조선 초기의 선박
  • (1) 조운선
  • 나. 조선시대의 조선

나. 조선시대의 조선

조선 전기에 있어서의 조운의 제도는 고려시대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고, 그 대략은<표 1>에 나타나 있다.

구 분 조 창 명 수 세 구 역 조 선 수
直 納 京倉(서울) 京畿諸邑과 江原道一部  
站 運 左水站 可興倉(忠州)
興原倉(原州)
昭陽江倉(春川)
慶尙道·忠淸道諸邑
江原道諸邑
江原道諸邑
51隻
右水站 金谷浦倉(白川)
助邑浦倉(江陰)
黃海道諸邑
黃海道諸邑
20隻
海 運 貢稅串倉(牙山)
德成倉(龍安)
法聖倉(靈光)
榮山倉(羅州)
忠淸道諸邑
全羅道諸邑
全羅道諸邑
全羅道諸邑
60隻
63隻
39隻
53隻

<표 1>조선 전기의 조창과 조운선

조선이 정작 조운제도를 정비하고 漕船도 대대적으로 건조하기 시작한 것은 태종이 즉위하고 나서부터이다. 고려 말기에는 왜구로 인하여 조운이 불통되므로 세곡은 陸轉에 의할 수밖에 없었고 태조와 정종대에도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하다가 태종대에 비로소 조운을 부활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세조대에는 군용과 조운을 겸용할 수 있는 兵漕船이 개발되고, 그것이 곧 猛船으로 발전되어 조운에 크게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에 조운의 사정은 크게 달라졌다. 우선 전운해야 할 물량이 격증했다. 종래의 조곡 외에 각 지방이 공납하던 특산물 대신에 미곡을 바치도록 하는 大同法의 실시가 확대되면서 대동미의 수송이 점차로 늘어난 것이다. 또 조운의 관할 관사가 이원화되었다. 종래의 조곡과 조창·조선은 종전대로 호조가 그대로 관할하고, 모든 대동미와 그 운송은 宣惠廳의 소관으로 된 것이다.

여기에 특기할 것은 시대가 내려올수록 조운해야 할 물량은 계속 증가하였는데도 불구하고 각 조창에 부속되어 있는 조선과 참선의 척수는 늘지않고 오히려 줄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조선 전기에는 조운을 오로지 조창 전속의 조선만이 전담하는 것으로 하여 조선의 척수를 책정한 데 대하여, 조선 후기에는 조운에 종사하는 선척의 종류가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사정으로 한국의 조운선도 시대에 따라 이름이 다르고 관할이 달랐던 때도 있으나 운곡선으로서의 체질과 배의 크기 등은 연면하게 이어져 별로 변함이 없었다.

<그림 9>는 규장각 장서인≪各船圖本≫에 나타나 있는 조선의 그림인데, 거기에 적혀 있는 기본 치수는 底板의 길이 57척, 底板의 너비 13척, 선체의 깊이 11척 등이다.

조선은 군선과 비교하면 길이가 짧고 깊이는 깊다. 그리고 군선처럼 노가 달려 있지 않다. 구조상으로 선수부의 경우 군선은 목재를 세로로 꾸민 縱材인 데 대하여, 조선은 판자를 가로 쓴 橫板으로 되어 있다.<그림 9>에서 가목과 가룡목이 설치된 곳은 4개소뿐으로 선체가 5개 구획으로 되어 있다.

조선의 적재량은 조선 초기에는 6백석으로 규제되어 있다가 시대가 내려오면서 점차 8백 석, 1천 석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그 때마다 선체의 크기가 변한 것이 아니라 동일한 선체를 가지고 적재량만 조절하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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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9>漕船≪各船圖本≫
<그림 9>漕船≪各船圖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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