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Ⅰ. 학문의 발전
  • 3. 역사학
  • 1) 민족사의 체계화와 전대사의 정리
  • (2) 고려시대사의 정리
  • 나.≪수교고려사≫

나.≪수교고려사≫

 세종은 즉위할 때부터 부왕이 관심을 가졌으나 미처 완성하지 못한 고려사의 개수작업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즉위년(1418) 12월에≪고려국사≫는 없는 것만 못하다고 비판하였으며204)≪世宗實錄≫권 2, 세종 즉위년 12월 경자. 다음해인 원년 9월에 유관과 변계량으로 하여금 고려사를 개수하도록 하였다.205)≪世宗實錄≫권 5, 세종 원년 9월 임술. 이에 세종 3년 정월 30일 개수된 고려사가 왕에게 상진되었다. 이 때의 개수목적은 사신의 사초에 다르게 기록된 사실을 바로 잡고, 정도전이 다 고치지 못한 참월한 용어를 변개하는데 있었다.206)≪世宗實錄≫권 11, 세종 3년 정월 계사. 편찬체재나 용어의 변개에는 변계량의 주장이 크게 반영되었다.

 그러나 세종 5년 12월 젊은 사관인 李先齊·梁鳳來·鄭賜·康愼·裵寅·金張 등에 의해 당시의 관제와 칭호를 변개하여 그 實을 없애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있었던 바, 세종은 변계량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관과 윤회에게 명하여 변개된 참월한 명칭을 당시 원상태로 직서하여 사실을 보존하도록 하였다.207)≪世宗實錄≫권 22, 세종 5년 12월 병자. 이 개수작업은 세종 6년 8월에≪讐校高麗史≫로 완성되었다.208)≪世宗實錄≫권 25, 세종 6년 8월 계축. 그리고 세종은 윤회에게 명하여 정총이 쓴≪고려국사≫의 서문도 고치도록 하였다.209)≪世宗實錄≫권 30, 세종 7년 12월 임신. 이에서 보듯이 유관과 윤회의 개수잡업은 변계량이 개칭한 참월한 명칭의 개칭에 그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수교고려사≫도 반포되지 못하였다. 세종 7년 12월 변계량의 강력한 반대와 이를 지지한 卓愼의 주장으로≪수교고려사≫에 윤회의 서문을 붙이는 것이 보류되었다.210) 위와 같음.

 ≪수교고려사≫는 세종의 명을 받고 상진되기까지 8개월밖에 걸리지 않았으므로 변계량이 개칭한 용어를 직서하는데 그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참월한 명칭의 직서문제가 일단≪수교고려사≫를 통하여 해결되었으며, 이후 직서주의는 권제의≪高麗史全文≫을 거쳐≪고려사≫로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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