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Ⅰ. 학문의 발전
  • 4. 지리지의 편찬과 지도의 제작
  • 3) 세계지도의 제작
  • (2)≪해동제국기≫의 일본 및 유구국지도
  • 다. 유구국지도(<지도 5>)

다. 유구국지도(<지도 5>)

 이 지도도 위에서 언급한 행기도에는 없는 지도이며 일본승 道安이 들여 온 지도로 추정된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도안은 일본국도와 유구국도를 우리 나라에 전했고, 그것을 다시 모사하여 정부기관과 궁중에 보관하게 한 기록이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보면 일본국도와 琉球國之圖는 우리 나라에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일본본국지도와 구주지도에서는 전통적인 행기도를 따르고 있으며 지형의 표시가 전혀 없다. 유구국지도에서는 산맥과 灣入이 위에서 언급한 두 지도보다 훨씬 상세하며, 포구와 城도 자세하게 기록되었다. 유구(현재의 오끼나와)섬뿐 아니라 주위에 산재하는 약 20개의 섬을 포함하고 있으며 모두 유구에서의 거리를 里數로 기입하였다. 또 섬에 유인도임을 표시하기도 했다.≪해동제국기≫의 유구국도는 전사과정에서 발생하는 오류를 제외하고는 거의 원형대로 조선 후기의 지도첩에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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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5>琉球國地圖
<지도 5>琉球國地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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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국 一岐島之圖(<지도 6>)와 일본국 對馬島之圖(<지도 7>)는 유구국지도와 같이 일본의 행기도와 관련이 없는 지도이고, 순전히 우리 나라에서 자료를 모아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태종 2년에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일본국도의 원본으로 추정되는 것은 朴敦之가 일본에서 들여온 지도인데, 그곳에도 일기도와 대마도가 빠져 있어서 일기도와 대마도를 보충하여 완성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465)≪世宗實錄≫권 80, 세종 20년 2월 계유. 그러나 일기도와 대마도의 지도는 박돈지가 들여온 일본도에 포함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박돈지의 지도를 원본으로 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일본국지도에 보이는 일기도와 대마도는 차이가 너무 크고, 박돈지의 지도는 우리 나라에 들여온 후 여러 차례에 걸쳐서 재모사하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즉 세종 2년(1420)과 세종 17년에도 예조에서 모사하였다.466) 위와 같음. 지도에 대한 중요성은 어느 시대에나 강조되어 왔으나 왜구의 침략으로 곤란을 받고 있던 조선 초기에 일본지도의 중요성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그 중에도 일기도와 대마도는 우리 나라에 가까운 관계로 왜구의 근거지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두 섬의 지도에 대한 우리 나라의 관심이 특별하였다는 것을 추정하기는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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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6>一岐島之圖
<지도 6>一岐島之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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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7>對馬島地圖
<지도 7>對馬島地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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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던 만큼≪해동제국기≫의 6장의 지도 가운데 가장 상세한 지도가 일기도와 대마도지도이다. 일기도와 대마도지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해안선과 지형이 자세하고 특히 灣入을 강조한 점이다. 왜구의 소탕을 고려한다면 가장 중요한 것이 그들의 근거지인 포구임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포구의 명칭을 모두 일본어 音을 우리 나라의 이두[吏讀]방식467) 포구의 지명이 원래 대마도 지명인지 또는 대마도 지명을 우리 나라 사람들이 알아보기 위하여 이두방식으로 고친 것인지는≪해동제국기≫본문과 지도에 나타나는 지명표기가 동일하지 않은 것으로 알 수 있다. 즉≪해동제국기≫의 道路里數條에는 “自我慶尙道東萊縣富山浦至對馬島之都伊沙只四十八里 自都伊沙只至船越浦十九里 自船越至一岐島風本浦四十八里”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의 선월은 대마도 지도에서는 訓羅串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一岐島의 풍본포에는 “風本浦倭訓間沙毛都浦”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선월의 日本訓 Funakosi을 訓羅串으로 표기한 것이므로, 우리 한자음과 훈으로 일본 지명을 표기한 것이 확실하다.으로 기록한 점이 매우 특이하며, 이러한 표기가 우리 나라 사람들에 의한 직접 조사를 통해서 만들어진 지도임을 암시해 준다. 지도에 표기된 이두지명을 일본지명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海東諸國紀 對馬島現地名 海東諸國紀 對馬島現地名
訓羅串浦
豆豆浦
完尼老浦
加羅愁浦
船越(Funkosi)
豆酘(Tsutsu)
鰐浦(Waniura)
唐洲(Karasu)
仇時老浦
多計老浦
間沙毛都浦
 
櫛(Kusi)
竹敷(Takesiki)
風本(Kazemoto)
 

<표 1>지도표기 지명과 현지명의 비교

李炳銑,≪韓國古代國名地名硏究≫, 附錄 對馬島地名考를 참고하였음.

 「후나고시」(船越)라는 지명은 일본의 섬에 흔히 쓰이는 지명이다. 즉 좁은 地峽으로 灣과 灣이 나누어져 있을 때, 긴 해로를 돌아가지 않고 작은 배의 경우는 배를 들어올려 건너편에 있는 만으로 배를 넘긴다는 뜻이다. 즉 일어의「후나고시」는 한자의 뜻과 같이 ‘배를 넘기는 곳’이라는 뜻이다. 대마도의「후나고시」는 1672년에 동서를 연결하는 수로가 굴착되기 이전에는 좁은 지협을 육지로 넘어서 동서를 연결하던 곳이다. 일본의 遣唐使는「후나고시」까지 작은 배로 와서 지협을 넘어서 큰 배로 갈아타고 중국으로 항해했다고 한다.468) 金義煥,≪朝鮮通信使의 발자취≫(正音文化社, 1985), 51쪽.

 끝으로≪해동제국기≫에 삽입된 대마도의 모양이다. 첫째 대마도는 상하 2개의 섬인데 왜 하나로 되었는가 하는 의문인데, 1672년에 수로의 굴착으로 2개의 섬이 되었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다. 둘째는 남북으로 긴 섬을 등을 구부린 새우 또는 말발굽 모양으로 남북보다도 오히려 동서를 길게 만든 데 대한 의문이다. 실제로 대마도는 남북의 길이가 약 82㎞이고 동서가 18㎞로 남북의 길이는 동서의 약 4.5배나 된다. 반대로≪해동제국기≫의 대마도는 동서의 폭이 남북의 길이 보다 약 1.3배나 더 길다. 이러한 지도 모양의 변형은≪해동제국기≫의 책의 판현에 맞추기 위한 것이다. 즉 지도의 방위를 무시하고 남북으로 긴 섬을 구부려 말발굽 모양으로 그린 것이다.≪해동제국기≫의 대마도지도를 구부러진 중앙산맥을 따라서 섬 남북의 길이를 재고 지도의 폭을 재서 비교하면 남북으로 길게 뻗은 섬임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책의 판형 때문에 왜곡된 대마도의 형태는 조선시대 말까지 우리 나라 고지도에 계속 그대로 전사되었다.

<李 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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