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Ⅴ. 교통·운수·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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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 말값
  • (2) 국제 말값
  • 나. 여진·왜와의 말값 청산

나. 여진·왜와의 말값 청산

조선은 작은 말(果下馬)이 주로 산출되어 여진(야인)으로부터 큰 말인 韃靼馬·胡馬 등 종자말을 무역하여 왔다.

국초부터 北平館을 설치하고 또한 鏡城과 慶源에 무역소를 두어 야인들이 바치는 진상마와 무역을 통해 구입하여 오는 말에 대해서 마포·식기·지물 등의 잡물을 지급하여 왔다.0998)南都泳,<麗末鮮初 馬政上으로 본 對明關係>(≪東國史學≫6, 1960), 70∼72쪽. 따라서 야인과의 말거래에 따른 환율문제가 일어나자 세종 8년(1426)에 호조가 올린 대로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

말을 바친 야인에게 大馬 1필에 상등이면 면포 45필, 중등이면 40필, 하등이면 35필로 하며, 中馬 상등은 30필, 중등은 25필, 하등은 20필로 하고, 小馬 상등은 15필, 중등은 10필, 하등이면 6필로 하라(≪世宗實錄≫권 31, 세종 8년 정월 임인).

이러한 말값은≪경국대전≫호전 진헌조에서도 그대로 규정되었다.0999)≪經國大典≫권 2, 戶典 進獻.

한편 왜와는 對馬島主가 외교 의례로서 말을 진상하면 포목·미곡을 답례품으로 보내 주었는데,≪경국대전≫에는 그 환마값을 야인과의 거래에서와 같은 것으로 하였다.

馬 種 大 馬 中 馬 小 馬
品 等
綿 布 45 40 35 30 25 20 15 10 6

<표 15>여진·왜와의 환마가격표 (단위:匹)

조선사회에서의 말값은 정부의 단속에도 불구하고 간상배들이 값을 조작하여 백성들이 피해를 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한 진상은 세종 18년(1436)에 정부가 지적한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파악할 수 있다.

市井의 간사하고 교활한 무리들이 혹은 平準이 아닌 되[升], 말[斗]을 쓰기도 하고, 혹은 평준의 그릇을 속여 고치기도 하며, 혹은 곡식을 섞기도 하고, 혹은 모래를 섞기도 하여, 온갖 방법으로 속여서 적게 주고 많이 취하여 그 본값에 비교하면 겨우 10분의 6, 7을 얻게 된다. 어리석은 백성이 진실로 눈앞에 급한 것을 구하려고 고소할 여가도 없어서 더욱 곤궁하게 되니, 진실로 불쌍하고 민망스럽다. 京市署는 비록 직책은 市令을 맡았지만 관직은 낮고 인원은 적어서 능히 두루 살필 수가 없으니, 어찌 간사한 자를 징계하고 원통한 사람을 바로잡아 줄 수 있겠습니까(≪世宗實錄≫권 75, 세종 18년 11월 병진).

정부는 이러한 실정을 憲府로 하여금 엄중히 적발하여 법에 따라 다스리고 아울러 경시서의 근무태도를 규찰하려 하였으나, 여러 조신들이 “이같이 금령을 만든다면 시골의 어리석은 백성들은 곡식을 바꾸기가 쉽지 않아서 먹을 것을 얻기가 어려울 것이니, 헌사에서 그 대강만 들어서 규찰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고 하여, 결국 형식적인 단속에 그쳐 간상배들을 근절시키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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