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월한 용어에 대한≪수교고려사≫의 직서주의가 변계량 등에 의해 좌절된 후, 세종은≪고려사≫가 완성되지 않은 책이라고 인식하였다.211)≪世宗實錄≫권 50, 세종 12년 11월 경신. 따라서 세종 13년(1431) 경연석상에서≪고려사≫가「宗」을「王」으로 고쳐 써서 그 진실하지 못한 점이 많으니≪태종실록≫의 수찬작업이 끝나는 대로≪고려사≫를 개수하고 싶다212)≪世宗實錄≫권 51, 세종 13년 정월 경인.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개수를 위한 간헐적인 정지작업을 거친 후213) 그것은 세종이 춘추관에 전지하여 고려사의 편찬에서 편년체의 장점을 주장한 점을 들 수 있다(≪世宗實錄≫권 57, 세종 14년 8월 병신). 본격적인 개수작업은 세종 20년부터 시작되었다. 그 해 3월 許詡가 고려사를 기전체로 쓸 것을 건의하자 권제가 반대하여 체재에 대한 논란이 있었고,214)≪世宗實錄≫권 81, 세종 20년 3월 을사. 이어 7월에는 우왕과 창왕의 칭호서술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215)≪世宗實錄≫권 82, 세종 20년 7월 경인. 그리고 세종 21년에는 王氏가「龍孫」이라는 것을 그대로 사책에 편찬해 넣도록 하였다.216)≪世宗實錄≫권 84, 세종 21년 정월 신묘. 그리하여 세종 24년 8월에 신개와 권제 등에 의해 상진되었다.217)≪世宗實錄≫권 97, 세종 24년 8월 기해. 개찬작업에는 신개와 권제 이외에도 安止·南秀文·李先齊·鄭昌孫·辛碩祖·魚孝瞻 등 젊은 사관들이 참여하였다.218)≪世宗實錄≫권 123, 세종 31년 2월 계유에≪高麗史全文≫의 찬자들을 처벌하는 내용의 기사를 통하여 알 수 있다. 편찬에 이용된 자료는 세종 6년에 편찬된≪수교고려사≫를 기초로 하여≪고려실록≫과 문집 등이 이용되었으므로 직서주의의 편찬원칙과 편년체의 서술체재에 따라 이루어졌다. 이를 일명≪權草≫·≪紅衣草≫라고도 하며 혹은≪高麗史全文≫이라고도 하였는데,219)≪成宗實錄≫권 138, 성종 13년 2월 임자. 한편 이 때 梁誠之가≪高麗史全文≫의 간행을 건의한 점으로 보아 그 뒤에 같은 편년체로 편찬된≪高麗史節要≫의 반포에도 불구하고 이를 보완할 수 있는 내용이 상당히 수록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현전하지 않는다.
이 책에서 보완 개수된 것은 크게 두 가지고 첫째≪고려사전문≫이라는 명칭에서 보여지듯이≪고려실록≫을 통하여 소략한 기사를 많이 보충하여 그 내용을 풍부히 하였다는 점, 둘째 고려왕조에서 사용된 용어를 원래의 기록대로 직서하였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이전의 고려사 기술에는 왕을 칭하지 않고 禑·昌이라고 썼는데,≪고려사전문≫에서는 표제를 廢王禑·昌이라고 기록하고 재위 때의 기사에서는 당시 신하들이 칭한「王」또는「上」을 그대로 쓰게 하였다.220)≪世宗實錄≫권 82, 세종 20년 7월 경인.
그런데 그 체재에 대하여 기전체로 편찬되었을 것이라는 설도 있으나,≪고려사전문≫은 편년체로 편찬되었다. 세종 20년 3월의 기사를 보면 승지 허후가 이제현의≪사략≫이후 고려사의 편찬이 편년체로 이루어졌는데, 중국이 역대 사서가 모두 기전체로 편찬되었다는 사실을 들어 기전체로 할 것을 건의하자, 세종은 권제를 불러 견해를 물었다. 그는 고려사의 본래 사료가 소략하기 때문에 기·전·표·지로 나누어 기술한다면 역사서의 체재를 갖추기 어렵다고 반대하였다.221)≪世宗實錄≫권 81, 세종 20년 3월 을사.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고려사전문≫은 편년체로 편찬된 것이 분명하다.
이와 같은 경위로 찬진된≪고려사전문≫은 세종 30년에 일단 인출되었으나, 교정과정에서 인물평가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점이 제기되어 반포가 중단되었다.222)≪成宗實錄≫권 138, 성종 13년 2월 임자. 그리하여 세종 31년 정월 김종서·정인지·이선제·정창손 등에게 개찬을 명하였다.223)≪世宗實錄≫권 123, 세종 31년 정월 기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역사편찬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문제는 편찬에 참여한 권제·안지·남수문 등을 처벌하는 옥사로까지 확대되었다.224)≪世宗實錄≫권 123, 세종 31년 2월 계유. 요컨대≪고려사전문≫은 舊史의 오류를 시정하고 그 내용을 상세히 보충하였으나, 수사에 공정하지 못한 점이 많아 결국 반포가 중지된 것이다.
이 책의 문제점은 권제가 개인적 情理에 따라 사실을 증감한 점, 남의 청탁을 받고 고쳐 쓴 점, 자기 조상에 대한 기술이 사실과 다르게 기록된 점 등이었다. 결국≪고려사전문≫은 편년체의 역사서로 내용이 크게 보완·시정되었으나 역사서술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하여 반포되지 못하였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