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태에 이어 또 하나의 의문은 조선 후기 또는 말기에 대표적 다획성 어류의 하나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굳히고 있었던 멸치가 조선 초기의 문헌에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세종실록지리지≫의 함경도 預原郡의 土産과≪신증동국여지승람≫의 제주목 旌義縣 및 大靜縣의 토산에 들어 있는 行魚를 멸치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일제시대의 한 보고자에 따르면 행어의 정체를 밝히기 위하여 과거 대정현에 속하였던 摹瑟浦에서 조사를 하고 있을 때 60여 세의 한 노인이 나타나 ‘멸치를 행어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한다. 즉 당시부터 약 50년 전 그곳에 멸치가 많았는데 당시 서당 어른의 말에 의하면 멸치는 성질이 급한 어류이기 때문에 연안에 떼로 몰려와 우왕좌왕 하다가 뭍으로 뛰어올라 오곤 하는 습성이 있어 行魚라고 명명하였다는 것이다.0713)鄭文基,≪論文隨筆集≫(韓國水産技術協會, 1968), 180쪽.
멸치는 우리나라 모든 연안에 분포하고 자원이 아주 풍부한 어류이다. 조선 말기의 멸치어업 실태를 보면 강원도를 중심으로 한 동해안에서 가장 성하였고 남해안에서도 상당히 성하였다. 행어가 멸치라면 그러한 지방의 토산에 행어가 올라 있지 않은 이유를 밝히기 어렵다. 멸치자원은 조선 초기에도 풍부하였을 것임은 틀림없다. 다른 지방에서는 멸치를 많이 잡기는 하였으나 그것이 볼품없는 천한 물고기라 하여 토산에 기입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이것 역시 풀기 힘든 의문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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