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은 정종 2년(1400) 11월에 즉위하면서 곧바로 환관들의 願佛이었던 궁중의 仁王像을 대궐 밖으로 옮겨놓게 하고,562)≪定宗實錄≫권 6, 정종 2년 11월 계유. 또 다음달에는 중외의 사사에서 행하던 道場法席 등의 모든 불사를 폐지시켜563)≪定宗實錄≫권 6, 정종 2년 12월 임자. 排佛의 뜻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태종 원년(1401) 정월에 門下府郞舍에서 상소하여, 당시 불교 교단인 五敎兩宗을 혁파하고 그에 속한 각 사사의 전토와 노비를 국가공용으로 몰수할 것을 청하였다.564)≪太宗實錄≫권 1, 태종 원년 정월 갑술. 그 해 윤 3월에도 대사헌 柳觀 등이 승도를 물리치고 5교 양종을 혁파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565)≪太宗實錄≫권 1, 태종 원년 윤3월 신해. 그러한 척불의 건의들에 대하여 태종은 자신도 불교의 옳지 않음을 알고 있어 혁파할 생각이 간절하나, 太上王(태조)께서 불사를 좋아하므로 차마 혁파를 서두를 수가 없다고 하였다.566)≪太宗實錄≫권 1, 태종 원년 윤3월 임자.
그러면서도 태종은 서서히 억불의 시책을 펴기 시작하였다. 태종 2년 4월에 書雲觀의 상서에 따라 密記付 외의 寺社田을 軍資에 소속시켰다.567)≪太宗實錄≫권 3, 태종 2년 4월 갑술. 그러자 그 해 8월에 태상왕은 비록 밀기부 외의 사사라도 그 전토를 모두 되돌려 주고, 승려들의 度牒을 거두어들이지 말 것이며, 부녀들이 절에 가는 것과 造佛·造塔을 금하지 말 것 등을 태종에게 요구하였다. 태종은 태상왕의 건강을 위해 肉食할 것을 조건으로 그 요청을 들어주기로 하였다.568)≪太宗實錄≫권 4, 태종 2년 8월 을묘.
그로부터 얼마동안은 잠잠했으나 그 이듬해 6월에 다시 司諫院에 의해 사사와 전지의 혁거문제가 거론되었다.569)≪太宗實錄≫권 5, 태종 3년 6월 임자. 이는 곧 그 전해 8월에 태조의 요구로 사사 전토노비의 몰수 및 국가적인 抑僧策이 중지되었으므로, 태조와의 약속을 철회하여 다시금 抑僧革寺의 시책을 실행하도록 촉구한 것이다. 또 사간원에서는 태종 4년 12월에 時務數條를 왕에게 올렸는데, 그 가운데에 부녀들이 절에 가는 것을 금지하는 건이 들어 있었으므로, 왕은 그 건의를 승낙하였다.570)≪太宗實錄≫권 8, 태종 4년 12월 을해.
그리고 태종 5년 8월에는 忠淸道觀察使의 건의에 따라 전국의 廢寺 전답과 노비를 모두 국가의 공용에 귀속하도록 하였다.571)≪太宗實錄≫권 10, 태종 5년 8월 임진. 또 같은 해 11월에는 議政府의 요청에 의하여 寺社의 전토와 노비를 혁파하였다. 실은 그 때 지방의 두 어군데 절에서 주지가 비행을 저지른 것을 계기로 하여 의정부에서 글을 올려 신랄하게 비난함과 아울러 그와 같은 요청을 해왔던 것이다. 태종은 그 청에 따라 密記付의 裨補寺社 중에서 개경과 新京(한양)의 각각 한 宗(당시 11宗이었음)에 1寺, 각 道의 府에는 禪과 敎 계통의 종에 각기 1사, 郡縣에는 전 종단 합쳐서 1사씩에 한해서 노비의 수를 정하여 해당 절의 10리 밖에서 농사짓고 살며 매년 윤변으로 교대해서 절 일을 맡도록 하고, 여자 좋은 절 경내 및 승려와의 왕래 접촉을 못하게 하였으며 그 나머지 절들의 노비는 모두 국가에 예속시켰다.572)≪太宗實錄≫권 10, 태종 5년 11월 계축.
그리하여 태종은 즉위 초부터 나타내기 시작했던 배불의 의지를 ① 출가의 억제 ② 婦女上寺의 금단 ③ 寺社田民의 革除屬公이라는 방법으로 실현해 갔다. 태조에 의해 억불시책이 일시적이나마 제지당하자 한 때 부왕의 비위를 맞추기도 하였으나, 오래지 않아 신하들의 상서·계청이라는 형식을 빌려서 다시금 서서히 억불의 시책을 펴나갔다.
태종이 그와 같이 사사의 전토와 노비를 혁파하여 국가에 예속시킨 3개월 뒤인 6년 2월에 曹溪宗 승려 省敏573) 省敏은 고려말 王師였던 大智國師 粲英의 門徒로 이름이 보이며, 태종이 태조의 陵에 세운 開慶寺의 住持가 되어 慶州 栢栗寺의 旃檀觀音像을 개경사에 이안토록 아뢴 사실이 있다.이 승려 수백 명을 이끌고 궐문으로 가서 申聞鼓를 쳤다. 그 때 성민 등은 사사의 수를 줄이고 절의 전토와 노비를 몰수한 조정의 처사를 철회하여 줄 것을 촉구하였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으므로 수백 명의 승려를 이끌고 가서 신문고를 쳤던 것인데, 태종은 끝내 그들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574)≪太宗實錄≫권 11, 태종 6년 2월 정해.
그 후 태종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시 교단내의 諸宗이 남겨야 할 사사와 居僧·노비·전답의 수량을 확정하고 또 종단마저도 축소시켰다. 태종 6년 3월의 의정부 계청에 의하여, 왕은 한양과 개경에는 5교양종에서 각 종단(11宗)마다 1寺씩, 지방의 牧과 府에는 선종계통과 교종계통에서 각기 1사씩, 군·현에는 선·교종 통털어서 1사씩만을 남기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 남겨진 절들 중에서 신구 兩都에 선종계통과 교종계통의 절 각 한 곳에만 전토 200結과 노비 100口를 예속시켜 승려 100員을 常養토록 하고 그 나머지 9개의 절에는 전토 100결과 노비 50구로 승려 50명이 생활하게 하였다. 또 각 道廳 소재지에는 禪·敎 중의 절 하나에만 屬田 100결과 노비 50구로 50명의 승려를 있게 하고, 각 고을 안의 資福寺에는 給田 20결과 노비 10구로 10명의 승려를, 邑 밖에 남겨진 각 전에는 급전 60결과 노비 30구로 30명의 승려를 머물게 하였다. 고려왕조 밀기부의 각 절에 소속된 전답과 노비들을 신도의 5교양종 중 전답과 노비가 없는 각 질에 나누어주고 또 定數 외의 사사와 전답·노비는 정수 내의 각 절에 옮겨 주고 그 나머지는 모두 국가에서 몰수케 하였다.
그리하여 결국은 曹溪宗과 摠持宗을 합쳐서 70寺, 天台疏字宗과 法事宗을 합쳐서 43사, 華嚴宗과 道門宗을 합쳐서 43사, 慈恩宗은 36사, 中道宗과 神印宗을 합쳐 30사, 南山宗과 始興宗은 각각 10사씩만을 남기게 하였다. 그리고 태종은 특별히 檜巖寺에는 道에 뜻이 있는 승려들이 모이므로 예외로 하여 전지 100결과 노비 50구를 더 주게 하였으며, 表訓寺와 楡岾寺 또한 회암사의 예에 따라 그 원래 속해 있던 전답과 노비를 종전의 수에서 줄이지 말고 정수 외의 사사에도 柴地 1∼2결씩을 나누어주게 하였다.575)≪太宗實錄≫권 11, 태종 6년 3월 정사. 또 그 나흘 뒤인 4월 초하루에는 후속조치로 정액 외의 寺社田口를 각 官司에 나누어 예속시켰다. 이 역시 의정부의 계청에 의한 것으로 정수 외의 사사 전답은 모두 軍資에 속하게 하였고 그 노비는 모두 典農寺에 예속시켜 軍器監·內資·內膽·禮賓寺·福興庫 등에서 각기 옛날에 살던 곳을 중심으로 사역에 종사토록 하였다.576)≪太宗實錄≫권 11, 태종 6년 4월 신유.
태종의 그와 같은 결단에 의하여 조선왕조가 시작된 이래 그토록 조신과 유자들이 갈망했던 斥佛抑僧의 정책이 일단은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전국에 남겨진 사원의 총수는 당시 11宗 모두 합해 242寺가 되었는데, 이 범위 안에서 한양·개경이나 각 도와 군현에 남겨질 절들이 배정되었던 것이다.
전국에 242사만이 남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11종이던 종단마저 7종으로 축소되기에 이르렀다. 태종 6년 3월의 의정부 계정에서는 분명히 전체 종단이 11종이었는데,≪태종실록≫(태종 7년 12월)의 기사에는 당시의 종파 이름이 조계종·천태종·화엄종·자은종·中神宗·摠南宗·始興宗 7종으로 나타났다. 이 종명으로 보아 소자종과 법사종을 합쳐서 천태종으로 하고, 중도·신인 두 종을 합쳐 중신종으로, 총지종과 남산종을 총남종으로 합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으나 여기에 오직 도문종의 이름이 빠지게 되는 셈인데 이는 아마 화엄종 속에 합쳐진 듯하다.
그러나 11종을 7종으로 축소시킨 그 정확한 시기는 실록에 밝혀져 있지 않아서 알 수 없다. 다만 11종이 분명히 열거되어 있는 태종 6년 3월에서 7종의 이름이 명시된 7년 12월의 사이에 확정된 것은 특림이 없다고 하겠다. 그런데≪慵齋叢話≫에서는 국초에 12종이었던 것을 태종이 혁파하여 양종만을 두었다고 하였으나,577) 成俔,≪慵齋叢話≫권 8. 이는 정확한 기록이라고 할 수 없다. 즉 태종 당시에는 분명히 11종이었고 또 양종 아닌 7종으로 감축시켰으며 양종으로 폐합된 것은 세종대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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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